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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1-11
▣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요한복음 12장-
이 장은 풍성한 장이므로 우리는 단지 두드러진 요점들만을 다를 뿐이다. 요한은 십자가에 앞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에 있어서의 마지막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와 그외 친구들(12:1-11)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베다니의 잔치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14장 3절은 분명히 예수께서 치료하신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의 일임을 말하고 있다.
마르다는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의 식사 때와 같이 화를 내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눅 10:38-42). 과거에 그녀는 그리스도와 나사로, 마리아와 자신의 4명 분을 준비했었으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열 두제자, 나사로, 마리아, 시몬과 자신을 위해 17명 분의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불평이 없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활을 조정하시도록 내어맡기는 비결을 배웠다. 11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마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며, 마리아는 예배를 상징하고, 나사로는 우리의 행함과 증거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보통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될 수도 있다. 마리아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부어드리기 위해서 비축하여 두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죽기 전에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 그녀는 이 향유를 오라비가 죽었을 때에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의 것을 아껴 두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보일 때에는 항상 비난의 소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유다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으므로 그의 입술은 잘못된 것을 말하였다. 우리의 변호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마리아를 변호하시는지를 보라(요일 2:1).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스가랴 3장에서도 역시 우리는 사단이 여호수아를 비방하나 주님께서 그를 옹호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모범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그리고 비판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기울여서 드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예배로 인하여 그녀를 높이셨으며(막 14:7)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옹호하셨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 소유의 집을 사려고 금고에서 돈을 훔쳐왔을 것이다. 사도행전 1장 18절의 “밭“은 “소유지, 농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유다가 되돌려 준 은 30전으로 제사장들이 매입한 공동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유다는 은거하려고 하였다. 그는 세상을 얻고, 자기의 영혼을 잃었다."
요 12:12-36
2.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들(12:12-36)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동방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왔었는데, 이제 그가 죽으실 때에도 이방인들이 다시 온다. 이 시점에서 요한이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그 왕이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하셨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 !“(마 12:38)고 말했으나, 이방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보리라 !“고 말한다.
빌립은 헬라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빌립에게로 왔다. 그리고 빌립은 역시 헬라 이름을 가진 안드레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갔다(요한복음에서 안드레가 나올 때마다 예수께로 누군가를 데려가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영혼구원자의 실례이다/ 1:40-42/6:8-9/12:22).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들리울 것“을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10장 5절과 15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피하라고 가르치셨으나, 이제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열매 맺을 수 있기 전에 죽어야만 하는 밀알이시며,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로 이끌어지기 전에 들려져야만 했다. 여기서의 모든 사람이란 “예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종적인 차별이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2장 5절에서 처음 언급하셨던 “때“에 대해 다시 말씀하시며(23, 27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였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의 때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나“ 초대하셨음을 주목하자(26절). 배경이란 십자가 아래서 동일하다. 여기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로마인이나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
요 12:37-50
3. 그리스도와 유대인(12:37-50)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의 마지막 말씀들은 구원의 기회를 지나게 하는 데에 대한 두려운 경고이다(35-3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그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숨으신이유와 유대인들을 정죄하신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증거를 거절하였다(37절). 빛이 수 년간 비춰왔으나, 그들은 그 빛을 믿고 따르기를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해서 거절하는 데 대한 두려운 결과들을 눈여겨보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37절).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39절). 이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일축해 버렸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믿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40절). 이사야 53장 1절은 이들의 불신앙을 예언하였으며, 이사야 6장 10절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말하였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은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시며 마음을 굳게 하심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이 구절은 성경에서 일곱 번 발견되는데, 그 때마다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사 6:10/마 13:14/막 4:12/눅 8:10/요 12:40/행 28:26 /롬 11:8).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영적인 기회들을 경시할 수 없다는 반복적인 경고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주를 찾을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우리는 앞에서 빛과 어두움 간의 갈등에 대해 주목했었다. 빛은 구원과 거룩함, 생명을 상징하며, 어두움은 정죄와 죄, 죽음을 상징한다. 요한은 어두움의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심령의 어두움(1:5-8/1:26)-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사단으로 인해 소경이 되었으며(고후 4:3-6),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한다.
-도덕적 어두움(3:18-21)-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사랑하고 빛을 미워한다.
-판단력의 어두움(12:35-36)-빛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서 숨기신다.
-영원한 어두움(12:46)-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42-50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빛을 거절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절하는데(42-43절),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서, 목록의 서두에 “두려워함“을 기록하고 있다. 48절에서 그리스도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정죄로 인도함을 진술하신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 오며(요 5:25), 심판 때에 바로 그 말씀이 오늘 거절한 사람들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48절/ 계20:12).
이 장은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을 기록함으로 끝맺는다. 이것은 엄숙한 장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기회를 경솔히 여기지 말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빛은 항상 비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어느 날 그의 구원이나 그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실 것이다. 잠언 1장 20-33절은 이 점에 대해 읽는 데에 유익한 구절이다.
▣ 12장 32절에 대한 설명
“들려진다“는 것은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의미이다(33절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의미로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높이 들도록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고 있으며, 어느 목회자도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치 않는 것은 확실하다."
