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메일
  • |
 
카페정보
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노아
    2. 아간돈
    3. 서정호70
    4. 쏭쏭
    5. 萬松김성배-대고려..
    1. 짜라두짜
    2. 니슈
    3. 조조2
    4. hbpkzokcmmp
    5. lvmcogccayow..
 
카페 게시글
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스크랩 17. 유럽세계의 성립(1) - 프랑크왕국(Frankenreich)
나도사랑을했으면 추천 0 조회 1,144 06.09.18 0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세 유럽 세계의 성립(1).            이길 상

 

8세기 초, 프랑크왕국의 최대 영토.유럽세계 혹은 중세 유럽세계라고 분류할 때, 여기에는 세가지의 공통 요소가 포함된다.

 

그 첫째가 봉건제도라는 주종관계혹은 지배예속관계의 신분제도이고,

 

둘째가 로마카톨릭교의 교회와 교황청, 수도원 등으로 이룩된 신앙체계이며,

 

셋째로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외에 게르만족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음).

 

동 로마제국을유럽세계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도 이런 유럽적인 조건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세 유럽 인들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국가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영주 밑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분명하게 대답했다.....

 

가. 메르빙거가의 프랑크왕국(Frankenreich)

 

(1)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들

 

4세기 후반 훈족의 침입으로 시작된 게르만족의 이동과 이에 따르는 유럽의 변화는 훈족의 침입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유럽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재편이 어떤 형태로든 요구되고,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구의 환경변화와 인류의 점진적인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통의 현상들이 동서양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뺏고 빼앗기는 전쟁을 수 없이 되풀이 하였고 그 전쟁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사회가 주인을 마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다.

 

야만 족 게르만 인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 세계에 등장, 형편 없는 생활습관과 이상한 제식(祭式)들을 보고 암흑의 시대가 나타났다고 많은 사람들은 우려했고, 후세의 사가(史家)들도 이 시대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표현했다.

 

게르만이 세운 부족국가들은 단명에서 거치고, 오직 프랑크 왕국만이 게르만의 전통을 유지했고,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장수(長壽)국가로 등장하여 유럽세계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고트족 출신의 사제 울필라스(Ulfilas:310 ?~382 ? 혹은 울(불)필라(Wulfila)가 아리우스파의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킨 것은 고트족의 여러 부족들이고 이들도 로마 영내에서 동 서 고트왕국을 세웠을 때는 종교적 문화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명왕조라고 하지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을 지탱한 부족국가도 있었다. 이러한 것은 중국의 단명왕조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부연하면 게르만의 국가들이 어떤 침략에 의해서 멸망했다기 보다는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문화에 동화되어 유목민 특유의 강건한 힘을 빼앗겼던 것이 더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메르빙거왕조를 연 클로비스는 정책적으로 로마카톨릭에 개종했지만 그들의 만풍(蠻風)을 유지하여 그들만의 풍습과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장수국가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야만족이 문명지역을 힘으로는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슬프게 흉내라도 냈다가는 곧 망하고 말았다. 정복 후 제도(制度)나 풍습(風習)에 얽매인다는 것은 만족이 가지는 힘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과거 서 로마제국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게르만의 부족국가들이 서서히 사라진 이면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큰 작용을하였다. 그렇다면 프랑크왕국, 로마가톨릭교회, 아리우스파의 크리스트 등은 무엇인가?

 

(2) 메로빙거 왕가의 유혈극

 

클로비스가 죽고 나서 프랑크왕국은 제자균분의 그들의 상속 유풍에 따라 영토를 네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중 막내 클로테르 1세(Clotaire1:497~561)는 스와송(Soissons) 방면을 맡았는데 이가 야만족의 피를 가장 많이 받았는지 클로비스가 사망한 511에서부터 558년 재통일 될 때 까지 약 50년 간은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그칠날이 없었다.

