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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0.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첫 미사 집전 때 순교의 은총 청한 유스토 신부
- 윤영선 작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출 생 1838년 프랑스 디종(Dijon)
순 교 1866년(28세) 새남터 / 군문효수
신 분 신부
조선 사람 영혼 구하기 위해 선교 자원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천상으로 가는 교회의 시작이다. 두려움에 떨던 사도들이 다락방을 뛰쳐나와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한 사실은 성령께서 교회에 내리시는 은혜를 짐작하게 해준다. 더욱이 해마다 성당에서 뽑는 성령 강림 대축일 ‘칠은 뽑기’를 받아들 때면 한국 천주교회가 성령의 특별한 은총 안에 있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선교사도 없는 현실에서 하느님을 알고(통달) 두려워했던(두려워함) 선조들은 신앙의 분별력(의견)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한 항구함(굳셈)으로 환난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박해가 극심하던 그 시절, 이 땅에 오순절의 사도들처럼 지구 반대편 젊은이에게 불같은 용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일으키신 섭리도 같은 성령의 손길이었다.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프랑스인 사제 유스토의 말씀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뜻을 헤아려(슬기) 자녀다운 효성으로 살아가겠다는(효경) 다짐이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에서 이루고자 했던 소망이란 수품 후 첫 미사 때 청했다는 순교의 은혜였다. 그 소원은 오래지 않아 실현되었다. “나는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겠습니다.” 박해자에게 행한 선언처럼 그는 1866년 3월 7일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5대손 강진수 신부 부르신 성령의 은혜
유스토 성인의 후손 가운데 강진수(본명 Jean Crinquand) 신부가 있다. 강 신부도 외가의 5대조 할아버지 유스토 순교자처럼 한국의 선교사가 되어 40년을 살았다. 생전에 200회가 넘는 헌혈을 하고, 많은 곳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물을 찾아준 인물이다. 순교의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나 가난한 한국 백성을 위한 다른 방식의 순교자 또 다른 모양의 위로자가 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성령이 파라클리토(Paracletos, 보호자·위로자·협조자·변호자)라고 하셨다. 유스토 신부를 순교자로 불러주시고 강 신부를 백성의 위로자로 삼으신 성령의 은혜가 우리 교회에 이토록 충만하다.
소망처럼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 현양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성인이 순교하신 서울 새남터성지를 방문하였다. 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성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키가 크고 곱슬거리는 옅은 밤색 머리에 얼굴이 맑고 부드러우며 묵상과 사색에 잠긴 듯 선한 눈매를 가진 성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새남터성지 지붕 위로 손에는 성경을 고이 잡으신 채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고 계신 성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인이시여~ 당신의 성덕으로 저의 세상 욕심과 걱정들을 잠재우고, 성령의 이끄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1. 성 최형 베드로
최형 성인, 선교사 복사로 활동하며 신심서적 번역하고 출판
- 윤영선 작 ‘성 최형 베드로’
출 생 1814년 충청남도 홍주
순 교 1866년(52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회장
핍박 중에도 삼위일체 하느님 인식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당혹스럽다. 우리의 이성이 상식을 초월하는 진리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자유로운 분을 언어의 틀 속에 가두려는 시도조차 우리네 방식대로 하느님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아닐까 한다. 그럴수록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경이로워진다. 그들은 하느님을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었다. 이해하는 대신 깊은 신뢰로 사랑을 드렸다. 성부·성자·성령을 세련된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어도, 사랑이라는 공통된 끈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엮어가며 하느님 나라를 갈망했다. 핍박 중에도 성부와 성자·성령의 성호경을 그리면서 하느님을 인식하였다.
동생 방제 대신해 일생 교회 위해 헌신
어린 아들 방제가 사제가 되기를 바라며 먼 외국으로 떠나보낸 최 야고보와 황안나는 순교자 최수와 성인 최형 베드로의 부모이기도 하다.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아서일 것이다. 동생 방제는 어리고 순결한 자신을 바쳐 이국땅에서 먼저 제물이 되었다. 최형은 동생을 대신해 일생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1866년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동생의 동료 김대건과 최양업이 최형에게는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대건과 함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온갖 죽음의 문턱을 넘어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왔다. 그는 선교사 신부님들의 손발이 되어 복음 전파에 협력했으며,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면서 외교인과 예비 교우들에게도 친절을 다했다. 인쇄소의 책임을 맡아 주님의 말씀을 서적으로 보급한 마지막 소명까지 그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주님 영광의 모습이다.
