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0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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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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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Oqhgu4O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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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세상 괴로운 일 중에 하나가 경직되고 형식적인 회의에 참석해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이나 자랑으로 가득한, 주제와 동떨어진 긴 강론을 듣는 것도 만만치 않게 괴롭습니다. 급기야 마음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부글댑니다. 용서가 안 될 정도입니다.
지난 세기 대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님(1915~1968)께서도 종종 그런 고통 앞에 직면하셨던가 봅니다. 그러나 워낙 내공이 깊은 분이어서 그런지 반응은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길고 지루한 회의에 참석했을 때나, 별 내용도 없이 끝도 없이 늘어지는 동료 수도자의 길고 긴 강론 앞에서 취한 태도가 참으로 위트 넘칩니다.
다른 동료 수도자들은 분노로 씩씩대거나 투덜거릴 때, 그는 즉시 교회 전통 기도인 ‘예수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을 대여섯 번 반복한 다음, 콧구멍으로, 그리고 폐로 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에 집중하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들숨),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날숨)’
오늘 복음의 주제가 용서입니다. 백 번 천 번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의 얼굴을 봐야 하고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어떤 때는 견딜만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듭니다.
용서가 안 되 죽을 정도로 힘들 때, 토머스 머튼 신부님이 즐겨 애용하셨던 예수기도를 한번 바쳐보시면 좋겠습니다. 들숨을 들이 마실 때는 대기 중에 현존해계시는 자비하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
날숨을 내쉴 때는 내 안에 일곱 마리 마귀처럼 도사리고 앉아있는 그를 힘껏 몰아내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반복해서 예수기도를 바친다면, 그 어려운 용서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이웃들을 용서한 적은 총 몇 번인가?’ 천천히 돌아보며 헤아려 봤더니 놀랍게도 열 번도 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이 말씀은 결국 용서하고 말고가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눈만 뜨면 용서하라, 밥 먹듯이 용서하라, 숨 쉬듯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 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활짝 열립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란 감옥에서 나와 이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손에 미래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는 일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용감하게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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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avg9etaW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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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수천 번을 해도 죄가 용서되지 않는 경우>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임금이 일만 탈렌트, 곧 수조 원의 돈을 탕감해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곧 수백만 원의 돈 때문에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은 돈을 탕감해 준 것을 다시 물립니다.
그러니까 한 번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 용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나의 자세에 따라 용서가 번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일까요? 내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을 때입니다. 용서는 마치 내가 통로가 되어 받은 용서가 타인에게 흘러갈 때 나의 것이 되는 것이지 받기만 해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받는 모든 것을 똑같이 그것을 흘려보낼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이방원의 난’이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른 사건을 말합니다. 이방원에게 이런 힘을 실어주었던 것은 부인 민씨의 가문이었습니다. 민씨 가문은 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민씨에게는 얼굴이 어여쁜 김씨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민씨는 장차 임금이 될 이방원이 여종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얼굴을 싸매고 다니도록 하였습니다. 민씨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권력이 또 양분되어 형제간에 칼부림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집에 살면서 여종의 그러한 행색을 보지 못할 리 없는 이방원은 그 여인에게 푹 빠지게 됩니다.
민씨는 여종을 죽이는 대신 내쫓아 사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이방원은 아내에 대한 분노로 가득찹니다. 어쨌든 이방원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태종 임금이 됩니다. 그리고 민씨는 원경왕후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태종은 한 사람을 부르는데 아기를 안고 나타난 김씨입니다. 태종은 이미 김씨를 찾아 아기를 출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효빈 김씨로 후궁으로 삼습니다. 분노하는 민씨 세력에 태종은 후궁들을 더 들여 권력을 분산하여 민씨 세력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이 아내 원경왕후의 눈을 피해 취했던 미모의 여종’, 유튜브, ‘야사TV’]
민씨는 권력을 쥐기 위해 태종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그 시샘 때문에 오히려 태종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만약 태종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물론 후궁을 두기는 하였을지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민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접지 않았을 것입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생명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흘려보내는 것만 내 것이 됩니다.