 

그런데 클로테르 1세가 그의 형이나 조카들 외에도 주위의 다른 게르만인 부족 여럿을 떼려 눕히고 영토를 확장한 처절한 정복으로 프랑크왕국 영토는 클로비스 때 보다 훨씬 더 확대되어, 프로방스(Provence), 부르고뉴(Bourgogne)지방을 비롯해서, 북부 이탈리아의 쉬바벤(Schwaben),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투링겐(Turingen)방면까지 차지하였다.

 

클로테르 1세가 죽고(561) 프랑크왕국은 50년 전처럼 다시 넷으로 갈라졌다. 그도 그의 아들 넷에게 왕국의 영토를 그의 개인 소유재산으로 생각하고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당부까지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4개의 소 왕국에서 더 이상 분열되는 것을 막고, 어느 하나가 재통일 하기 위해 왕족간의 처참한 유혈극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꾀나 복잡하다. 클로테르 1세의 둘 째 아들인 힐페릭 1세(Chilperic : ?~584)에게 초점을 맞추고 내용을 풀어 보자.

 

그는 부왕으로부터 스와송과 투르네 일대를 물려 받았고,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톨릭교회의 3위 1체에 대해 자기 나름 데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잔학(殘虐)했고, 대단한 호색가(好色家) 였다고 한다.

 

그가 첫째 왕비와 사이가 나빴을 때 왕비의 시녀였던 프레데군트(Fredegund)와 밀애하였고, 막상 왕비와 이혼 후에는 서고트의 왕녀 갈스빈타(Calswinta)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대단한 미인인 동시에 그의 형수 브룬힐다(Brunhilda)의 동생이었다.

 

다시 말하면 형제간에 동서(同壻)간이 되었다는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부(情婦) 프레데군트는 힐페릭 1세를 교묘히 꾀여, 침대에 누워있는 서고트왕녀 갈스빈타를 죽여 없애고 그 자신이 왕비가 되었다.

 

이에 격분한 브룬힐다는 그의 남편(힐페릭 1세의 형)을 충동 하여 두 형제간에 싸움이 시작되었고, 형이 승리하는 순간에 새로이 제수(弟嫂)가 된 프레데군트가 보낸 자객(刺客)에게 피살되고, 브룬힐다는 르왕(Rouen)에서 사로 잡히게 되었다(567)

 

다음 해(568) 브룬힐다는 힐페릭1세의 첫 번째 왕비에서 태어난 메로베(Merovech)와 결혼하여(우리식의 촌수로는 조카와 결혼) 석방되고, 그의 본고장 메츠(Metz)로 가서 어린 아들 힐데베르트 2세(ChildeverdⅡ)를 왕으로 세우고 반대파의 호족(豪族)들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잔인성을 보이기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다시 자객을 보내어 메로베와, 이 결혼을 주관했던 사교(司敎)까지 살해하였다. 이래서 브룬힐다는 결과적으로 이 질투등어리의 동서(同壻)인 프레데군트에게 동생과 두 남편 가까운 사교까지 잃게 되었다.

 

이에 브룬힐타는 복수의 칼을 갈고,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서 세력을 규합, 먼저 힐페릭 1세를 살해하고, 프레테군트를 찾았으나, 그는 궁지에 몰리자 교회 안으로 숨어 목숨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다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브룬힐타의 복수 극은 더욱 기세를 올려 10 여명의 왕을 차례로 죽이고, 아들이 죽은 후에는 손자를, 손자가 죽고 나면 증손을 왕위에 앉혀서 프랑크왕국을 마음대로 지배하였다.

 

중국 당나라에서 측천무후가 전권을 휘두르기 1세기 전에 프랑크왕국에서는 그 이상의 여걸이 등장하여 새로운 역사를쓰고 있었다. 이런 브룬힐타의 행위가 다른 왕족이나 호족들에게는 원한을 샀지만, 그레고리우스 대교황(Gregorius de Tours : 538 ?~594.11.17)을 비롯한 각 교회의사교들에게는 신앙이 두텁고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에 이바지 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복으로 찬양 받았다고 한다.

