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슬픔에 닿기까지
승우는 정란의 얘기부터 확인했다. 미주가 검사했다는 세 군데 종합 병원과
암 센터로 가서 미주를 검사했던 담당 의사들을 만났다.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아직도 입원을 안 했단 말입니까? 발견 시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후자의 의사는 병원에 왔을 때 이미 전이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입원해도 완치는 어렵고 다만 삶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는 있었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부인의 선택이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나 의사 모두 답이나 결과를 모르는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버리고 태아을 선택한 것 말입니다.
위암 3기면 살 수 있는 시한이 6개월에서 5년까지의 예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진행 속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거죠. 암 처치의 경우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저희는 믿지만 반드시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결국 현대 의학이 암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진행된 암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력하다는 거죠.
네,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부인께서 최소 1년을 산다고 가정할 때 아기는 태어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외국의 임상 사례를 보면 암 말기의 환자가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부인의 겨우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선 부인이 의료를 거부하셨으니 혼자서 암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아기를 가진 채로요. 환자의 영양 상태며 불안전한 심리 상태,
극심한 동통,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예상되는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인께서 아기를 낳겠다는 신념이 대단했습니다만 .........
선생께서는 이런 점도 참작해 두셔야 합니다.
아기를 가진 엄마의 감정 상태는 태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임산부가 흥분하거나 분노에 차 있으면 스트레스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면 엄마의 혈액 내로 증가한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 엔도르핀,
스테로이드가 태반을 통하여 태아에게 전해집니다.
태아도 똑같은 긴장감과 흥분 상태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특히 아드레날린은 엄마의 자궁근육을 수축시켜 태아에게 전해지는 혈류량을 떨어뜨립니다.
이 때문에 산소와 영양분을 충분하게 공급하지 못해
아기의 뇌 기능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임산부가 심한 정신적인 충격이나 육체적인 충격을 받을 때
유산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긴 좀 그렇지만 부인께서 이기를 낳으려면, 그것도 건강한 아기를 낳으려면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앞으로 매순간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
네,
부인을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다 해도 현재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강한 항암제를 투여하는 화학 요법을 쓰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발견시 신속하게 그 장기를 들어내 버리는 외과요법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인데
지금은 그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때도 전이가 의심되었거든요.
요약하자면 부분적인 국소 요법인 방사선과 외과 수술은 불가능하고
전신 요법인 화학 요법만 가능합니다. ..........그렇죠.
네
솔직히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어느 정도 확신조차 드릴 수 없다는게 실무자의 고충입니다.
더군다나 부인께서 아기를 버려야 하는 화학 요법을 받으실 리 만무하잖습니까.
몸 속을 독가스로 가득 채우는 화학 요법을 받으면서 태아도 함께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
네,
그렇습니다. 현재로선 방법이 없습니다. 최근 인간의 세포 지도인 게놈 지도가 완성되면
암이나 에이즈 정복이 시간 문제라고 하지만 실용하는 요원한 얘깁니다.
어쨌든 부인께서 아기를 택했다면 병원에서도 영양제 주사나 링거,
그리고 동통이 올 경우 그때그때 고통을 덜어 주는 게 고작일 겁니다.
닥터 허를 잘 아신댔죠? 그 문제는 그분과 상의해 보세요.
그 정도는 닥터 허가 충분히 조치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실력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니까요.
의사는 회진을 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승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사실 부인을 대하고 놀랐습니다. 아무리 여자의 모정애가 강하다고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아기를 선택하는 여자는 그리많지 않습니다.
부인은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심적 고통을 겪은 뒤에 결정하셨을 겁니다.
그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선생께서 부인을 도와 주십시오.
이제 명확한 건 부인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아기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게 부인의 한결같은 뜻히고 의지였으니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외람된다 하시겠지만
전 그때 부인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참으로 행복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3
0대 중반의 젊은 나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목숨부터 구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 부인의 그 애틋한 마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건 선생의 뜻에 달렸다고 봅니다.
선생께서 어떻게 마음먹고 어떻게 부인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의사란 신분을 떠나 같은 남자로서 저는 선생이 부인을 도와 그 힘든 싸움을 이겨내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반드시 부인이 자신의 품에 아기를 안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배려 깊은 의사의 설명과 격려는 승우가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승우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하고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던 미주에게
못내 서운함과 야속함, 안타까움, 분노 충격을 받았다.
