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촌 오르트 씨 [한영미]
서녘의 거대한 빌딩 사이를 태양이 돌며 공놀이를 시작해요
궤적이 붉은 속도를 따라가느라, 방들은 손가락 사이로 매달려요 얼음덩이 같은, 먼지덩이 같은 창문들이 궤도 밖으로 밀려나 배경으로 남아 있어요 골목의 감정은 매번 다르지만, 모서리를 깎은 계단은 어디서나 높은 곳을 향해 몰려들어요 가 닿지 못하는 체념이 전봇대에 걸쳐져 있어요 담장을 층층 올라가는 짓무른 이끼들,
어제의 희망 속엔 비 내리는 날이 많았지만, 단지 악천후였다고 요약되는 막다른 길목에 서 있어요 바깥의 얼굴로 띠를 두른, 창문 없는 쪽방이 내겐 주소에요 경사면을 짚으면서도 나선의 사다리처럼 천천히 올라가는 거라고 믿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겐 쉽게도 여닫히는 벽은 절취선을 감춰둔 문이 분명해요
간혹 눅눅한 침묵과 악다구니가 소행성처럼 스쳐 지나도 한 번 튕겨 나간 꿈은 되돌아오지 않았어요 더 이상 갈 곳 없는 종점, 이곳을 오르트 구름존이라고 불러요 빙그르 돌며 태양은 오늘도 마지막 공놀이를 하고 있어요 능선에 탁 내리쳐질 때마다 몰려든 어스름이 튀어 오르고, 부딪히고
하지만 여긴, 너무나 멀어서 기억조차 희미한 외곽의 일이겠지요 이제 그만 나를 잊어도 괜찮아요
-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