 

613년 브룬힐타의 나이 70세, 각지의 호족들은 더 이상, 이 여걸의 전횡(專橫)에 견디다 못해 반기(叛旗)를 들고, 힐페릭 1세와 프레데군트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테르 2세(Clotaire Ⅱ)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브룬힐다는 부르군트로 달아났으나, 아이스네강(Aisne R)에서 싸우기를 거부한 그의 부하 장졸들에 의하여 결박당한 체 클로테르 측에 인도되었다가, 발가벗긴 체 머리털과 팔 하나 다리 하나를 말꼬리에 매달아 말을 각각 반대 방향에서 질주 시켜 사지가 찢어지는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프레데군트와 브룬힐다의 물고물리는 복수전은 결국 브룬힐다가 프레데군트의 아들에게 살해됨으로서 막을 내리게되었다.

 

이래서 다시 클로테르 2세에 의해서 프랑크왕국은 재통일 되지만 이후 백여 년 간 뒤를 이는 왕들은 호색한이거나 어려서 요절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위(無爲)의 왕들이었다.

 

따라서 왕국을 지탱한 것은 왕국이 보호한 교회와 호족들의 비호(庇護)가 있었기에 그남아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은 이들의 세력이 힘을 모아 반기(叛旗)를 들었을 때 이 모래성과 같은 왕국은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나.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s영 : Karolinger 독)

 

(1) 궁재(majordomus : 宮宰)샤를 마르텔(독 : Karl Martel)

 

칼롤링거 왕조를 이야기하다 보면 피핀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이 왕가의 뿌리가 피핀가(家)이기 때문인데, 편의상 대 피핀, 중 피핀, 소 피핀으로 구분한다.

 

피핀가(家)의 먼 시조격인 대(大)피핀(Pippinder tere :?~639)은 프랑크왕국의 분국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었고, 그는 클로타르 1세 사후(561)의 프랑크왕국 내란에 즈음하여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와 제휴,

 

브룬힐트와 대항하여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를 옹립하고 전국 통일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고, 그의 딸 베거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의 아들 안제기젤과 혼인시켜 그 사이에서 중 피핀이 태어났다.

 

중(中)피핀(Pippin der Mittlere: 635 ?~714.12.16)은 외할아버지가 되는 대피핀의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를 계승하여, 카롤링거가(家)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궁재 중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과 전쟁을 벌여 텔토리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의 궁재를 겸하여 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알라만족을 토벌하고, 프리스족을 정복하여 서(西)프리슬란드를 병합하였으며, 앵글로 색슨의 수도사를 보호하여 이교도의 그리스도교화에 공헌하였는데, 그의 아들(서자라고 함)이 카알 마르텔(Karl Martell:독 , Charles M:프 , KarolusM)이다.

 

메로빙거 왕조의 최고 궁정직(宮廷職)으로 알려진 궁재란, 로마제국의 대지주들이 산재한 토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둔 감독관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왕의 측근인 종사단(從士團)의 장관도 겸하였다.

 

시소와 같은 권력의 속성은 프랑크왕국의 실권을 궁재에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대대로 세습한 카롤링거가(家)가 다른 세력을 제압하고, 중(中)피핀, 샤를 마르텔로 이어지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침입해온 이슬람세력을 격퇴하고(732), 다른 분국(分國)의 궁재도 겸임, 왕국의 실질적인 제 1인자가 되었다.

 

샤를 마르텔에 관한 것은 그가 의젓한 풍채를 가졌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그들의 가계가 교회와 성직자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것과는 반대로 중장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그의 가신들인 중장기병에게 분배한 것이 봉건제도의 출발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나 교회의 사제직을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일족이나 가신(家臣)들에게 배당해 주었는데, 이런 성직자 가운데는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에 나오는 승려 튀르팽(Turpin)처럼 무용이뛰어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성직에는 부적합하여 갈리아의 교회들은 규율이 엉망이었고, 따라서 교회측으로부터는 평판이 대단히 좋지 못했다. 그러나 세속의 정치에서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냈고, 독일 내부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공로도 대단했다.

