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국의 ‘난’이란 지역에서 왔습니다. 현지인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를 정도의 오지로 농촌과 산촌의 특색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처음에 저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7년 정도 동안 언어를 배우는 한편, 가르치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방콕이나 치앙마이 같은 대도시에는 선교사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다른 지역은 선교사가 부족한 모순적인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조직이 정비되고 안정될 때 쯤 저는 기도와 답사 끝에 2014년 난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다시 8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난에서 저희는 소소하고 낭만적인 선교지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작년 중반쯤 제 맘이 달라졌음을 보았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자랑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것이 마치 명분이라도 된다는 듯이 변명의 구실로 삼기도 했습니다. 속으로는 도시 생활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겸손한 척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과 비교해서 없거나 혹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3대 사역에 관해 설명합니다. 회당 사역과 전도 사역과 치유 사역이 그것입니다.
난은 태국에서 5번째로 선교국이 세워진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있는 교회는 절반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들을 돌며 열심히 사역을 해 왔습니다. 오랜만에 교회들을 방문을 하게 되면 그간 미뤄왔던 세례식이나 성찬식을 진행합니다. 성도들이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만 다시 손을 봐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성도들의 집에서 유숙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저도 전도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협력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루는 노회장님이 제게 산 속 깊은 마을에 주를 믿는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예배할 처소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국에 귀국할 일이 생겼습니다. 파송교회 담임목사님께서 교회 설립 40주년 기념으로 교회를 더 세우고 싶은데 적당한 곳이 있냐고 물으셨고 저는 이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국에 메싸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은 병을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병 고치는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가장 비슷하게나마 아픈 사람을 심방하고 있습니다. 난에서는 그냥 보건소에서 약을 먹어도 될 것 같은 증세에도 저를 보면 다짜고짜 기도해 달라고들 하십니다. 심지어 손을 이끌고 집으로 데려가면 환자가 병석에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기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사역은 바로 장례를 돕는 것으로 7년간 진행한 장례식만해도 약 200회가 넘습니다.
예수님께서 3가지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감히 견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 역시 부끄럽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예수님과 같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보람은 있었지만 피곤했고 생각 이상의 요구를 받으면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을 읽게 되면서 저의 문제점을 발견했고 이에 요즘은 초심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양을 치는 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양이었습니다. 냄새나고 분별력이 없으며 고집 센 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셨습니다. 내 안의 불만, 피해의식, 보상심리 등은 내가 양이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나 역시 구제불능의 양인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꼐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명령하십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제자들을 통해 이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 내 것을 거져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멸시와 미움을 받는 상황을 견디는 것도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교회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사랑과 열정과 정성이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저희를 이 곳에 있게 하신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