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숙 金永肅 (1886 ~ 1955)】
"대종교 총본사 서무부장, 대종교를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
1886년 9월 3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현 논산시) 양촌면(陽村面) 임화리(林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는 백주(白舟), 이명은 김진(金振), 김형(金衡), 김백(金白), 김병익(金秉羽)이다.
191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서울 승동소학교(勝洞小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같은 해 8월 조선어연구 참고서를 지참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윤세복(尹世復)·윤세용(尹世茸) 등이 만주 펑텐성(奉天省) 환런현(桓仁縣) 성내에 1911년 6월에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10월 3일 윤세복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고, 대종교식의 외자 이름인 김진(金振)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동창학교에는 박은식, 신채호, 이극로(李克魯)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14년 1월 3일 대종교 참교가 되었고, 1915년 2월 대종교 총본사(總本司)의 학리부장(學理部長) 및 서무부장에 취임하면서 시교사(施敎師)가 되었고, 이어서 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를 거쳐 대형(大兄)이 되었다.
대종교가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밑에 있는 허룡현(和龍縣)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만주 지역을 무대로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는 등 번창해 나가자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앞서 간도 일본총영사관이 중국 관헌과 교섭해 동창학교 폐지령과 교사 축출령을 내려 학교가 문을 닫기에 이르렀으나, 이후에도 허롱현 삼도구(三道溝)의 청일학교(靑一學校), 둥닝현(東寧縣)의 송화학교(松花學校), 닝안현(寧安縣)의 여명학교(黎明學校) 등에서 10여 년 동안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34년 하얼빈(哈爾濱)에서 대종교 교주 윤세복을 도와 김응두(金應斗)·박관해(朴觀海)·김서종(金書鍾) 등과 대종교 포교기관인 선도회를 조직하여 한인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도왔다.
1939년 안희제(安熙濟)·강철구(姜銕求) 등과 대종교서적간행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종문지남(倧門指南)』 등을 번역, 발행했다. 1942년 발해의 고도(古都)인 무단장성(牧丹江省)의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의 교당인 천전(天殿) 건축을 준비하던 중, 1942년 11월 19일 일제가 대종교 총본사를 습격해 24명의 대종교 간부를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하얼빈 마가구(馬家溝)에서 붙잡혔다. 이른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불리는 대종교 탄압사건이다. 붙잡힌 대종교 지도자들은 닝안현(寧安縣)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취조본부에서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았다. 1944년 4월 27일 목단강고등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5년을 받고 액하(掖河)감옥(일명 티에링허(鐵嶺河) 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입하면서 풀려났는데, 살아남은 이는 6명이었다. 광복 후 윤세복과 함께 닝안현에 대종교 총본사를 재건하고 1946년 2월 환국한 뒤에는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사업을 추진해 1948년 2월 단군전을 중수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하여, 전쟁 중에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