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과 명성대비가 이윤(경종)의 원자 책봉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는 드라마 <동이>의 이야기는 역사적 실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윤이 출생한 때는 숙종14년(1688) 10월 27일이었다. 그리고 명성대비가 사망한 시점은 숙종9년(1684) 12월 5일이었다. 이윤이 출생하기 몇 해 전에 명성대비는 이미 사망했던 것이다.
숙종이 이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 당파가 들고 일어났다. 서인들은 장희빈의 아들이 다음 보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때 이윤의 세자 책봉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은 서인 영수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상소를 통해 이윤의 세자책봉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 일은 도리어 그의 운명을 종결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숙종은 그의 상소를 거부했고, 송시열은 같은 해 6월 3일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숙종16년(1690) 6월 16일 이윤은 드디어 세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송시열이 장희빈에게 패배한 이 사건을 관찰해보면, 조선 후기 정치투쟁의 흥미로운 먹이사슬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 먹이사슬은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의 재위기로부터 시작한다. 형인 소현세자가 집권당인 서인의 견제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 왕위에 오른 효종(봉림대군)은 취약한 정통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왕권강화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기득권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중앙군 확충을 추진했고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기득권층의 호주머니에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종에게 맞선 기득권층의 대표주자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과 효종은 본래 사제지간이었지만,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적 사안에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갈등을 풀기 위해 개최된 효종10년(1659) 3월 11일의 효종-송시열 비밀독대가 결렬됨에 따라 정국의 긴장은 한층 더 첨예하게 고조되었다. 비밀독대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5월 4일에 효종이 41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급서함으로써, 두 사람의 대결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나고 기득권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런데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승리는 그로부터 15년 뒤에 송시열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현종 사망연도이자 숙종 즉위연도인 1674년에 제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송시열이 국왕(효종)을 모독했다며 그를 귀양지로 내몬 것이다. 비밀독대 때에 송시열은 병력증강사업을 지지해달라는 효종의 간청에 대해 마음공부나 먼저 하라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효종이 죽고 효종의 정책도 무산되었으니, 적어도 정치적 측면에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죽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효종을 모독한 불충의 신하라는 정치적 공격을 받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거물 송시열이 장희빈 모자 때문에 사약을 마시게 되었으니, 송시열이 뛰는 놈이라면 장희빈은 나는 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나는 놈을 잡아먹은 장본인이 최숙빈이었다는 점이다.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아예 저승으로 보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이 바로 최숙빈이었다는 사실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 그 자리를 최숙빈의 아들(영조)이 채웠다는 사실은 효종-송시열-장희빈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다음 자리에 최숙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희빈은 세자책봉 싸움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고꾸라뜨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뒤이어 출현한 최숙빈이라는 다크호스를 막아내지 못해 자신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