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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규 목사 / 세상적인 복과 하나님의 복 (6: 22-27)
오늘 본문은 가장 유명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축복할 것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그 세세한 내용까지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축도하는 것을 보면 대개 이렇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 역사하심이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성도와 그 가정과 추구하는 일에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노라."
그러나 저는 유다서 26-27절을 약간 변용해서 축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여러 축도 중 유다서 26-27절의 축도가 가장 깊은 감동을 전달하는 축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저는 그 유다서 축도에서 한 마디 구절을 첨가해서 축도를 합니다. 즉 유다서 27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약간 변용해서 사용하는데, 저는 참으로 이 성경 그대로의 축도가 좋습니다.
그런데 약 2년 전까지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제일 마지막 구절을 합해서 축도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축도로 사용한 부분은 24-2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린도후서 마지막 구절인 13장 13절은 이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저는 요즘 한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그런 형태의 축도보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기도를 그대로 인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나온 대로 축도를 하면 왠지 모르게 더 축복하심이 간절하게 전달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축도는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가락을 가지고 노래하면서 랍비들이 하는 축복의 내용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과 관련하여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추구하기는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빠진 복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세상적인 복의 개념을 잘 구분하여 참된 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복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첫째, 세상적인 복은 사회성이 없습니다.
자기만 복 받으면 다입니다.
2) 둘째, 세상적인 복은 윤리성이 없습니다.
정직하게 복을 받아야 하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욕합니다.
3) 셋째, 세상적인 복은 과정성이 없습니다.
진정한 복은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정도 중시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복은 투기성입니다. 땀과 노력을 생략하려고 합니다.
4) 넷째, 세상적인 복은 지속성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복을 보십시오. 그 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복은 잘못된 기질만 더 만들어 나중에 망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축복기도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어떤 복입니까?
1) 첫째,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2)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3) 셋째, 하나님이 마음속에 평강을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속의 평강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미국 정신 건강협회가 권고한 행복의 5대 원칙>이란 글을 봤습니다.
이 5대 원칙을 보면서 하나님이 복 주셔야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5대 원칙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너그러워지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남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남을 바라보는 눈에 독기를 빼야 우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2) 둘째, 현실적으로 자기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유행하는 왕자병, 공주병을 치료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에 대해서 "제까짓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셋째,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 남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의 기쁨을 가지면 됩니다.
4) 넷째,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후회란 실수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옵니다. 결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5) 명랑하게 살라. 웃으면 정말 복이 옵니다.
진정한 웃음은 어디에서 올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이 5대 원칙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고,
하나님이 매일같이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림으로 여러분들의 심령을 안정적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덕호 목사 / 믿음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민 6:22-27)
한 해를 마치며 주님께 감사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하실까요? “지난 잘못을 다 용서해주십시오.” “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도 제 잘못을 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성도님들 잘못을 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이제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새해에는 주님의 복을 더욱 충만하게 받으십시오.”
저는 지난 11월 말에 장흥지방연합제직세미나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둘째 날 아침에 한 목사님 댁에서 잠시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50이 넘으신 목사님에게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3형제를 다 키우고 나서 입양한 딸이었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가 유치원에 가라고 해도 tv를 다 보고 가겠다고 하며 안 가는데 아버지가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더라구요. 드디어 tv 프로가 끝나고 딸이 유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가지 않고 “가기 전에 아빠가 기도해주세요.” 합디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딸을 데리고 작은 방에 들어가더니 간절히 기도하고 보냈습니다. 그 기도 소리가 응접실에까지 들렸는데 정말 듣기에 좋았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면서 갑자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안고 기도해준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혹은 밤에 아이들이 잘 때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아이들이 크면서 언제부터인가 안고 기도하는 것은 거의 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녀들을 위해 많이 기도하시지요? 자녀를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실 때 간절히 기도하고 보내십니까? 시간적으로 좀 어렵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주십시오. 물론 혼자서는 많이 기도하시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자녀나 손자들을 안고 그들이 듣도록 함께 기도하는 축복기도 시간도 많이 가지십시오.
여러분 축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삭과 야곱을 아시지요? 이삭에게 위대한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순순히 응했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이런 희생적인 순종의 모습 때문에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까지 불립니다. 또 귀한 우물을 파고도 남들이 내놓으라고 다투니까 줘버린 사람입니다. 또 야곱은 어떻습니까?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귀한 이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외에도 수없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히브리서는 11장에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기록하며 그들의 모범적인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고 또 이삭을 바쳤다고 합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신앙의 선조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은 다 위대한 신앙 선조들의 대표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도 이들의 대표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0-21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히브리서가 이삭과 야곱의 가장 대표적인 믿음의 모습이라고 기록한 것이 바로 아들들과 손자들을 축복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축복한 것은 하나님께 축복기도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그냥 덕담이나 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자손을 축복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의 역사 중에 아주 귀중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많이 축복하는 게 얼마나 귀중한 믿음의 역사인지 느껴지십니까? 이삭과 야곱이 자손을 축복한 것이 그들의 다른 위대한 믿음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손을 많이 축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악한 사회를 선하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구원한 사람 못지않게 위대한 신앙인이다.”
