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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 미개척 몽골의 유일한 개척지
자이산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토르 시가지 풍경.
땅은 한반도의 7배, 인구는 270만 명밖에는 안되는 나라.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고 한여름에는 섭씨 30도까지 올라가는, 연교차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물 부족 국가이며, 국토의 30% 이상이 사막인 나라. 누군가는 이런 몽골을 일러 ‘신이 버린 땅’이라 부르지만, 정작 몽골인들은 ‘몽골’이 ‘세상의 중심’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본래 Mongol이란 말은 ‘용감한’이란 뜻의 부족명이었고, 칭기즈칸이 몽골 부족을 통합하면서 민족 전체를 뜻하는 말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몽골을 몽고(蒙古, 우리도 중국을 따라한 적이 있다)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는 ‘어리석고 케케묵은’이란 뜻으로, 주변국을 낮추고 비하해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울란바토르 외곽의 판잣집과 게르촌 풍경.
몽골은 울란바토르를 중심으로 동쪽은 초원지대, 서쪽은 산악지대, 북쪽은 타이가숲과 호수, 남쪽은 사막지대로 이뤄진 복합지형을 띠는 나라다. 많은 사람들이 몽골 하면, 칭기즈칸과 고비사막, 대초원과 유목민이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만일 내게 같은 물음을 해온다면, 나는 ‘길’과 ‘구름’이라고 답할 것이다. 혹은 한숨과 경탄! 아직도 몽골은 여행자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미개척지처럼 남은 곳이 상당수에 이른다. 탐험과 모험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몽골이 바로 그런 곳이다.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풍경의 중심에,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몽골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마치 그것은 경제개발시대로 막 들어선 서울의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
수흐바타르 광장을 지나는 여인들(위). 백화점 앞에서 만난 여대생은 한국말이 통했다(아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중고차가 울란바토르에 다 있다. 어떤 버스는 강남학원 간판을 달고 혹은 서울의 노선을 버젓이 붙이고 시내를 질주한다. 어떤 승합차는 아직도 무슨무슨 태권도학원이거나 유치원이다. 몇 년 전 몽골에서는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울란바토르의 뒷골목은 지금까지도 김두한을 흉내내는 사내들로 넘쳐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몽골에서는 TV를 틀면 언제든 한국의 드라마를 볼 수 있고, 한국에서 건너온 화장품 가게와 한국식 미용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시내에는 따로 ‘서울의 거리’와 한국식 정자인 ‘서울정’도 자리해 있다. 영어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고 있는 울란바토르대학 때문에 울란바토르에서 만나는 대학생들과는 간단한 의사소통도 가능하다.
간단사원의 관음대불전.
그렇다면 한국인이 여행하기에는 괜찮은 곳이군요, 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한 가지 문제만 뺀다면 문제가 없지요, 라는 대답이 맞을 것이다. 그 한가지 문제가 바로 소매치기다. 울란바토르는 소매치기의 천국이다. 울란 현지에 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의 여행자들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울란 시내의 남자들을 절대 믿지 마세요”라거나 “울란에서는 눈이 여덟 개가 필요하죠”라고 말한다. 특히 백화점과 상가에서는 소매치기 무리가 조직적으로 가동된다. 누군가 발을 밟거나 부딪치면, 그 틈을 이용해 누군가는 슬쩍 지갑을 훔쳐낸다. 그 지갑은 금세 바깥의 감시조에게 넘어가버린다. 이 곳의 소매치기 기술이 한국에서 넘어갔다는 일설도 있으나, 믿을 건 못된다.
간단사원 가는 길.
