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鷄肋]" 조성민이 끝내 프로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본인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가 8개 구단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재기하는 모습을 보기란...글쎄요...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어찌된 일인지 "스포츠 와이드"에서 보다는 "연예가 중계"에서 그의 모습을 더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때부터 그의 "추락"은 예견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야구 실업자"로 전락해 버린 조성민도...구위를 잃고 2군으로 쫓겨간 임선동과 일찌감치 마운드를 떠난 손경수도...부진을 거듭하며 "먹튀" 대열에 합류해버린 박찬호 역시...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92학번 동기들로, 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당시 이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인들의 뇌리 속에는 말이죠.
< 92학번 트로이카의 등장 >
1991년 여름, 제 21회 봉황대기 고교야구 8강 전에서 두 명의 까까머리 고교생이 팬들의 관심 속에 맞대결을 펼칩니다. 바로 신일 조성민과 휘문 임선동 이었죠.
임선동은 조성민을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고, 신일은 여세를 모아 봉황대기를 품에 안습니다. 조성민은 "최우수투수상"과 "홈런상"을 수상하는 등, 투타에서 발군의 활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초고교급 선수로 우뚝 서게 되죠.
임선동은 이미 대통령배 1회전에서 무려 20개의 탈삼진을 기록. 야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3년 전 인가요? 류제국이 탈삼진 20개를 기록한 기억이 납니다만...)
위의 두 투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손경수 입니다. 사실 당시의 박찬호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처지였고,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의 출현은 <92학번 트로이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실 "트로이카"의 원조는 77학번... 흔히 <개띠 삼총사>라 불리우던 최동원, 김시진, 김용남 이었습니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며 고교야구의 붐을 주도했었습니다.
이들 <77학번 트로이카>가 T.K(김시진)-P.K(최동원)-호남(김용남) 으로 소위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었다면, <92학번 트로이카>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게 특징이었고 이들을 양 손에 쥔 서울의 두 팀(LG와 두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습니다.
이미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손경수지만, 고교 때의 평가로만 보면 조성민을 능가하는 대형투수였습니다. 당시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는 임선동-손경수-조성민 순 이었죠. 하지만 팬들에게 가장 어필한 선수는 조성민이었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예인을 능가하는 잘 생긴 외모가 한 몫을 한 건 물론이었구요. (제가 생각하기엔 역대 스포츠맨 중에서 가장 잘 생기지 않았나 싶군요)
그 바람에 혹자는 조성민이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 되었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궁색한 질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팀을 전국대회 2관왕(봉황대기/ 황금사자기)으로 이끌며 '최우수 투수상'을 연거푸 수상하는 기염을 토해내는 반면, 임선동과 손경수는 팀에 우승을 선사하지 못 하고 무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92학번 트로이카>의 화려한 등장은, 야구계는 물론 팬들에게도 크나 큰 축복이었던 셈입니다.
- 풍운아 임선동 -
육중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적인 직구와 슬라이더로 이미 고교 때부터 "제2의 선동렬"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임선동...트로이카 중에서도 단연 랭킹 1위로 꼽히던 그는, 주사위 대결에서 승리해 우선권을 쥔 LG로부터 1차 지명을 받지만 연세대로 방향을 틉니다.
명불허전~! 1학년 때부터 이미 1년 선배 문동환과 쌍두마차를 이루어 연세대를 최강으로 이끈 그는, 졸업과 동시에 LG행을 거부하고 실업팀 현대 피닉스와 계약 한 뒤 이번엔 일본프로야구 다이에와 1억 5천만엔에 입단계약을 맺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덕분에 LG와 지루한 법정 싸움이 시작되고 법원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인정해 그의 손을 들어주지만 이번엔 다이에가 그를 포기하고 말았죠. 결국 임선동은 7억원이라는 당시로선 엽기적(?)인 계약금을 받고 LG유니폼을 입습니다.
그의 기량 만큼이나 요란했던 프로입단~! 그의 이름 앞에"풍운아"란 수식어가 붙게된 것도 이 무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서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임선동과 LG의 궁합이 맞을 리 없었겠죠. 1997년 4월 15일 해태전에 선발 등판, 지대한 관심 속에 데뷔전을 갖지만 5.2이닝동안 안타 7개(홈런 1개 포함), 4사구 4개를 허용한 끝에 6자책점으로 무너지며 거물급 투수의 "데뷔전 징크스"를 예외 없이 이어가게 됩니다.
97년에 11승으로 그나마 체면치례를 해 낸 임선동은 이듬해 단 1승에 그치며 추락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안병원+ 7억원>에 현대로 트레이드 되며 LG와 지루하게 이어 온 <적과의 동침>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현대 유니폼을 입은 임선동은 <투수 조련의 달인> 김시진 코치를 만난 후, 마침내 이름 값을 해내기 시작합니다.
