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언제 오려나.
손녀가 아침밥을 준비하는 내 다리를 잡고 빙빙 돌았다. 9시까지 자던 아이가 7시에 일어나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 더 반갑다’고 하더니 딱 맞는 말이었다. 아이를 일주일간 데리고 있다가 오늘 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묵직했던 허리 통증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 집에 온 아이는 밤새 열이 나서 애를 태우다가 아침에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경기도 어느 시청에 다니는 며느리는 아이를 직장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데, 부서 이동 후 업무 파악 중이어서 휴가 쓰기가 어렵다고 울상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두고 가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는 반찬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감기로 입맛도 없을 텐데 고춧가루가 묻은 김치도 사각사각 씹어 맛있게 먹는 아이가 기특했다.
“할머니, 내가 우리 어린이집에서 석식 1등이야”
‘석식이 무슨 말인지 아니?’ 하고 묻는 나에게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이집에서 먹는 저녁밥이라고 했다. 어린이집 주방 게시판에는 저와 친구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데 저녁밥을 먹을 때마다 영양사 선생님이 빨간 토마토 그림을 붙여 준다며 웃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막 깬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다 보니 아침밥도 못 먹인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손녀가 매 끼니를 어린이집에서 먹고 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코끝이 찡해왔다.
점심 먹고 바로 출발했는데도 어린이집에 도착하고 보니 4시가 지나 있었다. 밤 운전을 어려워하는 남편이 걱정되어 바로 출발하려는데, 아이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며느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제 엄마 손을 잡고 한 명, 두 명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쏜살같이 현관 앞으로 달려 나갔다가 풀이 죽어 되돌아오곤 했다. 방에 들어와서도 앉지 못하고 방안을 빙빙 돌며 제 엄마를 기다렸다. 이렇게 날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문소리가 날 때마다 기대하고 뛰어나갔을 테지. 기다리다 지친 아이가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내 마음도 아이와 함께 현관 앞으로 달려 나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며느리는 우리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놓고 이미 돌아간 줄 알고 있었다. 빨리 달려오고 싶은 며느리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석식 1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꾹꾹 누르고 있던 서운한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다.
38년 전의 일이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시댁에서 함께 살다가 아들이 7살, 딸이 5살이 되었을 때 읍내 단칸방으로 분가했다. 그때는 아이들을 마땅히 맡길만한 곳이 없어서 서너 달을 시댁에 두고 나왔다.
나는 주말까지 참지 못하고 수요일쯤이면 시댁으로 퇴근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잠들면 막차를 타고 읍내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빨갛게 토끼 눈을 하고 졸린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잠든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엄마를 찾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버스 안에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며느리 마음도 그때 내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서서히 물러났다.
집에 도착해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있다가 며느리의 전화를 받았다. 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밝게 웃으며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역시 자식은 엄마 품이 최고였다. 아이가 더 통통해졌다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며느리의 눈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내년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1년 동안 휴직할 거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번 권하던 대답을 들은 것이다. 명치끝에 걸려있던 밥알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숨쉬기도 한결 편해졌다. 남편도 그제야 배고픔을 느끼는지 수저 든 손이 빨라지고 있었다.(2023. 문향 제3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