극심한 혼란 속에 허탈감에 빠져 죽고 싶기까지 했던 승우는 이내 미주에 대한 사랑을 회복했다.
그리고 뒤는 돌아보지 말고 지금 현재 어떻게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 무렵 승우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믿고 기댈 것이 없으니까 미신이 자꾸만 그의 마음에 밟히는 거였다.
영은이........... 그녀가 자신과 마지막 만났던 자리에서 했던 말!
남자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저주의 주문을 자기가 외울 수 있다던 그 말!
미주가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더 큰 불행과 저주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의심과 추측은 턱없는 생각이었다.
승우는 영은을 잘 알고 있었다. 영은의 성품으로 보건대 자신을 향해 그런 것을 외웠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번이라도 외우지 않았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영은에게 그런 면이 없다는 것을 승우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마음은 미묘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은은 그 주술을 푸는 주문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영은이 한 번이라도 외웠다면
승우는 미주에게 그 해독 주문을 외워주고 싶었다. 승우는 자신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뿐이라는 데 낭패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며칠을 허둥대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승우는 영은의 치과 병원 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하지만 국제 전화 번호를 누를 때까지도 내내 망설였다.
헬로우?
여........영은이니?
오빠? 오빠! 승우 오빠구나? 어머나. 이게 웬일이야. 오빠가 나한테 전화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전화받기 불편한거 아니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오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너무 좋아, 오빠, 잘 살지?
언니가 영화 만드는 감독이란 소식 들었어. 대단해, 비디오로 구해 보기도 했는 걸.
오빠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자리잡고 잘살고 있어........오빠 근데 무슨 일 있어?
아니 그저.........
그러고 보니 그냥은 오빠가 내게 전화를 할 리가 없어. 무슨 일이야? 뭐든지 말해 봐.........
어서 말해 봐!
너무나 우스꽝스런 아이 같은 유치한 질문 같아서..........
괜찮아 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좋겠는걸, 뭐야? 속이 터질 것 같아, 얼릉?
그래, 말할게, 호, 혹시 말이야, 너 그 주문 외우지 않았나 해서.
주문?
남자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다는 주술 말이야.
맙......맙소사! 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오빠한테..........아냐! 그런 적 없어.
정말이야!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 생겼어?
별일 아냐, 근데........예전에 그 주술을 푸는 주문도 알고 있댔잖아. 그거 가르쳐 줄 수 있니?
오빠가 그런 걸 믿다니 정말 이상하네,
다른 애기 하지 말고
몰라?
잊은 거야?
아니 가르쳐 줄게, 옛날 티벳에서 수도를 닦고 온 필리핀 고승이 퍼뜨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래, 라흐마니 나도루 마타부부 가이타, 사자가니 바메, 바메바메 라흐마니!
이걸 세 번 외우고 자신의 미간 사이에 점을 찍고 합장하면 돼
물론 그 저주에 걸린 사람이 외워야지 효험이 있겠지.
한 번만 하면 돼?
글쎄..........그건 나도 모르겠어. 오빠 정말 무슨 일 있어?
그래 고맙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 잘 있어.
승우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종이게 적은 주문을 외워 보았다.
라흐마니 나도루 마타부부 가이타, 사자가니 바메, 바메바메 라흐마니! 승우는 아예 외워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예쁜 아기를 낳는 주문이라며 미주에게도 외우게 했다.
승우는 미주에게 예쁜 딸을 낳으려면 수시로 외워야 한다고 말했다. 미주는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혼자서도 곧잘 그 주문을 외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주의 몸 속에서 암세포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승우가 보기엔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미주의 얼굴은 더 핼쑥해졌다.
미주는 최후까지 자신의 병을 숨기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승우에겐 두려움이나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게 화가 나기도 하고 그지없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승우도 내색하지 않았다.
승우는 방송국에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유는?
그래, 흐음!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김PD가 이일에 적성이 맞고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잘 아네.
사유는 묻지 않겠네. 1년동안 자네 사표를 보류해 두고 있겠네. 정리가 되면 언제든 돌아오게나,
하고 국장은 말하면서 후임자를 물색할 때까지만 자리를 지켜 달라고 했다.
얼마 안 걸린다는 거였다. 그 청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승우는 그러겠다고 했다.