김시진 코치는 "네가 내 지시대로 따라만 준다면 아마 때의 기량을 되찾게 해주겠다"며 그를 독려했고, 개성 강한 그 역시 김시진 코치 앞에서는 절대 복종하며 운동에 전념...2000 시즌 다승왕에 오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거죠. LG입장에서 보면 이가 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김시진의 투수코치로서의 능력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한번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2001시즌 후반기를 기점으로 그는 점차 하향세로 접어듭니다. 이듬해 10승에 실패하더니 지난 시즌부턴 아예 1군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랩니다. 부상의 영향도 있겠지만 중요한 시기에 법정공방 등으로 생겼던 공백이 치명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강한 개성에서 비롯된 "튀는 행동"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도 하구요.
- 조성민의 명암(明暗) -
굳이 순번을 매긴다면 No3 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성민은 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수였습니다. 그만큼 프로에서 탐 낼만한 구매요건을 갖춘 셈이었죠.
신일을 2관왕으로 이끈 그는, 다른 선수들이 프로팀과 몸값 흥정을 벌인 것과는 달리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선언해버립니다. 1차 지명 우선권을 쥔 팀이 자신보다는 임선동을 선택할 것이 확실했던 만큼, 자존심이 상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바램대로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화려했던 고교시절에 비해 다소 주춤거리는 모습이었고 팀의 에이스 자리도 후배 손민한 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제 몫을 해냅니다. 다만 제가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라는...^^)
하지만 그에겐 주어진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스타성'과 '병역면제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국제대회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며 미,일 구단의 시선을 잡아끌던 그는, 95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대회 쿠바전 에서 역투하며 일본열도에 "조성민 신드롬"을 일으키게 되죠.
국내구단의 지명을 받지 않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그를 잡기 위해 급기야 요미우리에 양키즈까지 스카우트전에 뛰어들고, LG와 OB는 물론 희대의 '유령구단'(?) 현대 피닉스 역시 6억원이라는 초유의 거액을 내걸고 이에 동참합니다.
결국 그는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게되는데, 단순한 용병이 아닌 차세대 간판 스타로서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당시 요미우리 스카우트 팀의 분석으론, 임선동 보다는 실전에 더 통할 선수라는 평이었고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외모에 의한 "스타성"에서 후한 점수가 매겨졌던 것으로 보여지는군요.
조성민은 "신데렐라 보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언론의 호의적인 반응 속에 C.F에도 출연하는 등, 일본무대에 순조롭게 적응해 나갑니다. 구단 역시 "조성민 스타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죠. 특히 여성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입단 3년째 선발로 전향한 조성민은 에이스로 급부상 합니다. 전반기 7승 가운데 세차례 완봉승을 포함 5완투승...한동안 1점대 방어율로 리그 1위에 오르기도 하죠. 재미있는 건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0.333의 고 타율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사실 그는 고교 때부터 타격에도 일가견이 있었죠)
이런 활약으로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지만 일본 특유의 배타적인 성향이 그를 비켜 가진 않았습니다. 갑작스레 로테이션이 변경되는 등 그에 대한 견제의 징후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설상가상...무리한 투구로 팔꿈치 부상을 입어 급상승에 제동이 걸립니다.
이후 재활의지를 불태우던 조성민은 2000년 6월, 톱스타 최진실과의 결혼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번 화두로 등장하는데...대부분 야구와 관련 없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결국 부상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스스로 요미우리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 '제 2의 인생'을 준비하지만 파경 등의 이유로 이마저도 순탄하지 않았죠.
지금은 비록 2차 지명 60여명에도 들지 못하는 신세로 바뀌어 있지만, 그가 요미우리에서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애국가가 연주되고 (등판 음악으로 강력히 요구했다는군요.) 팀의 관례인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 사실은 아직도 훈훈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비운의 스타 손경수 -
그렇게 잘 던지던 투수가 어쩌다...
손경수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게 되는데, 고교 때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를 랭킹 1위로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상당했을 만큼 기대를 모았던 투수였지만, 불운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 다녔던 것 같습니다.
