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는 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는다는 것은 정말 기분이 오묘하다. 이 오묘한 기분은 그리 나쁘지는 않는가 보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간단히 먹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 글의 조회수를 살펴보고 다시 이렇게 타자를 치는 것을 보면.
나의 호스트 가정은 평범한 미국 가족이었다. 잔디밭에 있던 그 벽돌집. 내 신발을 다 물어 뜯어먹던 큰 얼룩무늬의 개. 180이 넘는 키에 목소리가 크고, 항상 밝던 호스트 아빠, M. 가정적이고 따뜻하고 요리솜씨가 정말 좋았던 호스트 엄마 M, 나보다 한살 어린, 처음엔 어색했지만 항상 날 배려해주던,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통하던 호스트 가족의 막내딸, N.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정도록 애틋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바쁜 고등학교 생활을 핑계로 연락을 주고 받지 않은지 몇년이 지났을까. 평생을 감사해야할 그들에게. 죄를 진 것만 같아서. 한없이 미안하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첫날을 끄집어내자면, 열시간이 넘는 비행을 끝내고 초췌한 상태의 나를 맞이한건 내 이름과 태극기가 그려진 주황색 종이를 들고있던 N과 호스트 부모님들. 나를 알아보고 처음에 나에게 해준것은 따뜻한 허그. 미국에서 처음 먹은 음식은 공항에서 집에 가는 길에 들린 Dairy Queen의 아이스크림. 여기저기 촛불들과 전구로 정말 아.늑.한 집에 들어간 순간. 나의 느낌이란. N보다 더 큰 방을 나에게 내어준 그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그날 저녁, 한국에서 사간 전통 부채와 여러 기념품들을 그들에게 주었고 호스트 엄마 M은 포장지 마저 독특하고 예쁘다며 곱게 접어 방에 가지고 들어가셨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그날 내가 드린 기념품들은 장식장에 걸려있었다.
나는 입꼬리가 내려간 얼굴이다. 다시 말하면 잘 웃지 않는다. 무표정의 얼굴이라고 해야할까. 학기가 시작하기 전, 그들과 여행을 다녔다. 새벽에 출근하시는 호스트 아빠M의 시간을 쪼개서 휴가를 내서 놀이동산도 가고 캠핑도 가고, 큰 도시로 나가 투어도 하고. 그 때의 사진속의 나는 무표정이다. 그 때 나를 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미국에 가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는 환한 웃음과 Hi 한마디. 뒤에서 Bitc*라고 욕을 해대던 간에 그 사람 앞에서는 180도를 달리하여 완 전 친.한.척 하는 드라마 가십걸의 블레어같은 아이들.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어쨌든 미국에 간다면, '웃어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국 아이들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 입 찢어지게 치즈 하고 웃고 있다. 난 입에 경련이 일어나던데. 한국사람들은 웃는것에 인색하다고들 한다. 나만 그런가.? 항상 시무룩해하던 나에게 호스트 가족을 바꿔줄까? 우리와 안맞니? 하며 눈물을 흘리던 호스트 엄마.(그 땐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했었다.) 이대로 쫒겨나는건가, 아빠한테 죽었다.하는 두려움에 무조건 미안하다고,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말도 안되는 영어를 써가며 그렇게 미국으로 온지 한달만에 큰 고비를 넘겼었다. 그때 한국을 떠나기전 나에게 말해주시던, 한글조차 안배우신 우리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행동들 싹 다 버리고, 새롭게 행동혀ㅡ".
한국인스런 행동을 버리자, 미국에 왔으면 미쿡인 처럼!(물론! 양키ㅡ 헤이맨헤이걸요요 하고 다니라는 것은 아니다ㅎ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은 잃지 말도록!)하는 다짐을 하고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었다. 솔직히 의도적으로 무뚝뚝하게 다닌 것은 아니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 별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아 학교 가기 전 전신거울 앞에서서 '위스키, 와이키키, 유후'라고 연신 외치며 웃는 연습을 하였다. 몇달 후엔 치아를 환히 드러내고 웃고 있는 내가 박혀있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 평생 살 것이 아니라면 되도록이면 좋은 기억. 인상을 주고 왔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 웃으면서 굿모닝ㅡ한마디와, 가끔은 커피 한잔 따라주고. 자진해서 개 산책을 시켜 주거나(우리집 개는 문만 열어주면 혼자 나가서 신나게 뛰어놀다 지칠때쯤 돌아와 문을 긁으면 들여보내주면 됐었다. 영특한 자식.), 같이 공원 산책하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거나, 주말엔 성당이나 교회를 같이 가고, 가족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해 다른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고(친척 아이들과 잘 어울리면 더 좋다), 생일 때는 작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해주고(미술시간 프로젝트로 자화상 그리기를 했든데 호스트 엄마 생일에 맞추어 호스트 엄마를 그려 액자에 넣어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등등
나열하자면 길,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작고 소중한 그런 것들. 물론 내가 다 했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간단한 걸. 간과했던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아 후회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 갈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수억명의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만난 것은 인연이자, 운명이다. 적어도 몇억분의 일의 확률의 인연을 더럽게 만들고 싶진 않다. 따라서 매 순간에 감사하고, 그리고 표현하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삶의 공유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사상들이 뼛속까지 박혀있지만, 역시나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 본연의. 원초적 본능은 인종과, 나라와, 문화를 거스른다.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것, 웃는얼굴에 침 못뱉는 법, 진심은 통하는 법! 등. 문화가 충돌한다면 인간대 인간으로 맞설것.
원래 오늘은 학교에 대해서 쓰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의 호스트 가족자랑이 되어버린 듯하다. 한국말로 써진 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그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보고싶다. 정말.
한가지 더)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 정말 공감했다.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 미국사 시간에 독도 문제에 혼자 열이 받아 신나게 설명하다 너무 길다고 핀잔한번 들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던. 2004 올림픽 때, 1위를 달리고 있던 양태영이 폴햄에 밀리자 격분해서 (한달만에 일어난 가족간의 트러블의 원인- _-;;)툴툴댔던일,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꽁꽁 뭉치는 이 끈끈한 정. 미국에 가서도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것 잊지마시고 힘내시길! 힘들어도 힘내시길! 공항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 느낌과 그 때의 꿈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