사실 울란바토르에서 소매치기보다 무서운 게 한국 사람이다. 내가 만난 어떤 여행사 대표와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말이 통한다는 것과 한국인이라는 인연을 강조하며 오히려 한국인의 등을 쳐먹는 짓거리를 서슴없이 해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나 또한 피해 당사자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처럼 당한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행사나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홉스골이나 고비를 간다고 했을 때, 이들은 통상적인 경비의 2~3배쯤 바가지를 씌운다.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예약을 해지하면 위약금을 왕창 떼버린다. 심지어 우리 일행은 예약 취소로 위약금을 물고도 여행사에서 제시한 금액의 절반으로 홉스골을 여행하고 왔을 정도다. 물론 이 경우 현장에서 모든 숙소와 차량 수배를 해야 하는 불편이 있지만, 몽골에서 그런 불편은 충분히 감수할만한 것이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우리는 쌀과 밑반찬을 가져가 매일같이 현지에서 밥도 해먹고 라면도 끓여먹었다. 늘 가장 저렴한 곳에서 숙소를 해결했고, 좁은 게르에서 8명이 침낭을 바닥에 깔고 잔 적도 여러 번이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몽골 여행은 잊을 수가 없다.
수흐바타르 광장.
울란바토르의 중심은 수흐바타르 광장이다. 수흐바타르는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과 공산혁명을 일궈낸 인물로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공교롭게 그를 기념해 건설한 광장에서 군중들은 몽골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몽골을 이루어냈다. 울란바토르의 기념할만한 시설들은 대부분 이 수흐바타르 광장을 중심으로 밀집돼 있다. 국립극장과 자연사박물관, 역사박물관, 우체국과 정부청사가 모두 광장 주변에 몰려 있다. 불교박물관으로 변신한 초이진 사원도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다만 울란바토르의 핵심 관광지인 간단사원과 자이산, 복드칸 겨울궁전은 이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자이산의 양꼬치 구이(왼쪽)와 허미 부르는 사람(오른쪽).
울란에 온 외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자이산과 간단사원이다. 자이산은 사회주의 혁명기념 승전탑이 있는 곳으로, 울란바토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노릇도 하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필수 관광코스나 다름없다.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이태준 선생(1883~1921)의 기념공원도 남쪽 기슭에 자리해 있다. 자이산을 오르다보면, 한국의 TV에도 소개된 적 있는 허미(흐미: 배와 목청을 이용해 일상적인 목소리와는 다른 가성같은 음으로 발성하고 노래하는 것) 부르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 울란 시내에서 볼 때, 산비탈에 거대한 칭기즈칸 그림이 그려진 곳이 바로 자이산이다.
간단사원 대법당.
간단사원은 ‘위대하고 성스러운 곳’이란 뜻을 가진 사원으로 몽골이 사회주의를 선포하면서 800여 개의 라마불교 사원을 정리할 때도, 살아남은 사원이다. 과거나 현재 몽골 신앙의 구심적인 노릇을 하는 곳이 간단사원이며, 사회주의 붕괴 이후 몽골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곳 또한 간단사원이다. 특이하게 몽골과 만주, 티벳의 라마불교 건축양식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150여 명의 라마승이 이 곳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관음대불전에 보관된 개안관음상(26미터)은 1996년 복원된 것이다. 울란에는 시내와 외곽에 여러 사원이 들어서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고, 종종 게르를 사원으로 꾸민 ‘게르사원’도 볼 수 있다.
초이진 사원에 모셔진 불상(위)과 초이진 사원 전경(아래).
시내에서 자이산 가는 길에 보이는 복드칸 겨울궁전은 현재 ‘궁전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초이진 사원은 ‘불교박물관’으로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 불화, 의식용 탈과 의상 등이 전시돼 있다. 본래 최고의 장인과 화공이 사원장식에 참여한 사원이므로 건물과 단청, 장식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저 유목민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던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초이진의 전시물이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몽골 불교문화의 아름다움과 화려함, 티벳과 중국의 영향, 한국의 사찰문화와 비교해 보면, 더욱 의미 있는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거대한 육식공룡의 뼈화석.
울란의 자연사박물관은 공룡박물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곳은 고비에서 발견된 육식공룡 타보사우루스(Tarbosaurus)의 거대한 공룡뼈를 실물 전시한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초식공룡의 뼈와 공룡알 화석도 전시돼 있으며, 몽골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야생동물과 조류가 박제돼 있다. 역사박물관에도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다. 키와 바구니, 쟁기, 가래, 낫, 풍차, 쑤기, 인두 등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겼다. 유목민의 생활도구인 아이락 가죽통이나 말안장, 마구, 올가 등과 몽골의 대표 악기인 마두금도 눈길을 끈다. 몽골 전통악기 중 야따크는 우리나라 거문고와 비슷하다.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공룡알 화석. 공룡화석은 대부분 고비에서 나온다.
