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미에 꿰인 개구리가 웅덩이에서 1년을 살았다 !!
필자는 고적(古蹟) 유적지(遺蹟地) 답사에 취미가 있어 열심히 다녔다. 특히 전남 광주에 6년 있으면서 호남지방의 역사유적지를 많이 답사하였다.
아래에 기억에 남는 특이한 유적지 몇곳을 소개한다. 약 50년 전이라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져 매우 아쉽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어 보관을 못한 아쉬움이 많다. 그리고 이처럼 늙을 줄 몰랐다 !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개구리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어떤 역사기록에는 신라의 승려라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의 승려라 적혀 있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출가전 이름은 “석진표(釋眞表)”라 하였다. 석진표(釋眞表)는 집이 금산(金山)이다. 가문 대대로 사냥을 해와 진표(眞表)도 활을 잘 쏘았다.
하루는 사냥을 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쉬고 있었는데 눈앞 연못에서 개구리가 놀고 있었다. 석진표(釋眞表)는 개구리를 보고 버들가지를 꺾어 꿰미를 만들어 개구리를 잡아 꿰매었다. 사냥이 끝나면 가지고 가기 위해 물속에 넣어두었다. 구워먹기 위해서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개구리 메뚜기를 꿴 꿰미를 만들었다)
진표(眞表)는 산으로 들어가 사냥을 하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개구리를 꿰미에 꿴 일을 완전히 잊었다.
다음해 봄에 또 사냥 나가던 길에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연못에 가보니 지난해 꿰어 놓은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뀐채 아직도 살아 있었다.
진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몹시 한탄하며 자책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아뿔싸 어떻게 내 입과 배를 채우자고 저 생명이 있는 개구리들을 한 해가 지나도록 꿰미에 꿴 채 고통 받게 했단 말인가.”
진표는 얼른 버들가지를 끊어 조심스럽게 풀어주었다. 이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인생의 뜻을 불교에 두어 출가(出家)하였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침략자 신라의 꿰미에 꿰여 있는 백제 유민(遺民)들의 처지가 그가 꿰어 놓은 개구리들과 같다는 생각에 심각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진표(眞表)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까봐 허락도 받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스스로 칼로 머리칼을 잘라 출가한 다음 신체에 극한적(極限的)인 고통을 주는 참회법(懺悔法)으로 불교의 계법(戒法)을 구했다 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출가(出家)하고 나서도 개구리들이 고통 받았던 만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그 심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보상적(報償的) 수련에 몸과 정신을 바쳤다고 한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