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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둘째 주일)
겨울 마음, 겨울 희망!
창15:1~12, 17~18; 시27편; 빌3:17~4:1; 눅13:31~35
오늘 우리는 시편27편을 함께 교독했습니다.(우리는 7절부터 마지막절까지) 오늘 시편에는 시인의 힘들고 고통스런, 절절한 마음과 동시에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혼자 하는 말과 기도가 섞여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대적자들, 원수들, 악한 자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이것은 괴롭히는 자들이 여럿 있음을 표현합니다) 이 대적자들은 시인을 시시탐탐 엿보고, 언제나 덮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적자를 꼭 외부의 적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두려움이라는 자신 내면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1~3절에서 혼잣말을 합니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군대(다수 혹은 압도적인!)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라고 말합니다.
이 싯구를 언뜻 들었을 때, 이 시인은 확고한 믿음 가운데 있구나, 그래서 정말 아무 두려움이 없구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구나 생각 하게 됩니다. 그러나 7절부터 나오는 기도를 보면, 시인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토로합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니,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시인은 기도 속에서 두려움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스캇 펙이 <끝나지 않은 여행>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뇌가 잘못된 것)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
그렇습니다. 이 시인의 용기나 확신은, 두려움 없는 용기나 확신이 아니라, 두려움을 동반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무릅쓰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용기나 확신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마지막에 더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두려움을 동반한, 혹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울려주는 이 시편이 한 주간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내내 뉴스를 접하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내는 거친 소음들을 보면서, 목사들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거칠고 폭력적인 말들을 접하면서, 화도 나고 마음도 몹시 심란했습니다. 그런 중에 호수공원에서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산수유 꽃을 보았습니다. 매년 봄이 시작되면 보여주던 꽃인데, 올해는 더할 수 없이 반가웠습니다. 추운 잿빛 겨울에 어쩌면 이렇게 노란 색을 품고 또 품었다가, 이렇게 추위도 채 가시기 전에 이런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을까?
그러면서, 우연히 박노해 시인의 “겨울날의 희망”이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우리 희망은, 긴 겨울 추위에 얼면서/ 얼어붙은 심장에 뜨거운 피가 돌고/ 얼어붙은 뿌리에 푸른 불길이 살아나는 것// 우리 겨울 마음을 가질 일이다/ 우리 겨울 희망을 품을 일이다.”
겨울 마음, 겨울 희망! 겨울 한복판에서 봄이 오기 전에 봄을 사는 마음, 희망이 있기 전에 앞당겨 만나는 희망이겠지요! 비록 잿빛 겨울의 우울함이 엄습하고, 추운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대는 그 겨울의 한복판에서, 노란색을 품고 또 품으며 기적처럼 한 겨울을 견디어낸 산수유꽃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편 시인의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라는 싯귀가 같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이 시인도 얼마나 긴 겨울에, 겨울 마음, 겨울 희망을 품고 그 거칠고 추운 시간을 지냈을까? 마음이 갔습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겨울 마음, 겨울 희망을 갖는 시간입니다. 오늘 시인들처럼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을 마음에서 품고 또 키워내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겐 그 중심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자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시편 시인은 자신에게는 오직 깊은 소원이 있다고 하면서, “한 평생(한 평생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주님의 집에 사는 것(머무르는 것), 주님의 자비를 겪어 보는 것(<노암 아도나이>친절, 기쁨, 행복함),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는 것(성전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바케르> ‘쪼개다’라는 말에서, “세밀히 관찰하다, 보살피다(돌보다), 깊이 생각하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겨울 마음, 겨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며 길이기도 합니다. (1)주님의 집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의 바탕, 원천과 잇닿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깊은 중심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침묵 가운데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본연의 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드러난 가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보면, 가지가 무성하네, 가지가 병들었네, 열매가 실하네, 말라비틀어졌네, 수많은 비평들이 올라올 것입니다. 특별히 옆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우리는 계속해 비교하고, 그것을 모방하고, 판단하느라, 마음은 계속해서 잔가지들 마냥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탕, 원천과 잇닿는 것은, 우리의 삶이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거기가 원천이고 바탕이구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소홀히 하고 거의 돌아보지 않는 바로 그 지점이 거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이지 보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라는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이 좀 아래로 내려가야 가능합니다. 스티로폼 같아서는 늘 가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빙산처럼 깊이 잠겨야 합니다.