 

그리고 그가 지배했던 최후의 몇 년 간은 정통의 국왕이 없었기 때문에 영토는 그의 두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2) 카롤링거 왕조와 로마카톨릭교회

 

이런 샤를 마르텔이 죽고(741) 그 뒤를 이은 두 아들, 동생 난쟁이 피핀(Pippin der Kreine 독 : epin le Bref 프: 714~768)과 형 카알로만(Carloman : ?~754)은 어느 수도원에서 메로빙거왕가의 후손 한 사람을 찾아내어 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힐페릭 3세(Chilperic Ⅲ)이며,

 

이들이 세운 이 왕을 중심으로 형제간에 공동통치를 하다가, 형 카알로만이 종교적 열정에 못 이겨 두 아들을 동생에게 맡기고,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그 곳의 수도사가 되었다.

 

이로써 난쟁이 피핀(이를 小피핀이라고함)은 1인 통치의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의 작은 체구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정력을 발휘하였으며, 그의 부친 마르텔과는 달리 성(聖)보니파키우스(Bonifacius)를 고문으로 삼고 부친이 어지럽힌 교회를 정리하였다.

 

그의 뛰어난 정치력은 성(聖)속(俗) 양측의 동의를 얻고, 이름 뿐인 힐페릭 3세를 추방하고 즉위하여(751) 카롤링거왕조를 열었다. 이 때 난쟁이 피핀은 게르만의 전통양식으로 즉위식을 올리면서 대사교 보니파키우스에게 도유(塗油)의 교회의식을 병행케 하여 성자(聖者)의 위치에도 올랐다.

 

한편 본의 아니게 왕이 되었던 힐페릭 3세는 게르만 왕가의 상징이었던 치렁치렁한 갈색의 머리를 자르고 그가 8년전에 떠났던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사가 되었다.

 

이 때 랑고바르트왕국이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교황청을 위협하였다. 위기에 빠진 교황청은 동로마제국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성상파괴령(726) 문제로 사이가 벌어진 후 타협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더구나 교황 자카리아스는 동로마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웠다.

 

다급해진 교황청에서는 교황 스티븐3세(StephenⅢ ?~757)가 직접 엄동의 알프스를 넘어 북부 프랑스의 폰티온으로 난쟁이 피핀을 찾아가 교황이 직접 피핀과 그의 두 아들에게 도유(塗油)의 의식을 행하고 "로마인의 보호자(Patricius)"라는 칭호를 부여, 구원을 요청하였다(754. 1월)

 

이로써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황청과의 제휴가 실현되었다. 그런데 교황이 피핀에게 내린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는 원래 로마귀족을 지칭했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동로마제국 황제가 이탈리아 총독에게 부여한 명칭으로 변했고, 피핀에게 이것을 주었다는 것은 피핀이 황제의 대리자(총독)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황제가 아닌 교황이 이를 수여했다는 것은 월권(越權)에 해당하고 당연히 동로마제국의 항의를 받을 각오를 해야 된다. 이래서 교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Donatio Constantini)을 위조하여(?) 이에 대처했다.

 

여기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寄進)장이라는 것은 그가 나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때, 신의 계시로 병을 고치고 그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서쪽의 모든 땅은 로마교황에게 맡긴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위작(僞作)이라는 것이 르네상스시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비록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신의 계시로 중병을 고치고 감사한 표현으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고(313), 뒤 이어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관하여(326) 교리통일을 하는 등 크리스트교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문서를 남기지는 않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3세 교황에 의해서 가짜가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인데,... 가짜건 진짜건 이런 문서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이때 까지만 해도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영향은 대단히 강했다고 보여지며, 로마교황으로서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후일의 십자군원정도 이런 아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 로마교황청의 새로운 동반자프랑크왕국

 