승우는 매일 정란을 찾아갔다. 자신이 미주와 함께 싸우기로 결정한 이상
탁한 공기와 소음으로 가득한 서울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미주도 상운 폐교로 내려가길 원하고 정란도 만약을 대비에 몇 가지를 보완하고
승우가 미주와 늘 함께 있다는 전제라면 받드시 서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강릉에서 속초로 가는 4차선 길에 시설 좋은 종합 병원이 생겼고
거기에 정란이 잘 아는 동기생이 내과 담당의로 있으므로.
하늘이 도왔는지 며칠 전에는 경희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태민이 태현이,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간다고, 일본의 오빠 집에 몇 달간 가 있게 됐다고
만약 오게 되면 방 하나 달랑인 기숙사 쓰지말고 관사 열쇠와 도자기실 열쇠를
우물 쪽 상수리나무 밑섬돌에 놓아 둘테니 편하게 사용하라고 했다.
그곳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미주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일이 풀리는 게
승우로선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만약 주철 선배 가족이 일본에 가지 않았다면
그곳에 내려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선배라지만 승우가 암 투병하는 산모를 데리고 허덕거리는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고
그들 가족을 결과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일 테니까.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무렵
승우는 정란이 근무하는 병원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다.
몇 가지의 의료 조치를 배우기 위해서 였다. 그는 정란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왔니?
네.
미주는 어때?
나를 속이는 즐거움에 취해 있어요.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듣기 좋다, 난 또 승우 씨가 미주에게 한바탕 난리를 치거나
승우 씨 스스로 비탄과 절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까 봐 염려했는데.
휴우, 어디 그럴 여유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 승우 씨 마음 내가 잘 알아, 자 시작해 보자,
탁자 위에는 몇 종류의 링거 병과 주사기, 알약, 앰플 등이 놓여 있었다.
소독수와 탈지면, 반창고, 밴드. 그리고 혈압을 재는 기구와 온도계까지.
일단 이런 조치가 필요해진 경우엔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게 좋아 하지만
시간이 없거나 미주가 거부할 경우에 한해서 승우 씨가 조칭를 해줘야 돼. 잘 익혀 둬.
정란은 승우에게 주사기 다루는 법부터 가르쳤다.
앰풀을 따는 것에서부터 주입하고 공기를 뺀 뒤 엉덩이 위쪽이나 팔에 주사하는 법,
일회용 주사기를 많이 준비해 줄테니 그걸 쓰고 혹시라도 다쓰면
현대병원 닥터 박에게 말해 놓을 테니 도움을 청하고, 유리 주사기와 바늘도 줄테니
필요한 경우 사용한 뒤 팔팔 끓인 물에 소독하고 쓰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 앰풀이 모르핀이야. 진통제지, 주사로 놓을 수도 있고 링거 관속에 넣어
링거액과 함께 주입하는 방법도 있어. 이 앰풀은 용량이 1cc야 처음에 열 개 정도, 1
0cc를 500cc 링거관 속에 주사해 넣으면 돼.
지금은 통증이 2, 3일에 한두 번씩 온다고 하지만 점점 더 잦아지고 심해질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승우는 열심히 수첩에 메모를 했다.
이 앰풀은 데메롤이야, 모르핀과 같다고 보면 돼. 물론 이것들은 병원 밖으로 반출하지 못하게 돼 있지만
승우 씨가 떠날 때 챙겨서 보내 줄게. 모아 놓은 것도 좀 있고, 나중에 승우 씨가 돌아와서
환자인 미주가 사용했다는 사인란에 사인만 해 주면 돼. 물론 그것을 처방하고 결제한 담당의는 나야.
네,
그리고...........앞으로 자주 링거를 맞아야 할 거야. 미음은 그런대로 아직 잘 먹는댔지?
네.
승우 씨가 끓여 줬어?
네,
전복죽, 깨죽, 끓이는 데는 도사 다 됐습니다.
잘했어. 하지만 임신 중,후반기쯤 되면 미주는 전혀 먹지 못할 가능성이 많아,
아기를 낳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먹어 준다면 큰 시름 하나는 더느데 말이야.
어쨌든 앞으로 승우 씨가 미주 팔에 링거를 꽂아야 할 때가 많을 거야.
중환자들은 링거의 힘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네..........