왜 자녀를 축복하는 게 이렇게 중요한 믿음의 모습일까요? 우선 축복은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축복하는 게 믿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루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녀를 축복하면 어떤 내용으로 하겠습니까? 자녀의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할 것 아닙니까? 이것은 요한3서 1:2에 나오는 축복이 잘 보여주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렇게 자녀가 영적으로 잘 되면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녀가 건강하고 세상에서 부와 권세를 얻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좋은 열매를 맺도록 사용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녀를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큰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자녀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대를 이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들 아닙니까? 자녀는 우리가 다 하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녀가 축복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축복해주는 것은 신앙의 가장 귀한 사역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아론과 그 자손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후에 이들이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백성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축복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축복의 특권과 사명을 받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두 사람은 금방 아시겠지요. 하나는 부모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구약성경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축복은 누가 누구에게 해주는 겁니까? 부모가 자손들이게 해주는 것이고 교역자가 성도들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여기에 한 사람을 더해야 합니다.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든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하러 보내실 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평안을 비는 것은 축복기도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이 그 평안에 합당하면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고 합당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가 축복기도를 하면 복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복이 그 사람에게 가든지 아니면 제자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축복하면 복이 생깁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이 그 복을 받을 자격만 갖추고 있으면 진짜 그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해주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도하러 다닐 때 어떤 집에 유하면서 전도할 계획이라면 그 집에는 꼭 축복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에게 꼭 축복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2:9가 잘 보여줍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왕의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왕은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축복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축복해줍니까? 앞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 축복의 대상은 자손이나 성도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빌어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해줄 특권과 사명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축복해줘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달하지 못하는 복이 많습니다. 우선, 용서의 축복이 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지 못하니 많은 축복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자손을 위한 축복마저도 자손이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크게 임하지 않습니다. 이삭이나 야곱이 축복한 자손들도 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자손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는 축복을 별로 못 받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축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크게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해야 할 사람은 자손, 성도, 그리고 모든 사람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정말 이렇게 축복해주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웃을 축복해주는 것은 최고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축복해줌으로써 신앙생활에 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자손이나 가족이나 교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의 누구라도 축복해주면 우리와 우리 이웃이 말할 수 없이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단, 우리가 아무리 많이 축복해줘도 상대방이 믿어야 복이 제대로 임하기 때문에 항상 영적으로 먼저 축복해주고 다음에 삶에 필요한 것들로 축복해줘야 합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시면서 가끔 ‘아멘’ 하시지요. 저는 설교 중에 꼭 여러분이 ‘아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여러분이 ‘아멘’ 해주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처음에 축복의 말씀을 전할 때입니다. 저는 설교 때마다 거의 항상 먼저 축복의 말씀을 전하지요? 저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른 소리 안하고 성경의 가르침만 전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축복의 말씀 없이 바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축복의 말씀을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성경에서 설교와 가장 가까운 책은 서신들입니다. 그런데 서신들이 첫머리에 축복부터 해주는 것을 보고 설교에서도 축복을 먼저 하는 게 성경적이고 또한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성도님들을 보면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구요. 그래서 설교 때 축복의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설교를 들으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 듣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또 은혜와 복을 받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는 목적은 축복을 받는 데 있습니다. 사실 설교를 듣고 축복을 못 받는 것보다는 설교를 못 들어도 축복을 받는 게 더 좋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못 받는 것보다 설교를 못 들어도 은혜를 받는 데 더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목사의 귀한 사명이 성도님들을 축복하는 것이고 또 목사가 여러분을 사랑하니까 설교 시간에 축복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 축도할 때만 ‘아멘’ 하지 마시고 설교 시에도 축복해드릴 때는 정말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멘’ 하시며 축복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축복해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히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은 자녀와 손자들을 축복해주십시오. 그들의 영혼과 몸의 건강과 삶의 풍성한 복을 빌어주십시오. 아침에도 축복해주고 저녁에도 축복해주십시오. 또 성도님들 사이에도 서로 축복해주십시오. 우리가 다 동역자들이지만 특별히 같은 부서의 동역자들끼리는 더 많이 축복해주십시오. 교회학교, 남선교회, 여전도회, 찬양대, 주방, 선교회 어떤 모임이나 모이면 먼저 축복해주십시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이웃을 축복해주십시오. 가끔 축복해주는 게 아니라 항상 축복해주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가 이웃을 축복해주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혼자 그를 축복하는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둘째, 그 사람 앞에서 축복의 기도나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그 사람이 없어도 남들과 대화할 때 그에게 축복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잘 되기를 바라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를 다 잘합니까? 혼자 기도할 때 축복하는 기도는 잘하시겠지요. 그리고 공적인 기도에서 사람들을 축복하는 기도도 잘하실 겁니다. 