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괴물이었다"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은."
기원전 31년
지구 반대편 서쪽 지중해 세계에서 갤리선 500척 이상의 함선들이 맞붙은 엄청난 규모의 대형 함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해전은 두 거대제국의 충돌도 아니었고 단지 누가 권력을 쥐게 되느냐를 결정할 일개 공화국의 내전이었습니다.
후에 악티훔 해전이라 불리게 되는 이 해전에서 승리한 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입니다.
1. 내전 종결
당시 로마공화국은 위 사진에서와 같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외종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의 지중해 서부,
그리고 카이사르의 충신이자 전 군단장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이자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던 지중해 동부로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로마공화국은 이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을 시작으로 지중해 전체가 오랜시간 동안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악티움 해전은 로마인들에겐 지긋지긋했던 기나긴 내전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시민들은 환호했으며 저마다 이미 훌륭한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던 카이사르의 이 젊은 후계자를 찬미했죠.
2. 인류 역사상 최대 스케일의 연극(사기 행각) 개막
내전을 끝낸 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출마하여 공식 선언을 합니다.
"내가 부여받은 모든 권력을 다시 로마시민들과 원로원에 반환하겠다."
안토니우스의 병력까지 모두 흡수하여 이제 무려 40만 까지 불어난 대군의 총지휘관인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독재를 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20만으로 감축하고 그마저도 국경을 지키도록 변경에 주둔시킵니다. 대신 1만에 달하는 수도 근위대를 창설하여 수도의 치안을 강화합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호민관(거부권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지만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는 직책) 직책을 제외한 모든 권력을 내려놓겠다 선언하였고 당연히 옥타비아누스의 이 선언에 로마전체가 미친듯이 환호합니다. 로마공화국의 상징, SPQR(Senatus Populus Que Romanus:로마의 의회와 시민) 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듯 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렇게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공화정의 수호자, 공화국의 대들보로 보게끔 유도합니다.
3. 존엄한 자. 제1시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감동하여 그에게 "존엄한 자" 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라는 호칭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귀감이자 모든 시민의 본보기라는 뜻의 "제1시민" 프린켑스라는 호칭도 부여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며 그 자신도 이 호칭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넘어가 "내가 죽으면 이집트에 묻히겠다" 라고 얘기했던 안토니우스와는 달리 "죽어서까지 로마에 뼈를 묻겠다" 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영묘" 를 수도 로마에 건설하여 또 한번 로마 시민들을 감동케 합니다.
원로원 또한 다시 한번 감동하여 그에게 이미 국부인 카이사르가 받았던 명예인 달력에 이름을 올리는 명예를 부여합니다(현재 영어로 7월이 July 이고 8월이 August 인데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인 Julius 이고 August는 옥타비아누스의 호칭인 Augustus). 그리고 더 나아가 후에는 국부로서 "신격화" 됩니다.
당시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는 독재에는 거부반응을 보였었지만 신격화에는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내전에서 승리한 후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행보는 권력과는 무관한 "명예" 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그가 가지고 있는 "호민관" 이라는 직책 또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직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로마시민의 귀감인 "공익의 추구" 와 "독재는 멀리" 와도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이렇게 아우구스투스의 명예는 높아져 갔습니다. 물론 이 "명예" 라는 것 또한 로마시민들과 원로원이 계속 높여준 것임은 물론입니다.
4. 자문위원회
존귀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국익을 위해 토론하고 국가비상사태시 상대적으로 대처가 느린 원로원의 표결방식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또 하나의 자문기관인 "제1시민의 자문위원회" 를 창설합니다. 몇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입법가,행정가,기사계급등으로 구성된 이 자문위원회 또한 물론 아무런 공식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5.국고 관할
아우구스투스는 오랜 내전으로 인한 행정력 감퇴로 인해 국고가 텅 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이렇다 할 대책도 못 세우고 있었죠. 이렇게 국가재정이 마비상태가 되자 또 다시 구원투수로 등장,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재산을 풀어 기금을 만들고 공화국 각지의 각 속주에 군대기금을 만들어 국고의 부담을 줄이고 세제를 개편하여 순식간에 국가재정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국고관할권을 유능한 이들을 직접 선발하여 관리토록 합니다.
