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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34) 첫 번째 짐승의 입(묵시 13,5-10)
이 땅에서 하느님 발견하는 법
짐승의 입은 모독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큰소리를 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입은 구약의 다니엘서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킬 때 사용한 작은 뿔이 지닌 ‘큰 입’과 같다.(다니 7,8.20 참조) 다니엘서의 ‘큰 입’은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나아가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다니 7,25; 1마카 1,24; 다니 7,25; 11,36 참조) 요한 묵시록의 ‘큰 입’은 다니엘서의 ‘큰 입’과 같다.(묵시 13,5 참조)
요한 묵시록의 첫 번째 짐승의 입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주어진 권한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앞서 우리는 ‘마흔두 달’이란 시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주어졌다’라는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학자들은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짐승은 하느님을 거스르되, 자신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나 권능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 아래 놓인 것이고, 그러므로 첫 번째 짐승의 권한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 요한 묵시록은 짐승이 내뱉는 모독의 언사에 힘을 빼고 있다. 말은 있으되, 힘이 없는 말. 말의 크기는 거창하되, 그 실속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 첫 번째 짐승의 ‘큰 입’이다.
짐승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모독한다. ‘거처’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천막’으로도 번역되는 ‘스케네’(σκηνή)이다. 요한 묵시록 7장 15절은 어좌에 계신 분이 십사만 사천의 ‘천막’이 되어주신다고 서술한다.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거처는 천상이 아니라 이 땅, 이 삶의 자리다.
요한 묵시록은 이른바 ‘육화 사상’을 전제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육화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 천상은 지상 안에 온전히 구현된다. 짐승이 하느님의 거처를 모독하는 건 하느님을, 동시에 그분의 백성과 이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다.(묵시 13,7 참조) 다니엘서 7장 21절을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고 요한 묵시록 12장 17절의 용을 그대로 모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처절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것이 짐승의 승리가 가리키는 바다. 많이들 경험하지 않는가, 신앙인은 참고 희생하고 그러므로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사실 예수님도 그러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세상에선 실패했다. 세상의 힘에 짓눌렸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성도들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논리 앞에 신앙은 실패와 패배의 어리석음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1코린 1,21 참조) 땅의 주민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묵시 13,8 참조) 세상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권력자에게 경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탓할 수 없다. 땅의 주민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한다. 그들 ‘모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묵시 13,8 참조) 생명의 책과 관련해서 결과론적 해석이 난무한다. ‘착한 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지침의 실천 여부가 생명의 책에 기록될 가능성을 가늠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조건이 된다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나 관습이 달라 어느 시대는 옳지만 다른 시대에는 허용하지 않는 상대적 규범들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명의 책이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선택에 따라 그 허용 범위가 달라지는 책으로 인식하는 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책을 인간 인식이나 행위의 수준에서 다루는 가벼운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계가 지워지고 익숙한 경험치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어린양의 생명의 책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닐까.
하여,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것이다. “세상 창조 이래”라는 표현.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일 때, 생명의 책은 세상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증하는 상징이 된다. 요한 묵시록은 3장 14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 창조의 근원이라 밝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따른 결과론적 심판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명의 책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고 그 갈망은 근원적이고 운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함으로 생명의 책과 끊어내려야 낼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 존재의 근본을 잊(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리저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떠넘겨버리는 일, 그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 사실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불렸다.(묵시 5,6 참조)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몇몇 행동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보다 더 강한 권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것, 그것은 무지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기 이전에, 제 인식의 수준과 넓이와 깊이가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저 자신이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를 아는, 자신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겠다. 그 공부의 끝에 하느님은 비로소 발견된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86) 제비뽑기로 예수님의 사도가 된 마티아
어린 시절 초등학교 하굣길에는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이들이 돈 10원을 내면 아저씨는 밑의 동그란 판을 돌리고 돈을 낸 아이는 위에 새의 깃털이 달린 작은 화살촉 같은 것을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어 판 위로 내리꽂았다. “꽝!” 주변의 아이들도 숨을 죽인 채 결과를 바라보다 자기 일처럼 탄식했다.