로마 교황령의 확대 과정프랑크왕 피핀은 교황의 감사한 조치에 보답하기 위해서 중신회의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고, 교황청을 보호하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수도원으로 들어 갔던 그의 형 카알로만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그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고 드디어 롬바르디아 평원에 도착하여 랑고바르트 세력을 타도하였다(754)

 

라벤나를 비롯한 중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로마교황에게 기진(寄進)하여 "베드로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로마교황령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이로써 교황청은 랑고바르트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프랑크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세계에 진출하여 작열하는 지중해 문화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삭막하고 음산한 기후에서 시달렸던 게르만인들은 여기에 매료되어 그들 왕국의 영토를 이곳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교권에 대한 간섭이 심하였고, 여기에서 일차적인 충돌이 이른바 성상금지(파괴)령(726)에 따르는 갈등으로 나타났다.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에서 나타난 이슬람제국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드가 죽은 후, 후계자(칼리프)들에 의해서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으로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삽시간에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소아시아 일대의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였다.

 

이에 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소아시아의 농민들이 주축이 된 해군력으로 이슬람 해군을 격퇴하여(718)  이슬람세력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의 주역이 였던소아시아의 농민들은 신비주의에 젖어 교회 건물에 세운 십자가를 비롯하여, 예수상과 마리아상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상숭배(偶像崇拜)라 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편 동로마제국의 정복에 실패한 이슬람군은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이집트를 정복하고 계속 서진(西進)하여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에 침입하였다(732).

 

다. 동 서 교회 분열의 서막

 

(1) 성상 숭배 문제

 

이런 복잡한 소용돌이 속에서 동로마황제 레오 3세는 교회와 수도원의 반발을 예상하고 성상파괴령을 내렸다(726) 교회에 있는 모든 성상을 철거하라는 것이다.

 

레오 3세가 이런 조치를 하게 된 이면에는 소아시아 주민들의 사기를 높여 준다는 명분과, 수도원이 소유한 방대한 면세지를 몰수하여 세수를 늘리고자 했던 실리적인 계산이 복합적으로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성상파괴령이 내려지자 교회와 수도원이 즉각적으로 반발한 것은 물론이고, 이것이 동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로마교구, 즉 서유럽의 카톨릭세계서도 교황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성상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가톨릭에서는 그래야만 되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교의(敎義)에서 "성상에는 숭배를, 신에게는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고 따라서 성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것을 일시에 금지시키면 당장 교의상의 혼란을 일으켜 더욱 보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날 소지가 너무 많았다.

 

셋째로는 로마교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르만족들족은 다신교적인 원시신앙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예배의 대상이 필요했다. 바꾸어 말하면 성상 없이 게르만을 개종시킨다는 것은 절대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 없는 절에서 소원성취를 빌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승인을 받고 교황에 취임하였다. 레오 3세로서는 자기가 승인해준 교황이 자기의 뜻을 잘 따르리라 생각했으나 사정은 정반대로 나타나 그레고리우스 3세가 성상을 교회에서 철거한 자를 파문(破門)에 처해버렸다.

 

이에 격분한 레오 3세는 그의 제국 내에 있는 교황청 관할하의 카톨릭교회를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풀 사교의 관할로 넘겨주었고, 한편으로는 랑고바르트왕국을 부추겨서 로마교황청을 압박하였다.

 

이에 교황청은 금 350 파운드가량의 수입이 줄어드는 경제적인 손실과 함께 랑고바르트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성상을 지켜야 하는 것은, 이것이 이미 크리스트교의 교의로 굳어져 있었고,

 

성상없이 게르만족의 포교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게르만족이 없는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레고리우스3세는 동로마제국과는 완전히 결별할 것을 작정하고 프랑크왕국과 손을 잡기 위해서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때 샤를 마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왕국에서는 마르텔 자신이 교회에는 관심이 없었고 랑고바르트와 동맹하여 이슬람군 격퇴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따라서 그리고리우스 3세의 이런 제의는 정중히 거절당 하고 말았다(739). 샤를 마르텔이 로마교황청에 관심이 많았다 하더라도 동맹국인 랑고바르트를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서로마제국의 부활