이건 영양을 보충하는 거고 이건 단백질. 이건 아미노산, 이건 병원에서 제일 널리 쓰는 포도당 링거야.
보통 병원에선 두 가지만 써. 큰 차이는 없거든 문제는.........정맥 속에 링거 바늘을 찔러 넣는 거야.
좀 연습이 필요하거든, 봐, 바늘은 끝에다 대고 이렇게 끼우는 거야.
정란은 링거 선 끝에 바늘을 끼우고 승우의 팔에 푸른 정맥을 찾아 가볍게 찔러 넣었다.
따끔했다. 그녀는 다른 바늘로 갈아 끼우고는 승우에게 들려준 뒤 자기 팔을 내밀었다.
해 봐!
선.......선배 팔에요?
아니에요. 내 팔에 할게요.
미주의 가는 팔이 승우 씨 닮았어 나 닮았어? 정맥 속으로 바늘을 집어 넣는 건 초보자로선 쉬운 일이 아냐,
어서 해 봐, 연습을 많이 해 봐야 돼. 미주가 막 아프다고 하는데 정맥을 제대로 찾지 못해 몇 번이나 꾹,
꾹 찔러 봐라 누가 좋아하나. 이건 사소하게 넘겨 버릴 부분이 아니야. 굉장히 중요한 기술이야.
숙련되면 될 수록 환자에게 고통과 공포를 빨리 줄여 주니까. 어서 해!
정란의 하얀 팔에 실 같은 푸른 정맥이 얼비쳤다. 바늘을 든 승우의 손이 일순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자신의 살갖을 뚫는 게 속편하지 어떻게 정란 선배를 찌르나 해서였다.
승우는 조심스럽게 찔렀다. 정란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비슷하게는 찔렀는데 제대로 안 들어갔어. 봐, 정맥을 비켜 갔잖아. 다시 뽑아서 해 봐,
핏줄을 따라 약간 경사지게 해서 스키를 타는 기분으로 가볍고 야무지게
한 번에 찔러서 밀어 넣어야 환자가 불필요한 고통을 느끼지 않아 해 봐.
정란은 주먹을 움켜쥐어 푸른 정맥을 돋우었다. 승우가 바늘을 찌르자 정란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그래 하지만 이번엔 각도가 안 맞았어. 마음 편하게 그래, 독하게 먹고 해. 미주를 생각하면서 다시 해 봐.
바늘을 너무 세우니까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거야.
저..........정란 선배.......
승우 씨 다시 해 봐, 한 번 제대로 넣으면 자신감이 붙어. 감정없이 해.
바늘을 정맥에 제대로 끼워 넣기 위해서 승우는 무려 여섯 번이나 정란의 손목 윗부분을 바늘로 찔렀다.
한 번씩 찔렀다 뺄 때마다 빨간 피가 맺혔다.
잘........잘했어 그 다음에 반창고고 단단히 고정시켜 선을 한번 말아 붙여도 좋아, 튼튼하게 해도 상관없어.
정란은 웃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승우도 마찬가지였다.
주사를 잘못 끼워 넣으면 그 부위가 수포가 차는 것처럼 붓거든,
그러면 당황하지 말고 즉시 바늘을 뽑고 그 부위를 눌러서 액을 뽑아 내면 돼.
반대편 팔에 놓거나 손등....이런 데, 이런 데 있지? 이런 푸른 핏줄에 놓아도 돼.
살이 빠지면 혈관 찾기도 힘들어지거든. 그럴 때는 고무줄로 팔뚝을 묶고
손바닥으로 치면 혈관이 잠시 살아나 알았어? 단번에 놓을 정도가 돼야 해,
쉽지 않은걸요.
그럼, 간호대학 과정을 며칠 만에 속기 이수하려니 당연히 어렵겠지.
내일은 세 번만에 성공해. 난 뭐 안 아픈줄 아니?
내일도 또 해요?
당연하지 단번에 성공할 정도로 숙련되어야 해. 환자들은 몸이 아프니까
신경이 아주 날카롭거든. 환자들이 간호사들에게 제일 불만인 게 바로 링거이야.
초보 간호사들도 몇 번이나 찔러 대다가 겨우 집어 넣거든 그러다가 환자한테 뺨맞은 간호사들도 많아.
난 승우 씨가 미주에게 호되게 당하는 걸 원치 않아.