만약 돈을 엄청나게 벌어놓고 하나도 쓰지 않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돈을 소유했던 것일까요? 돈은 쓰는 것만 나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휴짓조각에 불과합니다.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모기가 태어나서 피를 좋아하는 욕구를 받았는데 이것을 쓰지 않았다면 그 욕구는 자신의 것일까요? 굶어 죽습니다. 무엇이든 쓰는 것이 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흘려보내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또다른 하나는 모아들이기만 하는 사해라는 호수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바다이고 사해는 죽은 바다입니다. 이 큰 상징적인 지형만으로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려보내지 않는 용서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수천 번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고해성사로는 용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처럼 내가 받은 용서를 흘려보내 주지 않으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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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19,1 :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여섯이라는 수는 창조활동을 암시하므로 수고와 노동으로 가득함을 의미하지만, 일곱에는 용서를 가리키는 휴식의 의미가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일흔 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일흔 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인가? 루카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 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종은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이익도 주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 말씀은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 말은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묘사하는 비유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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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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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송영진_모세_신부님
<연중 제19주간 목요일>(2021. 8. 12. 목)(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8월 12일의 복음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서는 이미 너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형제를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희 모두를’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여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 형제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그 형제를 내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너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다.” 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거나, 이 말씀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라고 선포하셨을 뿐이고, 용서를 선포하신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 3,22-25) 그래서 ‘믿음’과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8월 12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비유’의 앞부분은 ‘하느님의 용서의 무한함’을 나타냅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4-27) 여기서 핵심 단어는 ‘가엾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에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만 탈렌트의 빚’과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명령’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큰 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라는 종의 말은,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갚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말입니다. 주인이 그 종을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아무 대가 없이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완전히 무조건은 아닙니다.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들끼리 ‘서로’ 용서하라는 조건입니다.)
<비유의 앞에 베드로 사도의 질문이 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이 질문을, ‘하느님의 용서’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실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고해성사를 보고,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용서를 받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사는 동안 몇 번이나 고해성사를 볼까? 어떻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무한정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무한정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지도 않고 계속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면? 따라서 앞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합니다. “주님, 제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나서 ‘진심으로 회개하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용서하는 입장에서는 회개하라고 용서하는 것이지만,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는 회개부터 하고 나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 종과 그의 동료 사이에 벌어진 일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배반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8-30) 여기서 ‘백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자비’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자비를 뜻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개인 사이에 생긴 갈등과 원한을 하느님께 지은 죄보다 더 큰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우리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자비와 은총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사이에 베풀어야 할 자비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자비, 즉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입니다.)
8월 12일의 복음 말씀은, 형제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의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형제에게 어떤 죄를 지었고, 그래서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또는, 나는 내가 형제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있는데, 그 형제는 나의 죄 때문에 몹시 큰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나를 용서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이미 산상설교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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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뉴욕 플러싱에서 뉴저지 팰리세이드까지 가려면 2개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하나는 화이트스톤 브리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워싱턴브리지입니다. 막히지 않으면 30분이면 가지만 막히면 2시간이 넘게 걸리곤 합니다. 뉴욕과 뉴저지는 다리를 건너면서 넘어오는 차량에 통행료를 받습니다. 길도 막히고, 통행료도 내야 하기 때문에 꼭 가야 할 일이 아니면 다리를 건너지 않는 편입니다. 동북부의 사제모임도 뉴욕과 뉴저지가 함께 하는데 뉴저지에서 하면 뉴욕 신부님들이 불편하고, 뉴욕에서 하면 뉴저지 신부님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울교구 신부님을 만나기 때문에 길이 막혀도, 통행료를 내면서 다리를 건너갑니다. 교구신부님들과의 만남이 제게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원고를 주시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다리를 건너갑니다. 50년이 넘게 미국에서 사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홍해 바다를 건넜고,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다리가 없었지만 하느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고, 요르단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길이 막히거나 통행료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키며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정화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바위에 물이 솟아나게 해 주셔서 갈증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기도 했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도 했고, 불평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통행료를 낼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강에는 다리가 있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가는 것은 가깝고도 먼 길입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어딜까요? 아프리카, 남극, 북극도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입니다.” 저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피정 중에 들었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의심이라는 벽이 생기면 매일 같은 잠자리에 드는 부부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원망과 불평이라는 벽이 생기면 가까웠던 친구와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벽이 생기면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외면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벽이 생기면 예쁜 꽃도 보이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신자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쉽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이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 가슴에서 다리로 갈 수 있는 여행의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남의 허물과 잘못을 탕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나의 모든 것을 주는 것(Forgiveness)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리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나의 여행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용서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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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요셉 신부님]