지금 생각해도 거의가 ‘꽝’이었고 본전 10원을 맞춘 아이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돌림판을 보면 100원, 50원, 30원, 10원, 꽝 자리가 분명하게 비슷한 비율로 나뉘어져 있는데 비싼 가격에는 왜 잘 안 맞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제비뽑기나 보물찾기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살면서 제비뽑기하는 경우가 많다. 제비뽑기는 운에 맡기는 놀이이자 승부를 쉽게 내고 싶을 때 쓰는 놀이다. 제비는 종이에 글을 적은 뒤 섞어서 순서를 정해 뽑는다. 중요 스포츠 경기인 월드컵에서도 대진표를 짤 때 제비뽑기한다. 이때 뽑기에 따라 축구 강국이 즐비해 예선 통과가 어려운 죽음의 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군대를 제비뽑기로 가는 나라도 있다.
성경에서도 제비뽑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하느님의 뜻’이라는 방식으로 구약과 신약에 자주 언급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라고 명령하였다.(민수 34,13 참조) 사울은 제비뽑기로 왕이 됐다.(1사무 10,17-24 참조)
제비뽑기로 열두 사도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마티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됐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게 하여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사도 1,15-26 참조)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마티아는 사도단의 일원이 된 후 신약성경에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과 이방인 지역을 거쳐 에티오피아의 내륙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또 다른 전승에는 북쪽으로 흑해 연안 오늘날의 조지아 일대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도 한다.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헬레나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발굴하여 로마의 성모대성당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에 의해 유해 일부가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트리어로 옮겨졌다.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기술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마티아는 예수님이 아닌 사도단에 의해 뽑힌 유일한 사도이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오늘 제1독서에는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집회 3,28)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재앙과 재난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이 단어에는 ‘악’(惡)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레 11,17의 “재앙”과 “사악함” 그리고 18,8의 “죄악”과 “재앙”이 모두 [라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라아]는 악행과 악행의 결과로 닥치는 벌까지 함축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본의이든 아니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책감 때문에 괴로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죄 자체가 벌이 되고, 더 나아가 악행이 우리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재앙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는 악을 바로잡고 막아주는 약이 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데요, 요나가 파견되었던 니네베는 잔인성으로 고대근동에서 악명 높던 옛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요나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한 니네베가 망해야 한다고 믿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못하도록 예언직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니네베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요나가 전달한 한 줄의 신탁,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는 선언을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5절) 즉시 회개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니네베인들에게 재앙을 피하기 위한 참회 단식이나 기도 등의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자연스레 망하도록 유도하려 한 듯합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니네베인들이 요나의 신탁을 듣고 곧장 참회합니다. 요나의 경우, 예언직을 피해 달아났다가 하느님 명령에 다시 복종할 때까지 ‘사흘’이나 걸렸는데도 말입니다(2,1-3). 이런 즉각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이민족도 죄에서 돌아서면 재앙이 거둬질 거라는 예레 18,7-8의 약속이 요나서의 니네베에서 성경 최초로 실현됩니다. 주님께서 니네베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거두신 일은 에제키엘이 전한 신탁과도 상통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에제 18,21.23)
하느님께서 징벌을 경고하시는 가장 큰 목적은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왜 약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거만한 자가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 징벌로도 그를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곧 회개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약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각종 음모와 악행을 저지르고도 심판받지 않으려 버티는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죄가 쌓이고 쌓이면, 묻힌 듯 보이는 과거의 잘못까지도 결국엔 하느님 앞에서 죄다 셈해지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33) 첫 번째 짐승(묵시 13,1-4)
짐승이 하느님 되지 않으려면
짐승은 땅에 떨어진 용의 모방체(模倣體)다.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이 땅으로 떨어져 나타나는 게 짐승이다. 하여, 우리는 짐승에게서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의 역할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자기 권능과 왕좌와 큰 권한을 주었다.(묵시 13,2 참조) 용과 짐승은 그 호칭이 다를 뿐, 실은 하나의 형상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용은 땅에서는 짐승이다.