이렇게 또 한번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살립니다. 그의 명예는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6. 이집트
당시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자연적인 이점과 로마의 관개시설이 더해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최고의 곡창지역이었고 로마공화국의 식량 거의 절반은 이 이집트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집트를 비롯한 동부를 장악했었던 안토니우스가 지중해 세계의 식량을 장악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로마공화국 전체가 식량난에 허덕였었습니다. 내전에서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를 자신이 직접 장관을 임명하여 관리토록 하여 이집트를 자신의 속주로 삼습니다.
이 결정에 시민들은 또 다시 환호합니다.
원래 당시 로마세계에선 자신이 제패한 지역은 자신이 직접 보호자가 되는 것이 원칙이어서 이 원칙에도 완벽히 들어맞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먹을것을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보장해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7. 영토 확장
노란색이 원래 로마영토, 초록색은 아우구스투스가 넓힌 지역, 분홍색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보한 동맹국(사실상 조공국)
영토도 확장합니다. 로마시민으로서의 덕목인 "공익" 에 이어 지휘관으로서의 최고 덕목인 "군사적 역량" 까지 보여줍니다. 그가 확립한 시리아 국경선과 도나우 강 국경선은 향후 수백년 동안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제국은 비로소 폭발적인 번영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내전 종결, 국경 방위선 확립으로 인해 상업과 농업이 모두 안정적으로 원활히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이렇듯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평화와 질서, 번영을 가져다준 제1시민 으로서 모든 로마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8. 로마제국 초대 황제, 유럽 최초의 황제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 '에이~이게 무슨 황제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로마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 또한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으며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로마를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시민들 또한 여전히 자신들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수도 근위대 - 1만에 달하는 수도 주둔군은 단순히 치안강화(물론 훌륭히 치안 기능은 했지만)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에서의 어떠한 정적들도 제거할 수 있는 엄청난 정치적 압박 수단이었습니다.
2.이집트 장관 - 개인 관할지로 이 이집트 속주만을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물론 실제로도 그렇게 기능했지만) 사유지로 삼았지만 이 이집트는 당시 로마제국 전체 식량생산의 거의 절반을 생산해내던 지역이었습니다. 이것을 장악했다는 것은 로마시민들이 먹을 식량을 한손에 틀어쥐었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3.군통수권 - 40만 군대를 20만으로 낮추고 모두 국경방어로 돌려 군비는 감축하고 권력의 냄새는 없애며 방위력은 더 보강했지만 어쨌든 이 20만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였습니다. 40만은 어차피 유지하기에 너무 부담되는 수였으니 줄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20만이라는 수는 방위력은 유지하면서 어떤 국내 세력들도 제압 가능한 가장 적절한 수였습니다. 더구나 이 군비감축을 하여 시민들과 원로원의 환심을 사며 은근슬쩍 자신의 친위대인 수도 근위대 창설에 성공했습니다.
4.국고 관할권 - 물론 당시 국고는 전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당시 어떤 의원도 이 국고관할권을 장악하려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역량으로 이 국고를 다시 원상태로, 아니 더욱 더 강화시키는 수완을 발휘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국정운영의 가장 큰 관건인 조세권마저 장악했다는 뜻이었습니다.
5.호민관 직책 - 아우구스투스는 입법과 사법, 거부권을 모두 관장하는 당시의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 직위 대신 이 호민관 직책만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호민관의 "거부권" 이었습니다. 이것은 원로원의 어떤 결정도 가결될 수 없도록 하는 무서운 무기이면서 권력의 냄새는 나지 않는 치밀한 한 수였습니다.
