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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44) 사심판, 천국, 연옥, 지옥
장례미사 때 우리는 감사송에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 노래합니다. 부활의 희망을 분명히 갖고 살아가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두려움보다 희망으로 가득한 매일이 되기 위해서라도 사심판과 그 결과인 천국와 연옥과 지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주로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각 사람은 죽자마자 사심판으로 각자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됩니다. 이때 각 사람의 영혼은 정화를 거치거나(연옥),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천국),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지옥).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1~1022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연옥의 과정을 마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들은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친교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이들을 구원하여 당신 나라로 불러 모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계속 기쁘게 수행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4, 1029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나 하늘의 기쁨에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선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항). 교회는 이러한 정화의 과정을 연옥이라 부릅니다. 우리말에서 연옥은 지옥과 동일하게 감옥을 뜻하는 ‘옥’자를 사용하고 정화하는 불로 설명되기에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서의 고통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 연옥과 그 어떤 가능성과 희망 없이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은 그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1항). 오히려 연옥은 영원한 구원의 관점에서 천국의 예비 단계로 보아야 하며 이런 점에서 연옥보다는 연국 또는 연당 같은 표현으로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거룩함을 얻기 위한 정화의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 과정이기에 분명히 참고 견딜 수 있는 희망 속 기다림의 시간일 것입니다. 다만 교회는 오래전부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좋은 관습을 갖고 있었고, 우리의 기도가 특히 연옥 영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특히 미사 성제를 비롯하여 자선과 대사, 보속을 권고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2항).
지옥은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3항). 믿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떨어지게 되는 영원한 벌의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4항).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며 ‘영원히’ 이어지는 상태이므로 그 어떤 변화의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5항).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성경이 전하는 지옥에 대한 가르침들은 악인들을 단죄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영원한 벌에 떨어지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절절한 호소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6항). 이러한 회개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께 반항하여 죽을죄(대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이들은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7항). 우리 모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죄를 늘 성찰하며 고해성사를 통하여 죽을죄를 용서받아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 은총 상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믿음의 촛불 밝히기 (4) 성장 편
지난 3주간 차동엽 신부님의 저서 『믿음 · 희망 · 사랑』 속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믿음 편의 마지막, 믿음의 성장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항구하고 튼튼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장의 첫걸음, 기억하라
믿음이 성장하는 첫 번째 방법은, “기억하라!”입니다. 이는 신명기에 나오는 처방입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 은혜와 기적을 잊지 말라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때와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면 저절로 믿음이 자라납니다. “아, 그때 그러셨지. 그렇게 살려 주셨지.”라고 지난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면 믿음이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예수님은 왜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거듭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구원 업적이 우리 기억에서 되살아나 다시 새로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것을 주님께서는 통찰하셨던 것입니다.
성장의 두 번째 걸음, 들어라
두 번째 방법은, “들어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다 보면 ‘나’를 위해 건네시는 말씀인 ‘레마’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하느님은 인류 전체를 통째로 상대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시어 ‘나’를 위해서만 따로 말씀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가 아니라 “데레사, 사랑한다.”, “마리아, 사랑한다.”, “요한,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일대일 사랑이지요. 그러니 성경을 읽다가 감동이 오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붙들고 힘내서 살아 나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만 건네시는 말씀이며, 이 또한 믿음입니다.
성장의 세 번째 걸음, ‘믿는 이’가 되라
세 번째 방법은, “믿는 이가 되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토마스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의 원문은 “안 믿는 이(apistos)가 되지 말고 믿는 이(pistos)가 되어라.”입니다. 믿음은 하나하나의 ‘case by case’로 믿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안 믿는 이냐, 믿는 이냐”를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믿는 이’가 될 것을 선택하면, 모든 것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지는 것이지요. ‘믿는 이’의 눈으로 보면 다 축복이자 은총, 행복인 반면, ‘안 믿는 이’의 눈으로 보면 다 불행이자 실패, 좌절, 불평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마주하고서 ‘믿는 이’가 되어 외친 토마스의 고백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처럼, 희망의 희년을 보내는 우리도 믿는 이의 대열에 서기 위한 걸음을 한 발 내디뎌 보면 어떨까요?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희년의 표징들 (4) 신앙고백, 대사
‘신경’으로도 알려진 신앙고백은 세례 받은 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신앙고백은 신앙의 핵심 내용을 표현합니다. 이는 신자가 세례 받던 날 고백한 신앙을 재확인하고 남은 생애 동안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와 공유할 주요 진리들을 간결하게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신앙고백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교회가 특별히 인정한 두 가지 신앙고백은,
① 로마 교회의 세례 신경인 ‘사도신경’과
②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325년 현재 튀르키예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신경을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수정한 것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바오로 성인의 이 구절은 신앙의 신비를 선포하는 데는 말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깊은 회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에서도 신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신경을 외우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품 안에서 우리가 믿는 온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197항).
