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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영상을 하나 봤습니다. 한 병사가 다친 동료를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려는데 그만 지뢰를 밟아서 터져 함께 죽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모습이 마치 컴퓨터 모니터에서 게임처럼 대중에게 보이면서 이런 영상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염려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속에서 여러 동영상을 접하면서 끔찍한 장면, 잔인한 장면, 윤리적으로 타락한 더러운 장면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입니다. 이런 영상을 오히려 보고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을 상황에 그 자극을 느끼지 못하면 무감각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육체 감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속에서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큰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예민한 감각을 키우려고 하지만 사상과 윤리적인 것에 대해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그것에 매여 더 무디어진, 오히려 그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무감각을 지적하십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일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고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들을 답답하게 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앞에 참된 반응을 보이는 영이 살아있는 하나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 첫째는 무반응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6,17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일컬어 무감각한 세대, 감각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사를 했는데 장의사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갔더니 매일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장례식을 흉내 내더랍니다. 그래서 시장 근처에 이사갔더니 매일 장사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주위의 상황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것입니다. 옆에서 피리를 불면 그 피리소리에 반응하고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옆에서 비극적인 일이 있어 슬프게 울면 그냥 눈물이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 반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옆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다”라며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무감각하면 자극을 받아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혹 예수님께서 “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느냐?”라고 물을 때 “어른들이 점잖지 않게”라고 답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적으로 나이든 어른들은 아이와 다르게 상황을 따지고, 분위기를 따지고, 내면을 따지면서 상황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인과관계, 사람들간의 관계, 내면적 의미 등을 따지며 눈치를 보고 반응해야 할 때 반응하려고 합니다. 어른들은 “내가 지금 이 음악에 춤을 춰도 되나? 지금 이 슬픔에 울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라고 상황을 따지고 득실을 따져서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이 타임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피리를 부는 것과 슬피 우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신 것,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치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하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렸지만 유대 땅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눠주시는 떡, 그들이 경험하는 이적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지만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땅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분이라고 생각하며 따랐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할 것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와 육신의 건강, 여러 가지 세상적 복을 누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자기 영혼이 회개하며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적극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7절을 다시 읽으시겠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더 지켜보자’라고 생각하는 구경꾼의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춤을 춰야 할 때 기쁘게 웃어야 할 때 내가 슬프게 울어야 할 때를 깨닫고 그 때에 맞게 제대로 살아가야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무엇인가를 할 때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춤을 추는 것은 기쁜 일에 반응하는 것이고, 곡을 하는 것은 슬픈 일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면 말씀을 통해, 찬양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악기연주와 찬양곡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그 찬양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 연주와 노래에 항상 반응하며 즐거워하며 슬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반응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과 찬양에 그대로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에 대해 제대로 된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 둘째는 부정적이며 반항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8,19절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왜곡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조롱과 비방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을 때 귀신들렸다’고 비방했떤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며 잔치를 많이 벌이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전한 복음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는 무감각한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거수일투족 살펴보며 책잡을 일을 찾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복된 삶에 대해 왜곡하며 비난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남이 잘 하고 잘 되면 축하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인간이기에 남들의 꼬투리를 잡아 비방하고 조롱하는 것이 참 씁쓸합니다. 인간이기에 남의 쓴 소리도 귀 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바뀌고 성숙해지면 정말 좋겠지만 인간인지라 도리어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느 인간이든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은 참 같은 인간으로써 씁쓸합니다. 인간은 터무니없이 비교하고 비방하고 비난하기를 즐깁니다. 잘 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악플이 수 없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요즘은 포털사이트에 스포츠기사, 연예인들에 대한 기사에는 댓글을 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잘못했거나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하고 냉정한 평가를 하고 비판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기준이 되어 나와 다르고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매도하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됩니다.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힘든 것이 자기 직업이나 여러 사회 활동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각종 댓글 때문에 힘들다고 합니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한 것이지만 비난과 조롱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이런 비난과 조롱으로 살아가는 인간, 비난과 비판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예수님 당대,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일들, 우리가 세상적 가치관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존재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까지 살려서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엄청나게 경험합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창조, 삼위일체 하나님, 동정녀 탄생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등등 수 많은 성경의 말씀을 배우지만 이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 주변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왜곡하며 비방하면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까 불신하고 거부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들이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세계는 닫힌 마음으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열린 마음이 되어야 받을 수 있는 세계입니다.