6.자문위원회 - 처음에는 단지 제1시민과 함께 로마의 국익을 위한 토론과 의회에 좋은 정책들을 건의하도록 조언하자는 취지였지만 재위 후기 대에 이르러서는 원로원과 입법가,행정가,부유한 기사계급 등 점점 존귀한 아우구스투스의 명성과 매력에 이끌려 모든 권력계층의 엘리트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이 되었으며 결국 나중에는 입법권과 인사권마저 원로원으로부터 모두 뺏어오게 되어 완전히 황제의 "내각" 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7.명예 - 존엄한 자, 제1시민, 영묘 등등....이 모든 명예들은 로마시민과 원로원이 직접 부여한 것이고 권력과는 무관한데다 어디까지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공익" 을 위해 힘쓴 그에게 감사의 의미로 부여된 것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위에 열거한 수많은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자에게 신성한 권위마저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기에 열거한 모든 직위와 권한은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로마제국2대 황제)에게 세습되었습니다.
조세권, 행정권, 인사권, 군통수권, 수도치안권, 입법권, 거부권, 그리고 식량장악까지......거기다 이 모든 것들이 후계자에게 세습됩니다. 이것이 겉으로는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하며 뒤로는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제1시민의 진정한 정체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무려 5천만이 넘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며 앞으로는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하고 모든 인기와 명예를 누리며 뒤로는 모든 권력을 틀어쥔 당시 세계최강의 거대제국 전체를 무대삼아 한 판의 연극을 벌이며)
로마제국, 유럽의 초대 황제는 이렇게 페르시아의 샤, 중화의 천자, 초원의 칸 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나 사람들이 사실상 왕관만 안 썼을 뿐이지 그가 제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로 그는 그야말로 "무관의 제왕" 이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 모두 그가 죽은 뒤에나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하지 않았더냐? 박수를 쳐다오"
-임종 직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말-
출처: 아이러브사커 원문보기 글쓴이: 코비_메시_샤비_인혜
첫댓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라는 노골적인(?) 모습을 보여서 암살당해서 그런지 옥타비아누스는 본문에 나온거처럼 사기를 쳐야했죠
222 기분좋게 속이는데는 천재였죠.로마시민(아 공화정은 모르겠고, 우리삶 좀 해결해줘...)과 형식상의 공화정으로 남은 공화주의자(저항했던 공화주의자는 모두...)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죠.아우구스투스야 개인 야망이든 살아남기(?)위해서든 황제정을 열었지만, 반대로 공화정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실태가공화정을 해체의 원동력이라는건 아이러니 하죠.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하지 않았더냐? 박수를 쳐다오"-임종 직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말-명언이죠
거의 미래에서 타임슬립 해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로마 공화국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계획적으로 공화정을 무너뜨린 능력자가 아우구스투스지만 공화정의 한계때문에 한편으로는 그가 없었어도 아우구스투스만은 못하지만 결국 내전과 독재관의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정치의 신 아우구스트스
음 이미 원로원이나 시민들이 권력을 쥘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저것을 전쩍으로 믿었다는 것은 의문입니다. 시민들이야 나름 생계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기사나 귀족 원로원이 몰랐다는 것은 역사적 가작이라고 봅니다. 원로원 의원이 된다는 것은 그들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웅들인데 나이 어린 황제의 말을 몰랐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단지 원로원 의원들이 현실적 타협을 했을 뿐이고 실제 원로원 자체로도 황제권에 많은 제약이 있었고 후대 황제들은 명목상 싫든 좋든 시민들과 원로원의원들의 눈치를 살폈다는 것이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후계자를 설정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자 귀족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려다 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처벌받은 뒤에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을 사임했습니다.