한 분 하느님께서 세 위격으로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였던가. 최형 성인과 그의 가족을 보면 각자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함과 다양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노력조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한 기적의 도구로 삼아주셨다. 앞서간 동생 방제에 대한 사랑과 그가 못다 이룬 사제의 꿈까지 최형과 가족이 함께 이룬 기적이라고 믿고 싶다. 방법과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의 사랑을 실현해 낸 것은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삼위이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온몸과 마음·영혼까지 바친 최형 성인
박해 시대의 아픔을 딛고 오늘날 명동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본당으로서 서울 중심부에 우뚝 서 있다. 힘들 때 마음의 위안과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성전 문을 들어가서 자리에 앉는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일구어낸 성전이 그곳에 있다. 주님의 자비와 성령이 가득한 제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몸과 마음·영혼까지 바친 성인의 굳건한 모습을 만나게 되고 깊은 감동과 뭉클함이 밀려와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2. 성 오메트르 베드로(Pierre Aumaître)
병인박해 때 맡겨진 양 떼 지키고 순교의 월계관
- 윤영선 작 ‘성 오메트르 베드로’
출 생 1837년 프랑스 앙굴렘(Angoulême)
순 교 1866년(29세) 갈매못 / 군문효수
신 분 신부
성체 모시겠다는 열망 간절했던 신앙 선조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는 성체를 이루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우리처럼 나약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도록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의 무게가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성체를 모시는 데 얼마나 진심이었으며, 그 열망으로 미사를 집전해 줄 사제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선조들은 처음부터 성체성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른바 ‘가성직제’를 통해 미사를 봉헌했다는 이야기 속에는 성체를 모시겠다는 열망이 간절해 보인다. 스스로 사제가 된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한 후에, 그들은 기필코 신부님을 모셔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선조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이르렀음이 틀림없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섭리로 여러 선한 목자들이 조선 땅을 밟았기 때문이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도 그중 한 분이다.
1863년 소망대로 조선의 목자로 입국
성체 성혈 대축일에 오메트르 신부를 기억한 건 그가 사제 서품식 날 썼다는 편지 때문이다. “1862년 6월 14일 오늘, 저는 사제로 수품되었으며, 빵과 포도주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왕자들과 임금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능력이 가난한 시골 꼬마에게 맡겨졌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호의에 대해 감사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저에게 맡겨질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시어 제가 그들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에게 맡겨질 가련한 영혼은 간절하게 성사를 그리던 조선의 백성이다. 1863년 6월 23일 자신의 소망대로 조선의 목자로서 조선에 입국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2년 남짓 짧은 삶 동안에도 깊은 신심과 어진 행동으로 많은 교우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수품 때의 서약을 실현이라도 하려는 듯이 오메트르 신부는 1866년 3월 맡겨진 영혼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였다. 소망대로 천국에 든 목자는 남겨진 양 떼를 위한 전구자가 된 것이다.
손골에 머물며 조선말과 풍습 익혀
용인에 있는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골성지는 성인이 체포되기 전까지 머물며 조선말과 풍습을 익히고 사목활동을 하던 곳이다. 집 가까이에 있는 성지여서 성체현양대회 때와 연미사 등을 위해 가끔 방문하던 곳이다. 어느 겨울날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성지는 더 포근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주변이 어둑어둑한데, 다행히 성당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성전 제대에는 감실의 성체등이 빛을 발하며 반겨주었으며, 사제복을 입은 선한 목자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의 순백의 순수한 모습이 느껴졌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3. 성 손선지 베드로
손선지 성인, 16살 때부터 순교 순간까지 회장 직분 충실히 수행
- 윤영선 작 ‘성 손선지 베드로’
출 생 1820년 충청남도 부여군
순 교 1866년(47세) 숲정이 / 참수
신 분 회장
어릴 때부터 깊은 신앙심과 품행 지녀
우리 전례력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이 중심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대림과 사순이 각각 성탄과 부활을 향해 있고, 시기마다 그에 어울리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끌어준다. 대림·성탄·사순·부활 시기를 제외한 나머지가 연중 시기다.
전례력은 이렇게 일 년을 주기로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재현하도록 초대한다. 연중 시기는 우리가 받은 부활의 은혜를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일상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희망으로 성숙시켜 나아가는 시간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 보이지만, 이 시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기회다.
연중 시기가 상징하는 메시지처럼 평범한 일상을 영적으로 성숙시켜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면, 선조들의 숨겨진 삶이야말로 절정의 부활이 펼쳐지고 증명된 현장이었음이 틀림없다. 신앙 선조 손선지 베드로 성인은 말할 나위 없이 영웅적인 순교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순교자의 영예는 감추어진 일상의 증언이고 선포가 아니었을까.