로마서 10장 12,13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크기와 넓이를 이해하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비판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모든 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믿기어지게 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믿게 된 여러분, 그 믿음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 셋째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0,21절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오늘 살펴보는 성경본문 마태복음 11장 20절에서 2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라신, 벳새다, 그리고 23절에는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쪽 4km에 위치한 가까운 동네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빌립의 고향, 베드로와 안드레의 출생지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 사역 중심지였습니다. 반면 21절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며 업신여기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업신여기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삶의 방향을 유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단순히 “잘못했다고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인생 모습을 완전히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마음을 돌이키고 삶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라신,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렇게 가르침을 많이 받고도 가치관은 바뀌지 않고 생각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중직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세상적 생각을 하시나?’라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기보다 불평과 불만이 먼저 나오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저 분은 신앙인은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도 고라신, 벳세다 사람들이 마음이 변화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보다 현실적으로 더 나은 것을 먹고 입는 것이 더 중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참된 회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유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 다스리시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말씀을 읽으며 말씀을 배우는 우리들이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들을 향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도 큰 기사와 표적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아올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표적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2장 5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11장에서 예수님께서 큰 권능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 임재를 보여주신 동네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교만이 하늘까지 높아진 것을 책망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판받고 마지막 날에 음부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가 더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가장 많은 권능을 베푸신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회개하지 않았고 교만이 하늘까지 높아졌습니다. 그런 백성은 심판 날에 어떻게 될까요?
마태복음 11장 23,24절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부촌이었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대도시였습니다. 세관과 큰 회당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으로 누운 종을 치유하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또한 회당장의 딸을 생명을 소생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혈루증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셨습니다. 그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땅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며 자신들이 더 대접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곳의 사람들은 명예, 부, 권력, 지식에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버나움이 이제 음부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네가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말속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하는 자는 주님이 도리어 낮추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앞에서 자기를 지극히 낮추는 자를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높여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 주 예수님은 섬김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 정말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 PR을 제대로 해서 자신의 능력을 잘 포장해야 살아남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잘 개발하고 자신의 달란트와 은사를 잘 활용해서 자신이 잘 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얻고 어디를 가든지 대접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 능력으로 자기 만족을 누리고 자기 능력으로 자신이 뭔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을 얻는 것은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 네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주님은 높아지게 되고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이룬 인생, 참다운 회개로 생명을 얻은 인생은 항상 하나님만 높이며 우리 주 예수님에게만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만 높임받는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이번 8월 15일 행사를 진행하다보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적 반응이 우리에게도 보일 것입니다. 무반응을 하는 사람들, 부정적이며 거부하는 사람들, 회개하며 변화되는 사람들, 이런 반응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반응에 대해 살펴보는 것보다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살펴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각을 찾고 영적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본 영적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은 생명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말씀을 접할 때 기쁨의 춤을 추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게 됩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말씀으로 감동하고 말씀으로 가슴을 치며 말씀으로 춤을 추며 말씀으로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삶에서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말씀을 접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씀을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고 말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오고 말씀을 읽으면서 찐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나의 삶에 항상 적용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항상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조,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유행을 따라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역행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대세나 유행이나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멸망당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무관심하고 교만으로 마음이 굳어 있습니다. 세상 가치관에 매인 사람들의 관심사는 물질적이고 향락적인 것 밖에 없습니다. 돈과 외모, 외형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자신을 치장하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은 세상의 비판에 신경 쓰지 말고 사람들의 반응 여하에 흔들리지 말며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편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날 버려도 주님 의지하며 살아갈 때 생명의 복음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서도 바른 인생을 살고 죽어서도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죽고 영적 감각이 살아서 영원한 세상,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참 생명을 소유한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