역시 합법적 독재자로 가는길은 재밌고 멋져
이 특이한 성립이 로마가 망하는 그날까지도 공화제적 요소를 유지한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네요
저것들의 문제를 알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계층은 두차례나 와장창 갈려나가면서 거의 세력이 와해되었기에 가능한 사기극..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사기를 원로원이 몰랐던게 아니라, 이미 군사적으로 무력화되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시민들은 멀리보면 이미 마리우스 시절부터 반 원로원 세력이 되어있었던 것이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치적 유산 + 내전을 종식시켰다는 명분 + 군인들의 충성심 + 이집트의 사유화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경상도 전체를 그냥 사유재산화 이런식...). 정치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간헐적인 암살시도만 조심하면 진짜 무적인 상태였습니다.어떻게 생각해보면 이건 아우구스투스가 사기를 친것이 아니라, 매우 보수적이었고 로마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던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이 원해서 일부러 공화정의 형식을 최대한 지켜가면서 로마를 왕정으로 옮겨간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겠네요. 원로원도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을 보고 그나마 이게 났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현실타협을 했을 것이고요.
저래도 원로원은 팔레올로고스조때까지 살아남았으니..
첫댓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라는 노골적인(?) 모습을 보여서 암살당해서 그런지 옥타비아누스는 본문에 나온거처럼 사기를 쳐야했죠
222 기분좋게 속이는데는 천재였죠.
로마시민(아 공화정은 모르겠고, 우리삶 좀 해결해줘...)과 형식상의 공화정으로 남은 공화주의자(저항했던 공화주의자는 모두...)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죠.
아우구스투스야 개인 야망이든 살아남기(?)위해서든 황제정을 열었지만, 반대로 공화정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실태가
공화정을 해체의 원동력이라는건 아이러니 하죠.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하지 않았더냐? 박수를 쳐다오"
-임종 직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말-
명언이죠
거의 미래에서 타임슬립 해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로마 공화국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계획적으로 공화정을 무너뜨린 능력자가 아우구스투스지만 공화정의 한계때문에 한편으로는 그가 없었어도 아우구스투스만은 못하지만 결국 내전과 독재관의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정치의 신 아우구스트스
음 이미 원로원이나 시민들이 권력을 쥘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저것을 전쩍으로 믿었다는 것은 의문입니다. 시민들이야 나름 생계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기사나 귀족 원로원이 몰랐다는 것은 역사적 가작이라고 봅니다. 원로원 의원이 된다는 것은 그들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웅들인데 나이 어린 황제의 말을 몰랐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단지 원로원 의원들이 현실적 타협을 했을 뿐이고 실제 원로원 자체로도 황제권에 많은 제약이 있었고 후대 황제들은 명목상 싫든 좋든 시민들과 원로원의원들의 눈치를 살폈다는 것이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후계자를 설정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자 귀족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려다 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처벌받은 뒤에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을 사임했습니다.
역시 합법적 독재자로 가는길은 재밌고 멋져
이 특이한 성립이 로마가 망하는 그날까지도 공화제적 요소를 유지한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네요
저것들의 문제를 알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계층은 두차례나 와장창 갈려나가면서 거의 세력이 와해되었기에 가능한 사기극..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사기를 원로원이 몰랐던게 아니라, 이미 군사적으로 무력화되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시민들은 멀리보면 이미 마리우스 시절부터 반 원로원 세력이 되어있었던 것이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치적 유산 + 내전을 종식시켰다는 명분 + 군인들의 충성심 + 이집트의 사유화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경상도 전체를 그냥 사유재산화 이런식...). 정치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간헐적인 암살시도만 조심하면 진짜 무적인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건 아우구스투스가 사기를 친것이 아니라, 매우 보수적이었고 로마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던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이 원해서 일부러 공화정의 형식을 최대한 지켜가면서 로마를 왕정으로 옮겨간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겠네요. 원로원도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을 보고 그나마 이게 났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현실타협을 했을 것이고요.
저래도 원로원은 팔레올로고스조때까지 살아남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