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암은 설악산 깊은 산 속에 있다.
워낙 깊은 산중에 있어 길이 험한데다가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예전에는 이 암자에
들어가서 눈을 한번 만나게 되면 봄이 되어 그 눈이 녹기 전에는 좀처럼 다시 나올 수가 없었
다.
그래서 이 암자에서 겨울을 나려면 누구나 가을부터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설정스님이 이곳에서 동안거를 하려고 다섯 살 먹은 조카를 데리고 눈이 아직 내리기 전에 이
암자로들어갔다.
겨우살이를 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는데,그 중에 두서너 가지는 아무리 하여도 다시 한 번 산 아
래에 내려가서 구하여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잠깐이면 갔다올 수 있는 일인데,그 험한 길에 다시 어린애를 데리고 내려가기도 어렵
거니와 그러자면 길만 더욱 터덕거릴 듯해서 설정 스님은 마침내 어린 조카를 그대로 두고 가
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쯤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조카를 달랬다.
"아가,나 곧 다녀올께 넌 여기서 집 보면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밥도 여기 있고,맛있는 반찬도 여기 있고,또 네가 좋아하는 누룽지도 여기 있다.
먹고 싶으면 먹어 가면서 그저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내 곧 다녀올 거다.
그리고 심심하거든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하면서 자꾸 입으로 부르거라.
그러면 내가 오기전이라도 너의 어머니께서 오셔서 네게 밥도 주시고 옷도 주시고 그러실 거
다.
내 말대로만 하거라 응? 우리 귀여운 조카야."
설정 스님은 이렇게 어린 조카를 얼렀다.
어린 조카는 처음에는 겁이 나서 따라 나서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달콤한 말에 넘어가 관세음
보살만 부르면 어머니까지 온다는 바람에 마음이 풀려서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설정 스님은 이렇게 잘 얼러서 조카를 두고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산을 내려왔다.
내려와서도 마음이 바빠서 어서어서 서둘러 일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룻밤은 마을에서 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이런 큰일이 있는가,
하룻밤 사이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산이고 들이고 온 땅이 하얗게 덮였다.
설정 스님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오직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었다.
아무 방법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큰 눈이 연거푸 내려 산에 올라갈 생각을 아예 할 수 없게 되었다.
올라갔다가는 조카를 구하기 전에 중도에 자기 자신부터 눈속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설정 스님은 일체를 단념하고 어린 조카를 위하여 불보살님이 어떻게든 가호 하
여무사히 잘 있도록 빌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이듬해 봄이 왔다.
그렇게 엄청나던 눈도 이제는 조금씩 녹아서 위험한 길도 간간이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설정 스님은 노심초사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길을 재촉하여 암자로 향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올라와 보니 이렇게도 놀랍고 반가운 일이 있을까.
설정 스님의 기침 소리를 듣고 어린 조카가 방문을 '쿵'하고 차고 나오면서 반갑게 말했다.
"아저씨,참 오랜만에 오십니다.왜 곧 오신다더니 이제야 오십니까?"
조카는 뛰어나오자마자 설정 스님에게 매달렸다.
그를 보자 스님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설정 스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조카를 껴안은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물었다.
"대관절 너 혼자 어떻게 살았니?"
"날마다 어머니가 와서 밥도 해주고 옷도 해주고 재미난 이야기도 해 주면서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요.
아저씨,저더로 관세음보살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관세음보살만 부르면 언제든지 어머니가 오는데요.뭘"
조카는 너무나 천진스럽게 그동안의 일을 대답했다.
설정스님은 그 관음보살 앞에 엎드려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고 무한히 감사하였다.
그로부터 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혹자는 오세암의 유래에 대하여 조선 시대에 매월당 김시습이 오세신동의 천재로서 이 절에 오
래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법화경염송>을 지은 그 자서에
'오거오세五去五歲 취오세지의趣五歲之意'라 한 것으로봐
'오세'라 이름하기는 그가 이미 이 암자에 오기 전부터였음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