요 13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장-
본 장을 1장 11-12절, 12장 36절과 대조해 보면, 이제 요한복음의 새로운 부분에 들어섰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땅(세상)에 오셨으되 자기의 백성이 그를 거절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공적 사역으로부터 떠나셔서 개인적으로 “자기의 사람들“, 즉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13-17장은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락방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으심과, 그 후에 제자들이 해야 할 사역에 대해 준비시키셨다. 13장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3가지의 중요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겸손에 대한 교훈
1. 겸손에 대한 교훈
발을 씻기신 것은 규례가 아니라 한 모범이었다(15절). 동양에서는 노예들이 방문자의 발을 씻겼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종의 위치에 서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길지라도 그들의 주님이실진대, 그들이 서로의 발을 씻기며 서로 겸손히 대해야 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신다(13-16절). 이것은 열 두 제자들에게는 따끔한 꾸지람이었다. 이들은 바로 그 날 저녁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투었기 때문이다(눅 22:24-27 참조).
1-5절에서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가 하늘을 떠나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에 하신 일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그의 영광의 외모를 버리고 종이 되어 사람들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셨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는 이 단계들이 아름답게 요약되어 있다. 발을 씻기신 후에 그리스도는 옷을 입고 자리에 앉으셨는데(12절), 이것은 그의 부활과 영광으로의 승귀와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오르심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수 년 후에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서 이 겸손에 대한 교훈을 회고해야만 했다(이 구절들을 주의깊게 읽어 보라).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정받기와 지위를 위해서 쟁론하는데, 이 겸손에 대한 교훈을 회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거룩함에 대한 교훈
2. 거룩함에 대한 교훈
8절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중요하다. “만약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교제)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에는 차이점이 있다. 베드로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와 연합(union)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죄는 주님과의 교제(communion)를 파괴하였다.
“아들됨“과 “친교“에는 차이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도록 내어맡김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며 그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누릴 수 있다.
10절에서 그리스도는 “씻음“과 “깨끗함“에 대해 중요한 구분을 짓고 계신다. 직역을 하자면 “온 몸을 한 번 씻은 사람은 발밖에 더 깨끗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동양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공중 목욕탕을 사용하는데,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 흙길을 걸어가므로 발이 더러워진다. 집에 도착하면 그들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으나 다만 발만은 씻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구원받으면 그는 온 몸을 목욕한 것이다(고전 6:9-11/딛 3:5-6). 그가 일상적인 죄들을 주님께 고백할 때에 그는 그의 행함(걸음)이 깨끗하도록 그의 발을 씻는 것이다(요일 1:7-9).
구약의 제사장들이 임명받을 때에 온 몸을 씻는다는 것을 기억하자(출 29:4). 이것은 우리가 온 몸을 씻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물대야를 준비하셔서(출 30:17-21), 그들이 손발을 씻는 데에 매일 사용하도록 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를 깨끗케 하신다(엡 5:25-26/요 15:3).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을 찾아내도록 맡기며(히 4:12), 그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는 발을 깨끗케하여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시 119:9).
이렇게 매일 깨끗케 함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유지해 준다. 이 교훈이 구원을 얻거나 “잃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기억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친교의 문제이다. 많은 무지한 신자들이 베드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범했다(9절). 그들은 다시 구원받기를 원한다."
위선에 대한 교훈
3. 위선에 대한 교훈
유다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의 하나인 양 가장하고 다락방에 있었다. 10-11절에서 그리스도는 그들 중의 한 명은 구원받지 못했음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유다의 속임수는 매우 교묘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위선자인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먼저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셔서(18절) 그가 배반당할 것을 알리셨다. 그리스도는 유다의 발을 씻기셨으나 이제 유다는 그리스도를 향해 발꿈치를 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다를 도구로 사용한 사단을 패배시켰다(2, 27절). 사단은 먼저 마음 속에 생각을 심어 두었고, 그의 삶을 조절하기 위해 그에게로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열 두 제자에게 그들이 불신앙 속에서 비틀거리지 않게 하려고 이 구절을 인용하셨다(19절). 말씀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의해서 낙심하게될 수가 없다.
21절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 중의 한 명이 그를 배반하리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사실상, 이 선언은 유다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에게 말씀을 인용하여 들리셨으며, 이제 공개적으로 그를 경고하셨으므로, 유다에게는 그의 마음을 바꿀 만한 모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그 비밀을 알아내고, 베드로에게 그것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주님의 말씀의 참 뜻을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28절).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비밀을 발견한다는 데에 주목하기란 재미있는 일이다.
유다가 적신 빵조각을 받았을 때, 그는 마침내 사단에게 굴복하였고, 사단이 그에게로 들어가 유다를 마귀의 자녀로 만들었다(요 8:44). 성령의 사역처럼, 사단은 인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사역하며 그에게 굴복하게 한다. “밤이었더라“(30절)는 것은 유다의 마음이 어두운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 때는 어두움의 권세가 활동할 때였다(눅 22:53).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가복음 14장 21절에서 예수께서는 “차라리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그리스도인인 체하였고, 죄와 더불어 활동하였으며, 구원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어떠한 사람도 그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유다를 둘러싼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고의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6장 66-71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유다에게 경고하시며 “마귀“라고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유다가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그에게 경고하셨다. 24절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는 데에 열심이었으나, 이제는 자기의 죄를 직면해야 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베드로의 교만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음을 보여 준다. 자기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다. “네가 후에 나를 따를 것이라“(36절)는 말씀은 아마도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신 듯하다(요 21:18-19/벧후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