언제부턴가 개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애완견은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애완견을 아들이나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그만큼의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내성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에 애완견을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치유 받지 못한, 용서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혀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잘못한 그 사람을 위해 용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잘못을 범했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마 용서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이 행복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서 마음의 평화라는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용서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와 손해를 입히고도 전혀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하느님께 용서하는 마음을 청할 때 비로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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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님]
<용서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치유>
오늘 복음에서는 용서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용서의 마음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 내용이었지만, 정말 그 종은 그야말로 무자비, 자비라고는 하나도 없는 종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그 생긴 모습이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맞아 ! 그 무자비한 종은 아마 내가 알고있는 그런 비슷한 사람일거야...할지도 모릅니다. 수억을 탕감받은 사람이 단돈 몇푼 빚진 친구에게 그렇게 모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돈 탕감 해주지도 않았는데, 제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합니다. 그러니 그 많은 돈을 탕감해준 왕의 분노야 오죽했겠습니까? 결국 그 왕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무자비한 종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비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 무자비한 종의 결말이 궁금합니다. 죽을때까지 감옥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그 빚을 다 갚고 감옥에서 풀려 나왔는지.. 일곱번씩 일흔번 용서하라고 했으니 아마도 분명히 그 종은 용서를 받았을겁니다. 물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해야 했겠지요...
언젠가 저는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 존경심과는 또 다른 눈부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잘못을 하지 않고는 빛을 발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때,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하나가 하늘나라의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사이에서 느끼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회개의 눈물 앞에서 느껴지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기위해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삶이 되어야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청할 수 있는 더 눈부신 삶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용서를 청할 것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해주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늦기전에 용서를 꼭 청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가기전에 용서 받을 일 꼭 용서 받고 가야겠습니다. 성전 건립기금에 몹시도 애를 먹고 있던 어떤 신부님이 한번은 나이드신 할머니에게 그냥 위로라도 얻고 싶어 얘기했습니다.
할머니, 나중에 하느님 만나면 신부의 이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라고 얘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할머니가 삐죽하시면서 말했답니다. "누가 먼저 갈지 어떻게 알아" 하면서 할머니는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신부이다 보니 용서를 청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해성사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짧은 시간들이지만, 순간 순간 저의 삶을 되돌아보게하고 은혜롭게 합니다.
저와 같은 죄를 짓고 고민하며 진심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모습에서 저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무한한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신자에게 저는 고해사제가 되지만, 저에게 그 신자는 회개의 은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곱 자녀가 있는데 유독 한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녀에게 더 많이 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 힘든 자녀가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나머지 여섯 자녀들이 늘 자랑스러웠지만, 오늘 이 눈물의 자녀만큼 그 부모에게 기쁨을 크게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한번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합시다. 세상에 태어나서 큰 효도 한번 하지 못하고 마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일곱번씩 일흔번까지 용서해주고자 하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러나 어떡합니까? 내가 용서를 해주지 못해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한 데, 하느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는 억지로라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결국 용서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치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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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탕감>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저희 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시고 난 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동안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다른 사업체도 많이 가질 정도로 꽤나 성공하셨는데, 부도가 난 뒤 우리 가족이 살던 건물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셋방살이를 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재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셨지만 워낙 자본이 없어서 헛고생만 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히브리 말로 빚의 탕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하느님께 빚진 것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 큰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움을 주셨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우리 식구들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고마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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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혹은 잘못을 고백하거나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사랑하셨고,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이나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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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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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하자!>
코로나로 인해 친교가 잠시 멈추어져 있는 이 때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휴가를 갖는 것이 큰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어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고향인 '솔뫼성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지인 '새터성지'와 무명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줄무덤 성지인 청양 '다락골성지'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선 입국 착륙지점인 강경 '나바위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오늘은 지리산 천왕봉을 등산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한 '생명행위'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그러니 너를 용서합시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아마 '너를 용서하는 일', 그것도 '조건 없이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힘 안에서 보면, 또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너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 안에 머물면 언제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날마다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용서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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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금 더 용서>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조금 더 용서>
낯빛으로
용서하기에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손길로
용서하기에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말투로
용서하기에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마음으로
용서하기에
이르기까지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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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기를 보면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천사로 생각해서 그럴까요? 아기가 자신의 불편함을 표시하는 울음도 예뻐 보입니다.