희년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은 대사(大赦, Indulgence)입니다. 희년 중에 주어지는 대사는 인간 정의의 한계를 뛰어넘고 변화시키는 하느님 자비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희년의 대사는 죄의 무게에서 우리 마음을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대사를 통해 죄 갚음의 은총이 무상으로 풍성하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내사원은 2024년 5월 13일 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통상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영적 조건으로 고해성사를 봅니다.
② 성사적 조건으로 영성체를 합니다.
③ 기도 조건으로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기도합니다.
참고로, 교황님의 기도 지향은 「매일미사」 책 앞쪽에 나와 있습니다. 의정부교구는 교황청 내사원의 교령을 교구의 구체적 상황에 맞게 정리하여 ‘2025년 정기 희년 의정부교구 전대사 수여 지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복된 희년에 전대사를 통해 하느님께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 「교회헌장」의 새 의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1회기에 제출된 「교회헌장」의 초안이 거부되고, 필립스(G. Philips)의 의안을 중심으로 작성된 새로운 초안이 제2회기에 제출되었습니다. 이 안은
➀ 교회의 신비,
➁ 교계 제도(특히 주교직),
➂ 하느님 백성(특히 평신도),
➃ 교회의 성화 소명, 이렇게 네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수정된 초안에 대해서 무려 스물두 번의 총회를 열면서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성경의 인용과 사도 교부들의 가르침이 풍부하게 담긴 것에 대해서 만족하였고, 주교직의 성사성과 평신도의 역할 등이 골고루 다루어진 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새로운 초안의 내용을 만장일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어서 각 장에 대한 세부적인 토론이 이어졌는데, 먼저 제1장 교회의 신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교부들은 교회의 성사적 차원과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표상에 대해 더욱 풍부한 전개를 요청하였습니다. 반면에 제2장 교계 제도(특히 주교직)에 대해서는 긴 시간 동안 심도있는 신학적 논의가 이어졌는데, 사도단의 계승으로서의 주교단, 주교 직무의 성사성, 주교직의 행사 등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제3장 하느님 백성(특히 평신도)에 대한 토론에서는 먼저 ‘보편 사제직’의 의미를 명확히 규명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에넨스 추기경의 제안으로 제3장의 내용 가운데 ‘하느님 백성’과 ‘평신도’를 분리해서 다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고 수도자를 모두 포함하는 ‘신자 전체’의 개념이기 때문에 평신도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별도의 장을 만들어 ‘교계 제도’ 앞에 두도록 하였습니다. 제4장 교회의 성화 소명에 대한 토론에서는 ‘모든 신자의 성화 소명’과 ‘수도자’에 대한 것을 구분할지가 주요 관건이었습니다. 결국 제4장 역시 모든 신자의 성화 소명은 새로 만든 ‘하느님 백성’에 대한 장에 포함하고 수도자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초안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마리아’에 대한 의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쟁점은 마리아론을 「교회헌장」에 넣을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문헌으로 만들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교회헌장」에 포함하자는 의견은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신심을 우려해 교회에 대한 표상 안에서 마리아의 표상을 이해하려는 입장이고, 별도의 문헌을 만들자는 의견은 마리아의 특권을 옹호하고 강화하려는 입장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의안은 교부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결국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마리아 공경이 매우 중요한 교회의 가르침임을 확인하면서도, 별도의 문헌이 아닌 「교회 헌장」의 의안에 포함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선택한 중도적 포용의 입장은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을 일치로 이끌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의 언어] 카다쉬, 거룩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율법에 따라 예수를 성전에 봉헌합니다. 여기서 ‘봉헌하여라.’는 표현에 사용된 단어는 히브리어 דקשׁ입니다(루카 2,23 역시 ‘주님을 위한 거룩한 것으로 불려져야 한다’로 직역). 이 용어는 ‘자르다, 분리하다’를 의미하며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다는 개념을 가집니다. 곧,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를 잘라내고 분리하여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도자들은 세상에서 나를 분리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수도자들만이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삶, 곧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12) 박해가 시작되다
그리스도 신앙이 급속히 퍼지자 교회 박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쳐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성사, 그리고 은사를 공유했고, 재산을 공동 소유했으며 사랑을 함께 실천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급속히 전파되자 교회를 경계하고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유다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이들이고, 성전 경비대장은 말 그대로 성전 경비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로 대사제 다음 가는 사제가 그 직책을 맡았습니다.