형장으로 향하며 자신의 옷 벗어준 성인
순교자 증언록은 손 베드로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성정이 유순하고 진실하였으며, 평생 열심히 수계하고, 남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시비하는 때가 없었다고 전한다. 어릴 때부터 깊은 신앙심과 품행을 지녔던 베드로는 샤스탕 신부에 의해 불과 16살 나이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47세에 순교할 때까지 일생을 평범하고도 성실한 회장이자 가장으로 살았다.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향하던 베드로가 “나는 내일 죽을 것이니 이 옷을 입으시오” 하고 가난한 이에게 입은 옷을 벗어주었다는 일화는 착하고 경건한 그 일상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에게 순교는 평범한 일상을 거룩하게 만든 그의 삶이 현세에서 내세로 옮겨졌다는 선언이라고 보면 어떨까.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후손 손용환 신부
강원도에서 최초로 지어진 유서 깊은 풍수원성당의 제100차 성체현양대회에 참석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 구름같이 몰려든 신자들의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성령의 기쁨이 느껴졌다. 그날의 성체현양대회를 준비한 풍수원본당 주임 손용환 요셉 신부는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후손이다.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교회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성인의 자취를 찾아서 전북 완주군에 있는 천호성지로 향하였다. 이곳은 성인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남아있던 가족들이 피신하여 지내던 곳이며, 현재 성인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성인의 묘소를 참배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니 천호산과 하늘 구름이 맞닿아 있다. 부활성당 위로 성인이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기쁨과 희망의 밝은 모습으로 신앙 후손들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셨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4.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이광헌 성인, 성령의 불꽃으로 온 가족 순교한 ‘조선의 아우구스티노’
- 윤영선 작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출 생 1787년 경기도 광주시
순 교 1839년(53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회장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심 꼭 닮은 순교자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충만히 받았다. 성령의 은혜는 성실한 신자들의 삶에서 탐스럽게 맺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성령의 9가지 열매로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선행·진실·온유·절제가 그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삶과 삶의 의미를 극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성인 가운데엔 인생의 극적인 변화로 귀감이 되는 인물이 많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가장 위대한 회심자 가운데 한 분일 것이다. 젊은 시절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끝없이 방황하던 그는 하느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성령께서는 아우구스티노로 하여금 방황에서 벗어나 생의 매듭마다 위대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심을 꼭 닮은 우리 순교자가 있다. 순교자 이광헌이다. 젊은 날의 광헌은 방탕한 나날을 보낸 적도 있었다. 서른 살쯤에 부인과 함께 입교하여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역사가 순교자의 생애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방탕한 생활 접고 성령의 열매 풍성히 맺어
자신의 세례명처럼 이광헌은 조선의 아우구스티노라도 된 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나갔다. 과거 무절제한 생활을 완전히 바꿔 절제된 생활을 하였으며, 박해 중 이곳저곳 피신해 다니는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명랑하고 불평 없이 살았다.(기쁨·평화·인내) 아울러 냉담자들을 권면하고(친절) 병약자를 위로하며(선행), 외교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사랑·온유) 공소회장이 된 그는 신자들이 마련해 준 집을 공소로 사용하며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맞아들이는 한편,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였다.(진실)
그는 성가정의 성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가장의 모범을 따라 가족 모두 순교하는 순간까지 변함없는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했다. 감옥 안에서 극심한 형벌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가족들 모두 영광의 길을 걸어갔다. 부인 권희 바르바라는 고문당하는 어린 자식의 처참한 모습에도 모정을 초월하는 순교를 택했다. 부모가 배교했다는 속임수에도 굴하지 않고 17세의 동정으로 순교한 딸 아가타, 동정으로 순교한 남동생 이광렬 요한이 바로 그들이다. 이광헌에게 내린 뜨거운 성령의 불꽃이 온 가족에게서 풍성한 열매로 맺어진 것이다.
동생과 부인 · 딸도 순교의 월계관 쓰고 시성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은 언제 보아도 그 역사성과 아름다운 건축미, 신앙의 보존 터로서 도심 속 특별한 장소로 느껴진다. 마당에서 보면 성 요셉과 아기 예수님 성상 뒤로 아름다운 자태의 약현성당이 보인다. 성당을 둘러싼 무한한 공간에는 성 이광렬 요한, 성녀 권희 바르바라, 성녀 이 아가타, 그리고 이들의 형님·남편·아버지인 크나큰 따뜻한 품을 지닌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서 계신 듯하다.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인은 오늘도 약현성당을 배경으로 복음을 전교한 회장으로서 「주교요지」를 들고 뜨거운 믿음으로 성령의 불을 밝히고 있다. “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시여, 저희의 가정을 지켜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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