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에 매달려보다
곶감 먹다가 허공을 생각한다
우리 일생의 한 자락도
이렇게 달콤한 육질로 남을 수 있을까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
기다려온 만큼 빛깔 이리 고운 것인가
맨몸으로 빈 가지에 낭창거리더니,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 벗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또다시 허공에 몸을 다는 시간
너를 향한 나의 기다림도
이와 같이 익어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건네는 말들도
이처럼 고운 빛깔일 수 없는 것일까
곶감 먹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나를 매달아 본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 서해 낙조
그대 그리운 날은 서해로 간다
오가는 길과 길 사이로
초록빛 그리움 안고 달리면
내 안으로 나무 하나 깊이 들어선다
계절마다 하늘 바꿔 이는 저 느티나무도
한 생을 이렇듯 푸르게 드리우지 않는가
참매미 쓰르라미 숨찬 울음소리에
산과 강 뜨겁게 열리고
불볕 속에서도 길은 서해로 달린다
십리포, 만리포에 이르러
제 가슴 한쪽을 여는 바다
짙은 쪽빛 껴안고 섬 하나 키운다
파도는 몇 번의 물때를 바꾸며
생의 바튼 숨길 씻어 내린다
파도소리에 귀먹은 모감주나무
수천 번 푸르름 길어 올리고서야
제 가슴에 능소화 몇 송이 붉게,
붉게 꽃잎 틔운다
서해, 하루는 붉게 달아올라
큰 바다 비로소 받아 안는 해의 몸
길에서 바다로, 다시 파도 속으로
너에게로 오롯이 이어져
가슴속에 등불 하나 살아 오른다
- 산길
뻐꾹새 소리 따라 걷는다
산속 들어도
뻐꾹새 보이지 않고
소리만 환하게 산을 울린다
뻐꾹새는 나무 위에서 우는 게 아니다
내 속에서 울고 있다
숲으로 한참 걸었는데도
소리만 울창하다
뻐꾹새 어디에 있는 걸까
산속 깊이 들어갈수록
소리만 더욱 울울창창하다
소리는 다만
산으로 나를 끌어당길 뿐,
뻐꾹새 좀체 보이지 않는다
- 기억 속의 길
네가 스쳐간 곳에는 상처가 남는다
이렇게 겉으로 차오른 푸른 멍
그 안에 짙은 물빛 일렁이는 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위보다 단단한 침묵,
북극 나침반보다도 단호한
숨의 멈춤.
네가 스쳐간 풀잎 끝에는 향기가 흐른다
아직 채 이슬 걷히기 전
들녘의 가느다란 길 다라
그대 깨우고 간 새벽
들길은 더 넓게 트이고
바람 스쳐간 풀잎 끝에
아리고 저린 기억.
- 시작시인선 0087 [허공이 키우는 나무]
햇살 속 걷다가
큰 나무 그늘에 들었다
나무는 나를 품고 생기가 돈다
그대가 드리운 사랑의 심연
출렁이는 파도 속에
하늘 걸려 있다
숲은 적요하다
그늘 속 가지를 뻗고
이파리 묻으며 자란다
작은 풀잎까지
가까이 불러 그늘을 키운다
그늘이 내 몸속에 들어온다
내가 그늘 속에 뒤섞인다
나무는 햇살과 그늘을 두고
허공을 끌어안는다
비로소 서늘한 길이 열린다.
-김완하 시 '내 몸에 그늘이 들다'모두
* 시 정신 이란 생명 있는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무생물에도 생명 이상의 가치와 정감을 지니고 대하는 자세이다. 모든 사물을 생명과 사랑으로 관계 맺으려는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무관심, 무관용, 자기애착 에서 벗어나 ‘나’와 ‘너’가 존재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을 말 한다. 하지만 현대처럼 시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는 ‘공감’과 어떤 유 무형의 ‘어울림’이 더욱 필요하다. 세상엔 ‘멋 있는 시’도 ‘맛 있는 시’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면 소멸되곤 한다. ‘시 정신’이란 단어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재 강조 되는 이유이다.
첫댓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위보다 단단한 침묵/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김완하 시인 시 읽으니 좋습니다.
제 기억 속의 길들도 헤매어보고요.
여러 편 시리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의 속을 헤아리는게 얼마나 ‘한정적’인가 하는 생각, 이번 번개를 통해서 생각 했습니다. 여신님도 참, 단단한 삶의 심지를 갖고 있구나! 하고 느껴졌고 내가 감히,,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아도 될것 같은 동지애(?)를 느꼈다면 우스울까요?!.., 버티는 것이 강한 것이라 말하지만 거기에 ‘희노애락’이 제대로 입혀지지 않으면 덧없다 하겠습니다. 시류에 흘러가지 않고 시민의 길을 묵묵히 가는 시사랑이 자랑스럽습니다. ‘시하늘’이란 까페를 둘러보고 새삼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깊은 내공으로 시사랑을 이끌어 주십시요. 항상.., 응원합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홍수염 모두 옆에서 잘 도와주고 격려를 보내주신 덕분입니다.
나약하지만, 칭찬에 힘을 얻어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며 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