사두가이파는 헬레니즘에 개방적인 귀족층의 유다인들로 사제 가문과 부유한 상인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 오경에 분명히 포함되지 않은 교의들을 부정하고,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죽은 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 무리 곧 성전과 관련된 유다교 사제 집단이 예루살렘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겼기 때문입니다.(사도 4,2 참조)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이튿날 유다교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자리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습니다.(사도 4,5-6 참조) 한나스는 서기 6~15년,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로 18년부터 36년까지 대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한나스는 로마 당국에 의해 대사제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카야파는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에 직접 관여한 인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산헤드린에서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산헤드린 의원들은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두 사도를 풀어줍니다.(사도 4,14-18 참조)
하지만 얼마 안 가 모든 사도가 체포됩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대사제 카야파가 주동이 되어 사두가이파를 움직여 사도들을 체포해 공영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산헤드린으로 끌려간 사도들은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온 백성에게 존경받던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변호로 매질만 당한 채 풀려났습니다. 물론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사도 5장 참조)
그런데 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변호했을까요?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그는 바리사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마케도니아인들에게 항거하던 하시드인들을 계승한 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구전 전승을 열심히 준수하던 율법학자들로 중산층에 속했으며 백성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에게 적대자는 율법과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한 예수님과 그들의 제자들이 아니라 로마인과 율법과 전통을 어기는 모든 이였습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바리사이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몇이 나서서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민족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사도들에게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열리게 되죠.(15,5-6 참조)
마침내 공권력이 교회 박해에 가세했습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요한 사도의 형 야고보 사도를 칼로 쳐죽이고 베드로 사도를 잡아들입니다.(사도 12,1-11)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루카 23,6-12 참조)의 조카로 서기 41년에 로마 총독이 통치하던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임금이 됩니다. 그는 단순히 유다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고 야고보 사도를 참수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형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와 구별해 ‘대(大) 야고보’라고도 합니다. 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주인공인 바로 그 야고보 사도입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44년 4월에 죽었기에 학자들은 야고보 사도가 44년 초 또는 42~43년에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야고보 사도를 처형한 것에 대해 유다인들이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자 베드로 사도를 잡아들여 무교절, 곧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처형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명씩 4개 조를 짜서 베드로가 갇힌 감옥을 밤낮없이 지키게 했죠.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우들의 간구가 하느님께 전해졌는지 처형 전날 밤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옵니다. 탈옥한 베드로 사도는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43) 죽음과 육신의 부활
지난해 12월 말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에 진입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구의 각 본당에서는 초고령화 현상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신자 공동체의 초고령화와 함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점점 더 많은 교우분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부활 신앙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아실 것이나 막상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 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면 꽤 많은 분들이 그저 막연하게 부활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바라봅니다. 영혼이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현대 의학과 과학이 인간 육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며 앞으로 더 많은 탐구가 필요한 영역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육신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영혼과 육신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른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육신은 지상에 남아 썩게 되고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육신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58항). 죽음은 본래 죄의 결과이며 그래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물리쳐야 할 원수이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의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합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 때에 이미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던 이전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이미 경험했으며(교리서는 이를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는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을 성취한 것이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10항).
부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부활은 우리의 육신이 지상에서의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며 영광스럽게 된 육신이 영혼과 다시 결합되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노화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썩어 없어질 유한한 존재입니다. 부활은 이런 육신이 일시적으로 다시 생명을 얻는 차원을 넘어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얻는 사건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97항). 다만 그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00항). 육신은 썩어 없어져 소멸되고 영혼만이 하느님 나라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우리의 부활 신앙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영광스럽게 된 육신이 다시 영혼과 결합되는 부활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01항). 부활은 우리보다 앞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악인들 또한 부활하여 지옥에서의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98항).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행복의 그날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영광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의 육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육신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03~1004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