언젠가 아이를 데리고 성지를 방문한 어느 젊은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리키며 이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랑 사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이 질문에 남편은 웃으면서 제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신부님, 잘 때만 천사에요.”
제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보니 거의 모든 부모가 공감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아이도 죄를 짓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이지만, 이 아이도 잘못을 하고 때로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 아이들을 닮으라고 하셨을까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탁하는 모습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부터 일흔일곱까지 숫자를 세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횟수도 세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만’이라는 숫자는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 가장 높은 단위의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엄청난 액수로서 이만큼 빚을 진 종은 갚을 가망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인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즉, 우리 인간도 이런 상황에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에게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조금의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복수하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까? 믿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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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할 일이 많아야 합니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감탄할 일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삶이 힘든 건 감탄사가 사라져서다. 자판기 앞에서 혹은 식사 때 ‘와’, ‘이야~~’를 연발한다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와~~”하고 감탄하고, 운전하다가도 안전 운전과 모범운전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와~~”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다가도 얼마나 많은 감탄을 쏟을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니 감탄하지 못해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감탄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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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의 은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하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집니다. 뿐만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 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 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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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교황께서 선출되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교황께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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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신비의 삶>
-끝없는 회개, 끝없는 용서, 끝없는 인내, 끝없는 자비-
입추立秋도 지나고 말복末伏이 지나니 완연히 가을입니다. 흡사 어머니 품같이 고맙고 반갑게 느껴지는 가을의 자연입니다. 새벽 밤하늘의 많은 별들도 계속 맑고 밝습니다. 잠시 수도원 정원 잔디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는 순간 언젠가 인용했던 “땅의 행복”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사랑의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어제 수도원을 순례했던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진솔한 문답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하느님께 갔을 때도 단 하나 ‘너는 행복하게 살았느냐?”고 물어 볼 것입니다.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 사랑과 행복은 함께 갑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내키든 내키지 않든 상관없이, 기분따라 감정따라가 아닌 한결같이,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던 성인들의 삶을 배우십시오. 오늘 성녀 클라라 축일에는 성녀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도 사랑을 배우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이 되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할 때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結晶體가 바로 파스카 신비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아갈 때 끝없는 인내, 끝없는 용서, 끝없는 자비의 사랑이 가능합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허무虛無와 무의미無意味에 대한 답도 파스카 신비의 사랑이자 삶뿐입니다.
우리 모두 파스카 신비의 원조인 모세처럼,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집트 노예 살이로부터 홍해를 건너 해방의 자유의 땅으로 넘어선 ‘파스카의 사람’ 모세요, 이런 모세를 닮아 역시 요르단강의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사람’ 여호수아입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 신비를 결정적으로 완성한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바로 여호수아와 예수님의 이름 뜻이 똑같습니다. 죄와 율법, 죽음의 노예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진리의 연인,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넜고,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건넜듯이 우리는 세례성사의 강을 건너 자유인이 되어 파스카 신비의 행복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제의 깨달음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절!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빛을 찾은지 어언 76년이 지났지만 정신적 독립과 해방은 아직도 요원하구나!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의 의식 깊이 곳곳에 암세포처럼 남아있구나, 정말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이래서 토착 왜구라는 말도 나왔나 보다.’ 하는 깨달음의 현실 진단이었습니다. 정녕 우리 의식안 적폐부터 들어내는 참된 회개의 삶이, 파스카 신비의 영성과 삶이 더욱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루하루가 파스카 신비의 삶, 구원의 삶입니다. 제게는 첩첩산중疊疊山中,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산山이요, 하루하루가 건너야 할 강江입니다. 바로 여기 구원과 행복이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의 하느님 사랑 체험이 우리 삶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시 2편이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 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파스카 신비의 사랑이다
절망은 없다”-2001.4.18