 

그 2년 후(741) 동로마제국에서는레오 3세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5세가 즉위하여 계속 교황청을 압박하였고, 프랑크왕국에서는샤를 마르텔이 죽고, 피핀이 통치하다가 교황의 권위를 빌려 카롤링거왕조를 열었고, 랑고바르트를 정복하여 그 땅을 교황청에 기증하였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이로서 로마카톨릭 교회는 동로마제국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졌고, 프랑크 왕국과 로마교황청과는 동반자가 되어 유럽세계를 재편했다. 이와 병행해서 동로마제국은 점차 비잔틴화 되어 유럽에서 분리되고, 교회도 동서로 분열 되었다.

 

이를 즈음에 확실하게 로마교황청과 동반자가 된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였는데 이가 소피핀의 아들 칼 대제(독 ; Karl der Grosse: 프: Charlemagne : 카롤루스 등)로서,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여 로마교황으로 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칼 대제의 편력지. (아헨 궁정을 중심으로)샤를마뉴(Charlemagne: 742.4.2~814.1.28)라고도 불리는 칼 대제는(재위 768∼814), 부왕 피핀이 죽은 뒤,

 

부왕 피핀이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동생 카를만과 왕국을 공동통치하였다.

 

그러다가 771년, 동생이 죽어 단일통치자가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여러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족의 정복하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병탄하였다.

 

다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세력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에스파냐와의 국경지대에 변경령(邊境領)을 설치하였으며 바이에른족을 토벌하는 등 많은 곳을 정복하여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成文化)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아울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속이 다른 방대한 영토를 직접 지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이른바 중세유럽적인 봉건국가를 만들어 갔다. 이것이 지방분권적인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등장할 수 있는 소지(素地)가 된 것이다. (오른 편의 지도는칼 대제가 재임 중 머문 곳을 표시한 것)

 

또한 그 힘을 배경으로 로마교황권과 결탁하고,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황제의 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로써 서유럽은 비잔틴황제와 격이 같은 황제가 등장하여 실질적으로 완전히 비잔틴(동로마)제국과 결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칼대제가 대관(戴冠) 되었다는 것은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로마교구가 비잔틴황제로 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칼 대제가 주로 머물었던 아헨의 궁성에는 외국에서 많은 학자들을 초빙하고,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였으며,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이룩되는 성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족 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칼 시대를 배경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유럽이 형성되고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여러 업적은,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이상화,우상화, 신격화 되어 "샤를마뉴 전설"이라는사상적·문학적 전승을 이루게 되었고, 중세 무훈시(武勳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라. 프랑크왕국의 분열

 

(1) 칼 대제의 손자들

 

옛 서 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교황청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은 프랑크 왕국도 칼 대제가 죽고(814) 나서 게르만족의 유풍에 따라 제국의 영토를 그의 자손들에게 분할 상속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북쪽에서는 노르만족이,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서남쪽에서는 이슬람인들 의 뻔질나게 침입했다. 프랑크왕국은 외환(內憂外患)을 동시에 맞게 된 것이다.

 

제국을 상속 받은 것은 칼 대제의 아들 루이 1세(Louis 1: 경건왕)로서,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측으로 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난세(亂世)를 헤쳐나갈만 한 능력은 절대로 부족했다. 결국 그는 무능한군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정치란 것이 국가적인 제도가 확립되어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왕실과 지방의 세력집단(호족) 간에 인간적인 유대로 운영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조그마한 틈새만 생겨도 와해되는 취약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 시기의 유럽사를 공부하다가 보면, 오리엔트와는 전혀 다른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나라 이름이 정해진 것이 없다. 고트 왕국이니 프랑크왕국이니 하는 것은 고트족이나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이라는 뜻으로 후세에 그렇게 부른 것이고, 클로테르 왕국이니 칼 제국이니 하는 것도 통치자의 이름을 국가 명칭으로 사용한 경우에 불과 하다.

