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오기 전과 후의 역사적인 상황2(갈3:23-4:7)
아브라함 언약이 체결된 후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진다.
율법은 언약 당사자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계약) 내용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기로 한 합의사항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언약과 율법을 주신 분이시다(갈3:20).
여호와께서 율법을 주심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행하기 위함이다.
이는 이스라엘을 죄 아래에 가두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보존하기 위함이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서 그리스도 때까지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율법은 당근과 채찍으로 이스라엘을 훈육하고 인도한다.
이러한 훈육과 인도는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
곧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때까지 이루어진다(창12:1-3).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구약 성경 곧 율법은 모든 것들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
당근과 채찍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인도한 것이다.
이처럼 율법은 죄 아래에 시행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완성된 약속을 주기 위함이다(갈3;22).
완성된 약속은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이다(창12:3).
이는 하나님 아들(자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자녀)은 아버지 유업을 이을 상속자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정한 상속의 때까지 종과 다름이 없다.
여호와의 종 된 백성으로서 가정교사인 율법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처럼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 뜻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한다(갈4:3).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종(머슴)과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종과 아들, 어린아이나 장성한 아들이라는 말은 모세 언어이다.
이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언약언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우시고 옛 시대를 동행하셨다(출9:6-10).
이러한 동행은 부모가 어린아이의 수준과 발걸음에 맞춘 동행과 같다.
이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하고 양육하는 방식과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과 어린아이 같음에 맞춘
모세율법을 따라 옛 시대를 동행하셨다(막10:3-5).
그래서 바울도 율법 아래에 있던 때를 종과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말한다(갈4;1-3).
이처럼 하나님과 관계는 신구약 백성의 어떠함과 계시의 질을 결정한다.
계시의 질을 결정한다고 함은 신구약에서의 구원과 생명의 질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어둡다는 말도 계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어떠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보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중보자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대하셨다.
따라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자신이 본 하나님 영광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모세가 말한 이상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중보자 모세에게 속하여 죄 아래에 세워진 종(머슴) 된 백성이었다(고전10:2, 갈4:1-3:7).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교제하는 영생을 누리지 못하였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갈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율법 아래에 세워진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같은 자들이다(마4:18-22, 28:1-10).
이들 모두는 아래로부터 나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다.
그들은 언약의 법인 율법을 따라 여호와를 섬긴 옛 언약 백성이다.
그런데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히10:4, 11)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히7:16-19, 10:1).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유대 땅에 보내신 것이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5).
율법의 멍에를 벗겨내고 하나님의 아들(자녀) 곧 참되고 온전한 상속자,
종말의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이어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율법 아래에서 속량은 개혁신학처럼 하나님의 율법 법정에서 받는 무죄 판결이 아니다.
이는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로 쉬게 하리라“
고 초대하신다(마11:28-30).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신에게 부르시는 초청이다.
이는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예수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라는 초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종(머슴)의 관계가 아들(자녀) 관계로 완성되기 때문이다(갈4:5).
이처럼 하나님 아들로 세워질 때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심긴다.
이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영생을 누린다는 말이다.
이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성령이 양자의 영이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하는 종말의 영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됨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완성된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 내용인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창17:7-8)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구원 역사적이다.
이는 이방 철학의 개진 방식을 따른 개혁신학처럼 영원세계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적이다.
구원 역사적이라고 함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질서인 시간의 흐름과
각 시점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사역이라는 말이다.
옛 언약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심에서 다른 차원의 일로 나타난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땅에 대한 일을 집행하셨으나
새 언약에서는 하늘에 대한 일을 시행하신다.
구약에서 사람 중보자를 통한 간접 통치체제가
종말에는 아들을 통한 직접 통치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율법통치와 그리스도 통치 사이에는 대립과 충돌이 있게 된다.
이러한 대립과 충돌은 율법 아래의 관헌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다.
이러한 대립과 충돌의 결말은 예수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통치를 영원히 종결하고
하늘의 질서가 세상의 보편 질서로 확정한 사건이다.
그 결과 율법이 주지 못하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타나게 된다.
율법의 저주대로 죽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믿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믿음이 온 이후 시대가 종말이다.
이에 대하여 내용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라는 말이다(갈3:26).
이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 아래의 종(머슴)에서 속량이 되어서 하나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아들(자녀)이라는 말도
개혁신학처럼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적인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의 상속자를 가리킨다.
이 말에 대한 구약 배경은 아브라함과 그의 상속자 이삭이다.
이삭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생명의 약속을 따라 출생한 아브라함의 상속자이다.
따라서 이삭에게 속한 자는 이삭이 상속한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받는다.
이처럼 아버지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권은 아들(자녀)에게만 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아들(자녀)로 천국을 상속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부터 난 하나님 아들(자녀)이며
아버지와 한 성령으로 사는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 가족이다.
이처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양자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우셨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종말의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상속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가리켜서 믿음이 왔다고 말한다(갈3:25).
이 말은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참되고 온전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 후손이다(갈3:16).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아브라함 약속의 실현이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의 구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믿음이 온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 역사적으로 율법과 복음을 대비한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오심 곧 믿음을 대비한다.
여기에서 믿음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믿음이 온 후로는 더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갈3:25). 이
는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이다.
할례를 행하거나(갈2:3-4),
율법이 명하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거나(갈4:10),
성전제사나 십일조를 지켜야 하는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약교회는 옛 언약 내용인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서 믿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고 선언한다(갈3:25-26).
여기에서 ’너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된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다(갈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함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자라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참여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너희‘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이다.
또 ’너희‘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라 칭하는 유대인에게 약속된 유업에 참여하는 상속자이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유업인 천국을 상속받았다.
율법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올 때까지 집행되었던 한시적인 하나님 조치이다.
율법통치가 시행되었던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셔서 가나안땅에서 함께 사셨다.
이스라엘의 머리인 대제사장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제사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한 레위인은 성소에서 그들을 보좌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남자들은 성소의 뜰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여자들은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서지 못하였다.
성경에서는 어린아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20세 이하 어린아이는 언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들은 부모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왕국의 후반기에서
남자아이들은 만12세가 되면 부모를 따라 성소에 출입하도록 허락되었다(눅2:41-51).
이러한 율법 아래의 장벽들은 믿음이 온 후로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라는 말을 강조한다(갈3;27).
27절의 ’누구든지‘는 28절의 ’너희들‘이며
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모두‘를 가리킨다(갈3:28).
그러므로 ’누구든지‘는 모든 인종과 장벽, 신분을 망라하는 ’누구든지‘이다.
이처럼 ’누구든지‘를 점층적으로 나열함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의 범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들(자녀)이 됨은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갈3:6-9).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 내용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는 구절을(갈3:28) 여성 목사직에 대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갈라디아서 주제나 문맥과는 상관이 없는 잘못된 해석이며 주장이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주제는 교회의 설립이나 조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각 성경의 주제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각 성경의 주제와 문맥을 떠난 해석은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 정당성 확보를 위하여 애용하는 해석방식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