그런데 혹시 대화 중에는 축복의 말은 잘 못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기도순서를 맡으면 모든 교우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지만 기도가 끝나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쉽게 교우들에 대해 나쁜 말을 하거나 심지어 면전에서 비난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기도할 때와 대화할 때 달라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기도가 끝나고 이웃과 대화할 때는 가장 의로운 사람인 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는 헌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기도가 끝나면 교회봉사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할 때 기도의 형식에 따라서 한 것뿐이지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할 때 축복의 기도를 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거짓 축복기도입니다. 마음에는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웃을 축복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 대화할 때도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그 동안 평소의 말에서는 남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했다면 새해에는 그러지 맙시다. 축복하는 말만 합시다. 물론 우리 자손이나 교우들이 실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꾸짖거나 충고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꾸중도 비난으로 하지 말고 축복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자녀에게 “그렇게 부모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려면 아예 나가버려.” “거짓말이나 하는 나쁜 놈아.”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우리는 정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잘 될 수 없어. 아무리 불편해도 정직해야 진짜 복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에서는 물론이고 대화에서도 이웃을 향해 축복의 말을 해야 정말 이웃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삶은 놀라운 신앙생활이며 큰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 사랑과 행복이 넘치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풍성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의 말을 해야 할지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은 여섯 가지인데 둘씩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쌍의 축복이지요.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각 쌍의 앞에 나오는 축복은 포괄적인 것인데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좋은 것을 주시기 바란다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항상 하나님께 기원하는 축복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축복할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의 덕담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그냥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하십시오.”라고 하기보다 “주님이 복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건강하십시오.”라고 하는 게 더 좋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하는 축복의 말이라면 자연스럽게 표현해도 괜찮겠지만 축복받는 사람을 위해서는 이런 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게 더 좋습니다.
사실 사람의 말로만 축복해줘도 얼마나 큰 성과가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대뇌학자는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에는 각인력이 있다고 합니다. 뇌에 박히는 거지요. 그런데 뇌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뇌게 각인되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자꾸 자기가 성공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노만 빈센트 필 박사에게 한 청년 세일즈맨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판매를 잘할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필 박사는 조그만 카드에 이렇게 적어주며 이것을 주문 외우듯이 항상 외우라고 했습니다. “나는 훌륭한 세일즈맨이다. 나는 세일즈 전문가이다.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모든 고객을 친구로 만든다. 나는 즉시 행동한다.” 그대로 한 이 청년은 유능한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말을 많이 하면 정말 비극을 맞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수들이 노래를 하나 취입하려면 수천 번씩 부른답니다. 그러니까 그 가사가 자기 말이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가수들은 자기가 부른 노래처럼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덕심은 ‘사의 찬가’를 부르고 현해탄에서 자살했지요. 배호씨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비롯해서 우울한 노래를 많이 했는데 참으로 우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쨍하고 해뜰 날’을 노래한 송대관씨는 지금 58세인데도 최고의 가수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신을 향해 말해도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은 더 깊이 각인되고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교회지도자가 축복하는 것은 놀라운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이 축복하면 큰 유익을 주고 그들이 저주하면 큰 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축복기도는 존경하는 사람의 말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부모님이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종이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구나.” 훨씬 더 큰 각인력을 가집니다. 다만 축복해주는 말을 듣는 것은 자기 혼자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횟수가 적다는 게 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축복의 횟수를 많이 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축복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축복기도는 사람에게 각인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힘입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지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축복해주는 기도와 말씀은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좀더 많이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구체적인 축복을 세 가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것, 하나님이 자비롭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것, 하나님이 평강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라야 합니까? 먼저,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 안에 바르게 살며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재물도 지켜주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평강과 능력이 생겨 힘차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복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자꾸 넘어지고 벌 받을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워낙 약해서 쉽게 병들고 다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자비로 대해주십니다. 시편 103:13-14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렇게 지켜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약하지만 참 평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위해 기도한 후에 평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아울러 우리 자녀와 교우와 이웃에게 하나님의 이런 복이 임하도록 축복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큰 행복이 임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웃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이것도 심리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아울러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참 믿음과 참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특히 우리가 서로를 축복해주면 수백 명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게 됩니다.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은혜와 복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새해를 맞아서 신년 첫날인 오늘만이 아니라 한해 내내 아니 우리 일생 동안 자손과 가족과 교우와 이웃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비는 축복기도와 축복의 말을 해줘서 신앙의 귀한 열매도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은혜와 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