 

둘째는 유목민의 잔재라 할 수있는 이동의 습관에 따라 정해진 수도가 없다. 칼 대제의 아헨 궁정이라는 것도 수도라기 보다는 이곳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고, 자신은 수시로 변화는 그의 영토 내를 직접 방문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셋째는 관직이나 관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 통치에 절대 필요한 관료제나 상비군이 생긴 것은 훨씬 후에 일이고, 행정 조직은 교회와 수도원의 교구조직을 원용하기도 했고, 그 외 유력자와의 협력으로 영토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것도 기사 서임식 때의 맹약이나 신종례에 의존하는 것이 고작 이었고, 큰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용병(傭兵)이 따로 필요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하면 이 시대에 나타난 특이한 제도, 즉 봉건제도(feudalism)라는 것이 형태면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 제국의 분열 조짐은 루이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테(Ermengarde)가 세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날 때부터(818) 시작되었다. 이미 루이 1세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Lothar 1 : 795?~855)에게는 황제로 대관시켜 왕국의 중심부를 주기로 하였고, 차남 피핀(Pippin : ?~838)과 3남 루이 2세(Louis Ⅱ: ?~875)는 변경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에르멘가르테 황후가 죽은지 4개월 후 루이 1세는 바바리아의 유디트(Judith)와 재혼하여 4남 칼 2세(대머리 왕, 영Karl Ⅱ,독 der Kahle, 프 Charles le chauve. : 823~877)를 낳았다(823) 이렇게되면 사정이 달라 진다.

 

당연히 그에게도 상속권이 있고 상속을 해주어야 한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루이 1세는 위(보)롬스(Worms)회의를 소집(829)하고 칼 2세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에 장남 로타르 1세가 받기로 되어 있던 제국의 중심부는, 4남 칼 2세의 등장으로 2명의 상속자가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 물고 물리는 추잡한 상속 싸움은 시작되었다. 이에 로타르 1세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830)  영토 상속문제는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이 1세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는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 1세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833) 아버지인 루이 1세를 퇴위시키고, 에르멘가르테의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칼 2세를 배제하고, 공정하게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공정하게 나누었다는 것은 서로간에 합의가 되었다는 뜻인데, 이 형편 없는 속물(俗物)들의 합의가 그렇게 오래 갈수는없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다시 싸움을 시작되었다.

 

차남 피핀이 부친 루이 1세와손을 잡고 로타르 1세에게 대항하자 호족들을 갈 길을 찾지 못하여 좌왕우왕 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테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은 확실하게 루이 1세를 지지하자,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로 도망 가고 사교들을 비롯한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 되었다. 그리고 루이 1세는 복위하였다(834)

 

(2)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탄생

 

그 후 몇 년 간 잠잠하다가 불평많던 아키텐(Aquitaine)의 왕,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이 1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유디트의 아들 칼 2세에게 주었다(838) 그러다가 루이 1세가 세상을 떠나자(840) 다시 상속 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 1세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 2세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유디트의 아들 칼 2세는 로타르 제국의 서쪽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부프랑크로로 분리되었고, 장자  로타르 1세가 죽고(855)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 2세와 서프랑크의 칼 2세가 메르센(Mersen)에서 조약을 맺고(870), 신의 재판(심판)이라는 이름으로 로타르왕국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출발이고 그 판도 역시 지금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칼 대제의 손자들은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이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는 로타르왕국이, 이어 911년에는 동프랑크가,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칼 대제의 왕통은 단절되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들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극복할만한 중심세력이 나타나지 못하자, 사람들은 자력 구제(페데)의 차원에서 소수단위로 뭉쳐 유력자에게 신탁(身託)하여 주종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진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다음 이야기 - 노르만인과 마자르인의침입과, 유럽 전기 봉건제도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