짐승은 열 개의 뿔과 일곱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짐승은 표범 같고, 발은 곰의 발 같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과 같다. 다니엘서 7장이 소개하는 네 마리 짐승의 모습이 요한묵시록 13장의 짐승 위에 어른거린다. 다니엘서 7장은 바다에서 올라온 네 마리 짐승을 소개하는데, 네 마리 짐승은 사자, 곰, 표범을 닮았고, 네 마리 짐승의 머리를 다 합하면 일곱이며, 뿔은 열 개가 된다.
네 마리 짐승은 주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에 적대적인 네 왕국, 그러니까.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으로 해석한다. 다니엘서 7장이든 요한묵시록 13장이든 짐승이 등장하는 공간이 바다여서 태초의 바다,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혼돈의 바다와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창세 1,2; 시편 74,13-14; 89,10-11 참조) 유다 전통은 바다의 괴물 레비아탄을 하느님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악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했다.(에녹 60,7-8; 4에즈 6,49-52; 2바룩 29,4 참조) 짐승은 아무래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요한 묵시록의 작성 시기를 참작해서 짐승을 로마 황제들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티투스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머리 중 하나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는 나았는데(묵시 13,3 참조) 이 머리를 네로 황제라고 여기기도 한다. 1세기 말엽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네로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네로는 68년 자살했으나 죽음을 피해 다시 살아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두려운 전설이 있었다.
짐승을 두고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이해하는 건, 마치 악의 가시적 형태가 로마였다는, 그리하여 로마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세력으로 치부하는 일은, 설사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생각한 바였다 하더라도,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의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로 여행 가고 싶어 하고, 로마의 찬란한 문화를 열광적으로 칭송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짐승으로 로마를 이해하는 해석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악의 형상들을 역사 속 특정 부류, 특정 민족, 특정 계급, 특정 인물에 투사하는 해석은 불행히도 그치지 않고 반복된다.
1세기 말 요한 묵시록의 시간은 로마에 의한 억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위협이 되었던 시간이었고, 그 위협을 짐승을 통해 ‘해석’했다. 이 ‘해석’은 ‘주석’(註釋)과 다르다. 짐승의 의미를 캐묻는 ‘주석’이 하느님과 대립하는 악의 세력으로 짐승을 규정했다면, 그 짐승에 대한 ‘해석’은 해석 주체, 그러니까 읽는 독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가리켜 악의 세력이라고, 짐승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해석 주체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것.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짐승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한 주석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로마의 위협이 곧 악의 세력, 짐승의 위협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악의 세력이라면(묵시 13,1 참조) 하느님을 향한 모독과 악의 성질이 오늘 우리에겐 도대체 무엇인지 묻는 해석학적 질문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은 저 옛날 로마 황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 신앙에 위협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그런 요소에 우리는 민감한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요한 묵시록은 마침 짐승의 상처를 언급했다.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다’(ὡς ἐσφαγμένην)는 묘사는 요한 묵시록 5장 어린양의 것과 닮아 있다. 어린양을 모방하는 이 묘사는 짐승과 어린양을 대립 구도로 놓으면서 짐승의 ‘적그리스도’ 성격을 더욱 부각시킨다.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이를 속량하여 하느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보여준다. 그런 어린양은 천상과 지상 모든 피조물의 경배 대상이 된다.
짐승 역시 그러하다고 요한묵시록 13장은 서술한다. 온 땅이 상처가 나은 짐승에 놀라워하고 그를 따르며 경배한다. 덧붙여 사람들은 짐승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싸울 수 있으랴?”(묵시 13,4) 비교 불가의 권능을 칭송하는 이 문장은 하느님을 향한 경배의 전형이었다.(탈출 15,11; 신명 3,24; 시편 86,8; 113,5; 이사 40,25; 44,7 참조) 요컨대 상처를 입어 다시 살아온 짐승은 하느님과 같은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죽음마저 비껴간 짐승이 하느님 자리를 꿰차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면서 하느님일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짐승을 대하는 사람들의 해석에 달려있었다.
성당을 다니고 신앙을 지닌다고 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경배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을 절대 경배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그 하느님이란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욕망이 뒤섞여 있을까. 하느님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일은 꽤나 쉬운 일이고, 불행히도 신앙인들 안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기도 하다. 악의 세력은 외부의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 그것이 짐승이 되는 것은 그것을 하느님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