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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9일자의 조갑제 기자의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글에는 반론이 불가피한 첫번째
이유는 이 글은 노골적으로 탈북자들의 발언권을 탄압하는 글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조갑제 기자의 이 글은 2006년도의 한 탈북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함으로써 시작된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조갑제 기자는 늘 이 말만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은 100 퍼센트 정확할 수도 있고 1 퍼센트 틀릴
수도 있다. 만약 이 말의 요지가 광주사태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이라면 이 말은 백 퍼센트 사실이다. 광주사태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납북된 이래 광주사태 당시 여전히 북한에 있었던 남한 여배우 최은희의 증언이기도 하다.
몸은 납북되었지만 김정일의 특별 대우로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던 최은희가 “내가 여자지만 가장이고 가르치는 학생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사람을 무작정 끌고 올 수 있느냐”는 따지자 김정일의 부관은3년 있으면 남조선 해방하고 갈텐데 3년만 기다리라고,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하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 말 들은 지 3년째 되는 1980년에 그녀는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 “는 뉴스를 유심히 듣고 있다가 훗날 탈출한 후 방송에 출연하여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지난 5월 15일 종편 채널A의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탈북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5월 21일 목포 해안으로
침투하여 23일 광주에 도착하였던 탈북자는 당시 남한에 침투된 공작조의 임무는 무장봉기가 전라도 전 지역과 서울로 확산되게 하고, 서울로 봉기가
확산되는 즉시 북한군이 남침한다는 것이었다. 황석영의 책에도 5월 21일 오전 불과 4시간만에 전남 38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직후
시민군의 첫 작전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음을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날 오전,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전주, 서울
방면의 진출을 시도했던 시위대들은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자 그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 도내 각 시, 군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황석영 1985, 211).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운동권 진영에서는 5.18 교과서로서 추앙받는 책이다. 이 책 211쪽에서 황석영은 5월 21일
오전 9시 시위대가 아세아 자동차공업사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과 지프차 등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한 본래의 목적은 광주에서 쓰려던 것이 아니라,
먼저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그것이 5월 21일 오전의 시민군 작전 목표였다. 단지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아 서울로 진격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21일 서울이 아니라 광주에서 먼저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작전이 수정된 것뿐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가 서울로 진격하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총 들고 서울로 쳐들어가서 무엇 하려 했었던 것인지
우리가 물어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황석영만 시민군 작전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북한이 시민군 작전을 알고 있었으며, 시민군 군용트럭들이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 방면으로
진출하던 순간 북한의 모든 방송 매체들은 그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으며, 여배우 최은희도 마음 졸이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 “는 뉴스를 들었다. 종편의 시사방송에 출연한 탈북자들이 그 날 들었다고 하는 뉴스가 바로 그 뉴스이다.
황석영의 책과 최은희 의 증언으로만 어렴풋하게 알려졌던 사실이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이처럼 명확하게 입증되었는데, 도대체 그 진실을 입막음하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황석영이 기록하고, 최은희가 듣고,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이 사실은 5.18 기록물들과 시민군들의 증언으로 확증되는 사실이다. 윤상원이 “닷새만
기다리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닷새만 기다리면 봉기가 서울로 확산되어 시민군이 승리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최은희가 들은 대로
1980년 적화통일을 완성시키려던 북한의 전략도 시민군이 승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시민군의 본래의 전략은 5월 21일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20일 밤 광주역 전투가 그토록 치열하였던 이유도 열차를 확보하려 함이었으며,
시민군이 송정리 비행장 마저 노려 미대사관이 미공군 가족들을 급히 대피시켜야 만 했던 이유도 시민군의 본래 작전이 5월 15일 밤 서울역
회군으로 인해 접수에 실패한 청와대를 접수하려 함이었다. 그 작전이 계엄군의 강력한 제지를 받자 광주교도소 습격과 전남도청 접수 및 전라도
일대로 무장봉기를 먼저 확산시키는 것으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 세력을 키운 다음
다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광주사태 당시 5월 23일부터 광주에서 대남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한 탈북군인이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증언한 사실이요, 5.18 기록물들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는 사실이다.
광주사태에 북한 세력의 개입이 있었는가? 이제 그것은 그 누구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이다. 조갑제 기자가 매번 인용하는
2006년도의 한 탈북자의 말도 북한 세력의 개입이 분명 있었음을 강조한 말이라는 점에서는 100 퍼센트 사실이다. 다만, 그 표현에 1
퍼센트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조갑제 기자가 지난 7년간 꼬집고 또 꼬집는 것이 ’1개 대대’라는 단어이며, 그 탈북자가 ’1개 대대’를 ‘300명’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조갑제 기자의 주장은‘300명’이라는 숫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6년에 한 탈북자가 그 증언을 하기 12년 전인
1995년도 검찰보고서에서 먼저‘300명’이란 숫자가 언급되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바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서울지방검찰청 1995, 92-93).이처럼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 도합 6백여명이 21일 오전 최초로 출현한 시민군이었다고 검찰보고서는 기록한다. 이6백여명이 황석영의 책에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했던 시민군이요, 바로 그 시간 최은희가 북한의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에서 듣고 있던 봉기군이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에서도 3백명 단위의 시민군은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2006년 한 탈북자가 3백명이란 표현을 쓴 것이 큰 오류였겠는가?
2013년 5월 19일 역사학도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612411385438774&l=c5efc66e34
http://cafe.daum.net/issue21/3IBb/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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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분석이십니다...퍼 가도록 할께요...^*^...
네, 많이 퍼가세요...^*^...
역사학도님. 중요한 내용은 누가 그 연고대생 600명에게 1급 군사기밀인 20사단 작전명령서를 알려 주었냐는 겁니다. 계엄하에서 군작전이 연고대생 600명에게 알려져 그들이 행동을 개시를 한 것은 누군가 그들에게 정보를 주고, 작전계획을 수립해 주고, 지휘 통제를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518이 이미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물증이랍니다.
연고대생 600명은 518 이전에 이미 광주인근에 사전 도착,분산, 은신해 있다가 518세력과 같이 행동을 개시했던 겁니다.
그럼 누가 연고대생 600명을 광주에 보냈고, 그들에게 훈련,교육,보급을 했는지는 자명한 겁니다.
교도소 습격도 이들이 바로 행동을 개시한 것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시는 내용이니,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확인을 해 보면 518 진실규명은 아주 간단하게 끝날수도 있습니다.
연고대생600은 셀제 연고대생이 아니라 지들끼리 통하는 암호비슷한거라네요. 국내에선 연고대생이라면 모두 껌벅하니 그렇게 표현했겠지요.
이 글에 대한 일베 논객들의 댓글 토론 http://www.ilbe.com/1261402176
5.18민주화운동은 결국 5,18 조선민주주의화?운동이라는 소린데?
근데 왜 대한민국에서 조선민주주의자들을 보상해주며 왜 국가보훈처에서는 연금까지지급하죠?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5.18의 진실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야 어거지를 써도 그 당시 기술로 평양에 생중계 했다는 말을 믿으라는거냐?
믿으니깐 5.18 단체들이 북한 생중계 방송 들었다는 광주시민들의 증언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이겠지요.
ㅋㅋㅋㅋ 조선일보에다 이 글을 올려서 전국민이 읽도록 해라. 니들은 정신병자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놈들이.....지들끼리 말 지어내고 믿고....
유네스코기록물을 찾아도 안나오는데 주소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