경기고와 홍익대...그가 몸담았던 팀은 언제나 우승권 밖에 있었고, 약팀의 선수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짐을 덜어 줄 '조연'이 없었다는 것 역시 혹사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했구요. 어려운 가정형편 또한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손경수는 25회 대통령배 4강 전에서 신일 조성민과 맞대결을 펼치지만, 전력의 열세를 실감하며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저 역시 대통령배에서 그의 투구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당시의 느낌으론 변화구 구사능력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직구의 묵직함은 임선동이나 조성민만큼은 아니었지만, 제구력은 더 나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언젠가(봉황대기였던가요?) 퍼펙트 게임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는데 7횐가 8회 콜드게임으로 끝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만 기억이 나는군요. (퍼펙트 게임을 한 건 분명하지만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진 않았던 거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모습을 자주 접할 순 없었습니다. 좀 더 강팀에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말이죠. (당시 손경수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좀 거들어 주시길...^^)
그는 졸업과 동시에 OB에 1차 지명되지만 홍익대로 진학합니다. 여기에는 여느 초고교급 선수와 마찬가지로 스카우트 분쟁이 뒤따랐음은 물론이구요.
원래 손경수는 고교시절 LG와 비밀리에 입단계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우선권을 쥔 LG가 임선동을 지명하자 OB가 그를 지명해 버리죠. 결국 홍익대에 둥지를 틀지만 프로와 아마에 양다리를 걸친 셈이 되어 이른바 '괘씸 죄'에 걸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91년 한미일 친선 야구대회> 대표로 선발되었다가 중도 탈락하게 되고 박찬호가 대신 뽑히는 행운을 잡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광속구를 뿌려댄 박찬호가 빅리그 스카우터들의 눈 도장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니...인생사 정말 모를 일입니다.
이렇듯 스카우트 분쟁 끝에 대학진학을 선택한 그였지만, 병상에 있던 부친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홍익대를 중퇴하고 93년 12월 OB와 입단계약을 체결합니다. 제 발로 찾아갔으니 몸값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였죠. 계약금과 연봉 합쳐 9천만원...당시로선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훗날 임선동과 조성민의 몸값을 놓고 볼 때 터무니없는 '헐값' 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OB 유니폼을 입은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손경수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컸던 탓인지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자기관리 실패와 간염까지 겹쳐 1군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가고 말았죠.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에필로그 >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이른바 <92학번 트로이카>는 화려했던 옛 기억만을 남긴 채 팬들의 기억 속에서 쓸쓸히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반추락'을 지켜보며 이토록 안타까운 건...비단, 저 뿐만은 아니겠죠.
스카우트 분쟁, 부상, 자기관리 실패 등...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직 한창나이의 그들을 마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건, 야구팬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아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재기에 성공하는 선수를 본다는 건...스포츠가 주는 또 다른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성민의 2차 지명에 대한 득실을 따져 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마운드 복귀를 바라는 그에게 비아냥이나 냉소보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을 뿐입니다.
그의 '재기를 향한 몸부림'이 좋은 결실을 맺길 바라며, 어느 팀 유니폼을 입고 있든지 다시 한번 마운드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아울러 박찬호 선수의 화려한 부활 역시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지루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 덧붙이기 #
*그러고 보니 92학번엔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네요. 가히 프로야구 판의 최대 계보로 불릴 만큼...
이들 트로이카 외에도 워낙 좋은 재목이 많이 등장했던 시기라 "넘버4" 를 가리기가 쉽지 않지만, 굳이 꼽자면...당시로선 박찬호보단 경남상고의 2관왕을 이끌었던 곽재성을 들 수 있겠는데..."빅3" 와는 달리 프로(롯데)로 직행하지만 2군을 전전하다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빅3가 워낙 거물이었던 관계로 LG나 OB는 1차 지명에서 대졸 선수들을 제쳐 두고 당시 고교졸업 예정이었던 임선동과 손경수를 지명하게 되는데...이로 인해 가장 큰 손해를 본 건 바로 동봉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당시 서울연고 야수들 중 발군이었던 동봉철이 무난히 서울 팀의 1차 지명을 받을 것으로 봤습니다만...
결국 동봉철은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보란듯이 맹활약을 펼칩니다.
◇당시 1차 지명 현황
▲해태=박재홍(광주일고)▲삼성=김태한(계명대)- 1차지명을 양보한 양준혁은 상무를 거쳐 결국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습니다 - ▲빙그레=지연규(동아대)▲태평양=정민태(한양대)▲롯데=강성우(단국대)▲LG=임선동(휘문고)▲OB=손경수(경기고)▲쌍방울=방극천(원광대)
첫댓글 마치 무슨 드라마 내용 같군요...근데 정민태랑 임선동이랑 동기였어여? ..하튼 찬호 성님이 언넝 재기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죠 정민태 한양대 88학번 임선동 연대 92학번 민태가 4년선배죠
^^
이야...이런 일이있었군여...재밌네여..^^
잘생긴 스포츠 스타하면 최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