정란이 미소지었다. 계속해서 정란은 알약 진통제 복용 방법, 주사로 놓은 것과의 효과 차이, 혈압 재는법,
수치로 상태 읽는법 온도계 사용법, 온도계 수치에 따른 행동 범위을 설명했고,
승우는 그것을 일일이 직접 해 보고 수첩에 기록했다.
목이 마르네. 뭐 마실 거야?
주스 주세요.
정란은 냉장고 문을 열면서 여섯 번이나 찔린 부위를 보이지 않게 주물렀다.
왜 아프지 않고 쓰리지 않겠는가, 생살을 여섯 군데나 뚫었는데. 승우는 잔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애써 주시니.
승우 씨,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승우 씨에겐 미주가 아내지만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잖아.
그런데 정말 개 성격 이상해. 지난번에 강원도에 내려가겠다고 하기에
그러면 내가 따라가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싫대, 무조건 간호원 하나 붙여 주겠다고 했는데도 싫대.
걔 정말 무슨 깡다구로 자신을 그렇게 몰고 가는지 이해가 안 되는 점도 있어.
그렇다고 내가 강제로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정란 선배가 뒤에서 이렇게 애써 줄 줄 다 아는 거지요. 뭐.
가운 입은 지 7년이 됐는데 이렇게 말 안 듣는 환자는 처음이야.
환자가 모두 걔 같다면 의사들 전부 필요 없을 거야.
속이 상해 하는 말이었다. 미주가 걱정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승우도 염려되긴 마찬가지였다.
언제 갈 예정이랬지?
모레요.
미주가 좋아해.
신혼 여행 가는 것처럼 들떠 있어요. 얼굴이 아주 밝아졌어요.
거기가 왜 그렇게 좋대? 무슨 속인지 도통 모르겠어. 현대병원 닥터 박한테
내가 또 전화해 놓을 테니까 시간 나면 먼저 한번 찾아가 봐.
그 병원은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건물도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깨끗하거든.
미주가 아기 낳을 임박한 시점까지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
승우 씨가 미주를 잘 구슬러 봐.
그렇게 하죠.
일은?
내일로 마감해요.
정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참, 하고 가볍게 소리를 질렀다.
미주가 요즘 매일 승우 씨 프로에 사연 보낸다고 하던데 방송에도 나왔다며?
네? 금시초문인데요?
이상하다.........방송을 여러 번 탔다고 해서 승우 씨가 뽑아 줬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그........그럼
승우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3주째 넘게 매일 팩스로 오던 무명의 편지........
암 선고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야 하는 애절한 사연의 주인공이
바로 미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눈과 마음이 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미주의 마음을 알아볼 수 없었단 말인가. 몇 번이나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정말 바보 멍청이 얼간이였다.
미주는 매일매일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새며 암호 같은 연서를 한밤에 띄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자신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만 여겨 오지 않았던가.
매일 한 침대에서 자는 여자, 그리고 죽어 가는 여자, 자신의 아기를 낳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여자인 미주의 마음을 받아 들고서도 몰라 보다니.
힘없이 고개를 떨군 승우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와락 싸안았다.
여태껏 참았던 격한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정란은 깜짝 놀라 승우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승우는 마치 죄책감에 빠진 사람처럼 참담한 슬픔을 토해 내고 있었다.
첫댓글너무나 짧은것 처럼 느껴져요... 벌써 다 읽어버린 아쉬움에 하염없이 내일을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사랑은 기적을 낳는다는데 그 주문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 났으면 싶고요.....죽음을 기다리는 암말기 환자가 부처님께 기도한 영험 으로 낫게되는 사연을 많이 읽었 거든요...이리 사랑으로 멋지고 재미있는 소설은 처음 읽어 본것 같아요 ~물안개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너무나 짧은것 처럼 느껴져요... 벌써 다 읽어버린 아쉬움에 하염없이 내일을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사랑은 기적을 낳는다는데 그 주문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 났으면 싶고요.....죽음을 기다리는 암말기 환자가 부처님께 기도한 영험 으로 낫게되는 사연을 많이 읽었 거든요...이리 사랑으로 멋지고 재미있는 소설은 처음 읽어 본것 같아요 ~물안개님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남편 좋은 친구를 둔 미주네요
미주는 모성애로 잘견디고 승우는 사랑으로 잘견딜겨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