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총선 때 투표를 안 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찌 됐든 각설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선거 유세장을 가본 적이 있다. 장소는 면소재지 초입에 신작로와 접하는 작은 언덕이었다. 하교 하고 갔을 때는 당시 유세장 풍경이 대개 그러했듯이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통으로 가져와서 몇 순배 돌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간 거였는데 그날 그곳에 온 후보는, 바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래가 없는 '여장남자' 국회의원! 김옥선이었다!! 어른들 얘기만 듣고 속으로는 '진짜 여장남자 국회의원이 있어?'하면서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확인차원에서 악수까지 했는데 그 손의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바위가 내 손을 부여잡는 것처럼 딱딱하고 뜨거웠는데 속으로는 또 '와 완전 남자네?' 하며 놀랬던 기억이 있다. 이분은 내 고향인 서천 토박이 출신에다가 특히나 독재에 항거하다 투옥당하고 얼마 지나 정치해금이 되어 돌아온 민주투사여서 그때 선거에서 시원스레 당선하게 된다. 선거 포스터에 당당히 '정치해금 정치인'이라는 문구를 박아넣었는데 직접 관계는 없지만 나중에 이 해금이란 단어가 KBS 코메디 프로그램인 유머1번지에서 쓰인 적도 있다. 해금가요를 틀어주겠다고 하고는 진짜 악기 해금을 갖다 놓고 연주하는 걸 보고 나름 실소하면서 웃었었다. 첨언하자면 이 글 쓰면서 이분 요즘 뭐하시나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더니 집행유예중 사기혐의로 구속되었다는 몇년 지난 기사가 나온다. 헐.. 어쩌다 그 지경까지 되셨는지 알 수는 없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 올라와서는 뜨악했던 게 있다. 어디 친구집 놀러가면 발에 채이도록 흔하게 목격되는 '국회의원 김XX '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힌 드라이버 세트였다. 당시 말그대로 가정 상비품인양 집집마다 굴러다니고 있었다. 선거 전에 이걸 돌렸다면 당연히 유권자 매수이고 당선 후에 돌렸다 해도 이건 당선 사례금을 직접 유권자에게 돌린 매수 행위에 속한다(적어도 내 생각에는). 대명천지에 버젓이 이런 매표행위를 할 거면 선거를 왜하나 싶기도 했는데. 특히나 이 사람의 소속당 족보를 따지자면 현재 새누리당의 고고조할아버지쯤 되면서 독재 잔당의 후신이어서 별로 탐탁치 않기도 했다. 첨언하자면 이 사람 와이프가 나름 유명한 패션디자이너 '이XX' 였고 좀 잊고 지내나 싶었는데 십몇년 뒤 만난 여자친구가 이 디자이너의 옷을 또 좋아했었다. 이 부부. 아마 내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지난 대선도 코메디 같은 부분이 많았다. 747공약 정도는 뭐 망상허언쯤으로 웃어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전재산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얘기에 이르러서는 '와 현대에 성녀처럼 떠받들어지는 민주주의가 또 여기서 이렇게 능욕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돌려서 생각해보자면 국회의원이 당선되면 지역구민들에게 한 턱 쏘겠다는 것이고 학교 반장 당선되면 학급에 짜장면 돌리겠다는 얘기 아닌가. 또 문제는 이것이 마치 후보자의 도덕잣대양 여겨져서 다음 대선에서도 순수함에서든 울며겨자먹기식으로든 재산 헌납 운운하는 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대통령 선거를 70년대 시골 이장선거의 풍경으로 단박에 바꿔버렸으니, 이때 이미 잃어버린 10년은 우리 앞에 성큼 와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 18대 총선에서는 희대의 인물이 우리 지역구에서 나왔었다. 그 유명한 강용석이다. '그래도 할말은 했습니다' 라는 이 사람의 이번 선거 캐치프레이즈를 보고 '정신병자는 시대나 지위고하를 초월해서 어디에든 있다 '라는 주지의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웃긴 건 이 괴물의 탄생배경이 드라마틱하고 심지어는 바로 우리 집 옆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내던 열린우리당 출신의 정청래의원 사무실이 바로 우리집 옆이었다. 당시에 문방위 소속으로 열심히 활동을 했었는데 이 분이 장자연 사건(세금탈루일수도.. 가물가물)에 대한 의혹제기와 함께 ㅈ일보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었다. 이건 뭐 문방위 소속이니까 당연한 활동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8대 총선에서 ㅈ일보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이른바 '정청래후보 교장 폭행사건!'. 어느 유세장에서 정후보가 학교 교장을 폭행했다는 게 내용인데, 이렇게 연일 굵은 볼드체로 대서특필하고 피를 토하 듯 장문의 사설을 써대며 무소불위의 필봉을 휘두르니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당연히 낙선하고 만다. 그 자리를 바로 강용석이 꿰차게 된다. 그리고 총선이 끝나자 얼마 지나서 ㅈ일보는 오보였다는 정정기사를 신문 모서리에 1단짜리 성보조기구 광고 정도의 크기로 실으면서 조용히 복수극을 마무리 한다. 괴악스런 인물의 탄생 과정도 이처럼 괴악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나간 4년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행히 청정래 의원은 이번 국회에 복귀하게 된다.
이번 총선 결과를 그래프화한 지도를 보면 이건 레드컴플렉스나 지역감정의 수준을 넘어서 신삼국시대의 출현 내지 여제 옹립을 위한 지방토호세력의 발흥에 가까운 듯 싶다. 헐...
여기 까지는 옛날 생각나서 주절주절 쓴 것이고 아무튼.
어제 연습을 보았는데 배우분들하고 얘기도 많이 못해보고 괜히 스트레스만 더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해서 집에 돌아오는데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집에 와서도 가시질 않아 맥주 캔 따면서 연습일지를 보는데 나름 재미가 있다. 뭐랄까 공연일지는 정사이고 배우일지는 야사의 느낌이 든다. 배우일지 길게 써주시면 정말 재미있을 듯.
배우, 스탭님들 고생 많으시겠지만 힘내십시오. 화이팅입니다.
첫댓글 너도 화이팅이다~!
ㅎㅎㅎ
오빠가 이런 글을 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