수도형제가 준 ‘제비꽃’이란 시제詩題에 즉각 응답하여 썼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내심 많이 흡족해 했던 시입니다. 이어 ‘하늘길’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소나무야!”-2001.4.21.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합니다. 20년전 시를 이렇게 오늘 강론에 인용할 수 있다니 참 신비의 기적이요 감동입니다. 수도원 성전 앞 여전히 건재한 굽이굽이 굽은 소나무입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 신비의 하느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끝없는 용서의 원천이 됩니다. 매일매일 주님께 용서받아 살고 있고 또 평생 주님께 용서 받고 살아갈 우리들인데 어찌 일곱 번의 용서뿐이겠는지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바로 파스카 신비의 무한한 하느님 사랑 체험이 이런 예수님의 무한한 끝없는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의 하늘나라 비유도 흥미롭습니다. 하늘나라 삶의 비결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자비를 실천할 때 바로 거기가 지상 천국 하늘 나라라는 것입니다. 만 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자,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무지에 눈이 먼 그 사람은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기 형제에겐 참으로 인색했고 무자비했습니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의 준열한 꾸짖음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탐욕의 무지에 눈먼 결과 무자비와 인색함으로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새삼 파스카 신비의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매일 용서받으며, 매일 하느님 자비에 빚지며 살아가는 파스카 신비의 열매들인 우리들임을 깨닫는 다면 끝없는 용서에, 끝없는 자비행의 삶만이 있을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끝없는 회개, 끝없는 용서와 끝없는 인내, 끝없는 자비행의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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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멏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제자단 안에서, 밀려드는 군중 사이에서, 사사건건 트집 잡는 종교 기득권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제국과의 사이에서 나름 고심하다 여쭙는 듯 보입니다. 그가 제시한 일곱 번은 그가 참고 참아낼 수 있을 최대의 수일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예수님의 비유 속의 임금은 만 탈렌트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빚진 종을 용서해 줍니다. 그를 놓아 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지요. 이유는 단 하나, 갚을 테니 좀 기다려 달라고 호소하는 그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용서는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손해를 입은 측면에 시선이 고정되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선을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향하면 가능하기도 합니다. 약함과 죄악에 휘둘리는 상대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 그에 대한 연민이 굳은 마음에 틈을 벌려 용서를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아마 베드로가 훗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십자가 처형 때 줄행랄을 놓은 자신을 자각한 뒤였다면 "일곱 번"이라는 수는 떠올리지조차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부끄럽고 가련하고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순간에 용서 받은 받은 체험은 더 이상 용서의 빈도수도 경중도 대상도 따지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모세가 죽은 뒤 후계자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주님의 계약 귀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여호 3,17)
때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강을 건너는 행위는 처음 이집트를 나올 때 갈대바다를 건넌 파스카 사건과 마찬가지로 민족 전체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공동 체험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뒤, 계약의 표지인 할례를 행하고 첫 파스카 축제를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예리고 성읍 탈환이 이어지게 되지요.
강을 건널 때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멈추어 서서 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관상하며 그 안에 깃든 의미에 머무릅니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하느님께서 계약 체결을 약속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되었듯,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인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교회는 직무 사제직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보편 사제직을 부여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찬미의 제사를 올려드립니다.
보편 사제직을 통해 교회의 신비에 참여하는 우리는 오늘 독서 속의 사제들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휘감아 흐르는 온갖 탐욕과 반목과 죄악의 물결 속에 단단히 서서 그 격류를 멈추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가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지막 한 사람이 구원될 때까지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고 강 한복판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사제직의 소명은 특별한 능력으로 수행된다기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연민이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연민이 흐른다면, 모든 피조물이 지닌 한계와 실존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용서도 유대도 포용도 가능할 것이고, 이 연민은 이 세상에 어둠과 절망과 증오의 악이 침투할 틈을 촘촘히 메워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저마다 주님에게서 용서 받은 체험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회성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자주 반복해 용서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해야 맞을 듯 싶네요. 그렇다면 자비를 입은 존재인 우리에게 용서는 의무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끓는 연민을 지니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과 형제를 향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연민을 거부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겁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하느님에게서 용서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하고, 또 우리가 용서하니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연민과 자비, 용서의 이 거대한 챗바퀴 안에서 후회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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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pdUPzb4gb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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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용서의
현주소를
다시금
보게 된다.
용서로
완성되는
우리들
삶이다.
함께
나누어야 할
용서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걸어가신다.
용서는
용서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용서의
장애물은
기대감이다.
용서란
용서의
기대감과
용서의
손익계산마저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가
우리의
인격을
고양시킨다.
용서는
실천하지
않으면
원한과
보복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원은
용서의
승리이다.
매일매일
용서가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용서로
얻게되는
부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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