(2)시인은 그러는 중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 친절, 행복함을 겪어보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자비, 주님의 기쁨, 주님이 주시는 행복감”은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일시적으로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서 행복을 느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쓸데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을 때 잘 누리고 잘 사용하면 됩니다. 그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있을 때 잘 누리며 잘 사용하고, 없을 때도 행복을 잃지 않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던 것들이 사라지면(그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더 큰 결핍으로 고통을 받고 더 큰 불행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 주님의 기쁨, 주님이 주시는 행복감”(존재에서 오는 행복,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원천과 바탕을 알아차려야 가능하겠지요. 시인은 그래서 주님의 집에 머무르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3)그리고 나서 시인은 성전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을 소원합니다. 세밀히 살펴보고, 보살피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성전에서”라는 말은 “마음 깊은 곳에서”라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좀더 깊은 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생각에 매몰되어 같이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말했던 “살핀다,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사순절을 지킨다는 것은 억지로 고행을 하고 교회의 의무사항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observance(규칙 준수)라는 단어는 본디 –serv- “양을 보살피다, 지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observe(관찰하다, 주시하다)도 같은 어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순시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영혼의 양들에 눈길을 두고, 어느 양이 방황하거나 무리에서 뒤떨어지거나 제대로 풀을 뜯지 못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을 잘 관찰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란한 마음들, 우리의 우울함, 우리의 결핍감이나 열등감, 우리의 중독증상과 금단현상들을 잘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빨리 제거할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켜보면서 이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살피는 것, <바케르>의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 깊은 곳에서 우리를 향해 속삭여 주시는 “사랑받는 자야! 나는 네가 좋다”라는 음성, 그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받는 자야! 나는 네가 좋다”라고 울려주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15장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나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고 말씀하지만, 아브람은 대뜸, “주님께서 저에게 뭘 주시겠습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풀어놓지요. 저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다마스쿠스에서 온 엘리에셀을 양자로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대를 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람은 밤중에 바깥으로 나갑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떠 있습니다. 별들을 보는데, 하나님이 저 별들처럼 네 자신이 많아지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것은 자신의 깊은 소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집,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온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남습니다. 언제나 그 땅을 차지하게 될는지...
아브람은 희생제사를 드려도 보았지만, 여전히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습니다.”(12절) 그럼에도 오늘 이야기를 읽어보면 아브람은 겨울 마음, 겨울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는 겨울을 견디는 생명의 꿈틀거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을 놓지 않고 있음을 잘 드러납니다. 수많은 의심과 불신 속에서도,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쪼갠 희생제물 사이를 주님께서 지나가시면서 언약을 세우십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주님의 집에 머물고 있고, 주님의 기쁨, 친절을 맛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전에서(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영혼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세심히 살피고 보살피는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시편 시인이 노래했던,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마음속에서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러 주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꽃피는 얼굴이 좋다면, 우리 겨울 침묵을 가질 일이다// 빛나는 날들이 좋다면, 우리 겨울밤들을 가질 일이다”라는 또 다른 시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서에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여기를 떠나라고 조언하는 데,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곧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이전부터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던 곳이고,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헤롯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음을 아셨기에, 주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순전하고 결연한 의지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의 숨겨진 목소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의 이 마음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시편 시인이 말했듯이 “한 평생(한 평생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주님의 집에 살면서(머무르면서), 주님의 자비(친절, 기쁨, 행복함)를 겪어 보고,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는 것(성전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세밀히 관찰하다, 보살피다, 깊이 생각하다”)을 그대로 실행했던 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겨울 마음, 겨울 희망을 잃지 않았던 분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때는 우리가 세상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사는 날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의 비천한(낮은)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을 가질 날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고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이어서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의 삶을 모방해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 간 것처럼, 여러분도 한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굳건히(확고하게) 서 있다”는 말, <스테케인>은 초소를 지키는 군인이 경계를 설 때, 또는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가 출발선에 서 있는 자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확고하게 서 계십시오.” 추운 겨울날에도 우리의 바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