세계적으로 몽골부족은 1천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중 몽골에는 280여만 명(그 중 80%가 할흐족), 내몽골에 300만, 바이칼 인근 브리야트족이 약 300만, 아프카니스탄에 몇 만 명,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도 할리막족의 일부가 흩어져 살고 있으며, 티베트와 옛 티벳 땅인 칭하이에는 아직도 몽골에서 내려간 꽤 많은 오이라트족이 살고 있고, 터키와 이란에도 몽골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 사실상 몽골은 우리에게 애증이 뒤섞인 나라이다. 인종적으로 우리는 몽골계통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언어학상으로도 우리 말글의 기원은 몽골에 뿌리를 둔 알타이어계에 속해 있다.
역사박물관의 전시물(왼쪽)과 울란 시내의 '서울의 거리'(오른쪽)
몽골은 고려시대인 1231년 1차 침입 이후 여러 번 고려를 침략했고, 직간접적으로 지배를 계속해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몽골은 한국을 경제모델/사회모델로 삼고 있다. 대학에서조차 제2외국어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칠만큼 한국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거 몽골의 침입이 그 원인이 되었든, 애당초 같은 문화권에서 분파된 기원을 가지고 있든, 몽골과 우리나라는 문화와 언어에 있어서도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전통혼례 때 신부가 연지를 찍고 머리에 족두리를 쓰는 것이나 성황당이나 무당의 풍습, 마유주라 불리는 몽골의 술과 우리의 소주,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 사용 등은 그 문화적인 소통과 연대가 분명해보이는 증거들이다.
초이진 사원의 지붕 장식.
몽골의 종교는 티벳불교(라마불교 90%)가 국교나 다름없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아직도 토템사상과 샤먼의식(홉스골 인근에 무당-‘버’-이 많다)이 깃들어 있다. 특히 이들이 아이를 내려준다고 믿는 삼신사상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몽골의 어버는 우리의 돌서낭과 똑같은 모양이다. 우리가 성황제를 지내듯 이들도 어버에 음식과 술을 바치고 어버제를 지낸다. 한국의 설날을 이들은 ‘차강사르’라 하며, 우리나라와 똑같이 아이들이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최대의 명절이 차강사르라면 최고의 축제는 나담축제다. 나담축제는 해마다 7월에 열리는데, 말타기와 씨름, 활쏘기 등 남성들의 힘겨루기와 전투력을 겨룬다.
언어적으로 갖바치, 장사치, 벼슬아치 등 사람을 가르키는 명사 어미에 ‘치’자를 붙이는 것도 몽골과 다르지 않으며, 몽골어의 ‘칸’은 우리가 몽골 지배를 받지 않았던 신라시대의 관직명 간(干)과도 상통한다. 또한 언어학자들은 우리 말의 어디어디로에서 ‘로’가 몽골에서 방향조사로 쓰이는 루(-ru)와 관련이 깊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아래’라는 말과 몽골어의 ‘아라’(사타구니의 뜻)라는 말도 언어학자들이 즐겨 비교하는 말이다. 이 밖에도 올가(오르가, 야생마의 머리를 낚아챌 때 쓰는 올가미가 달린 장대)와 올가미, 아브-아버지, 사등-사돈, 모르-말(제주 방언 몰), 아하-아저씨 등 언어적인 유사성은 곳곳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전세계 어느 나라와도 다른 몽골인의 특성중 하나는 그들 모두가 시를 짓고 낭송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양떼를 모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사원의 승려도, 택시 운전수도 모두 시인이다. 시가 생활화되어 있다. 옛날에는 우리도 모든 과거시험이나 술자리, 일상에서 시를 즐겨 읊었지만, 생활이 서구화되고,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먹고 살기 바빠지면서 시로부터 멀어졌다. 하긴 우리가 멀어지고, 던져버린 것들이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첫댓글 좋은곳이네요,한번 가보고 싶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