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유래
[정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일대에서 단오에 왜적을 물리친 한장군(韓將軍) 오누이를 추모하는 자인단오굿의 하나. 원래 한장군은 이 지역 단오굿의 중심행사인 여원무(女圓舞)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으로, 1969년 자인단오굿 때 밝혀졌다. 그해 한장군놀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 단오에 한장군문화제가 열리게 되었다.
[유래]
경북 경산시 자인 지역에는 예부터 한장군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왜의 무리가 도천산에 자리 잡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때 한장군은 개략을 써서 왜의 무리를 잡아없앴다는 내용이다. 도천산 밑에 버들못이 있는데, 장군은 여자로 가장하여 누이동생과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못둑에서 춤을 추었다. 꽃관을 쓰고 춤을 추는 둘레에는 광대가 늘어서서 놀이를 벌였으며, 풍악을 울려 흥을 돋우고 못에는 화려하게 꾸민 배를 띄웠다. 둘레에는 어느덧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춤과 가락은 한결 흥겨워졌으니 이것이 곧 여원무이다. 장군의 뜻대로 구경꾼 중에는 도천산에서 내려온 왜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의 신기함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겨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한장군이 큰소리로 외치자, 함성이 일어나는 동시에 왜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춤의 주인공은 장군으로 바뀌어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하고 외쳤다. 무당과 구경꾼들의 손에는 모두 비수가 번쩍였다. 그물에 휘말린 왜의 무리들은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춤추던 사람도 구경하던 사람도 모두 한장군이 미리 배치해 둔 무사요, 칡으로 만든 그물도 미리 깔아 둔 것이었다. 왜의 무리들은 몰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의 무리들을 벨 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斬倭石) 혹은 검흔석(劍痕石)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기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지내고 놀이를 하였다.
한편, 한장군의 실존 연대를 『자인읍지(慈仁邑誌)』에는 ‘신라와 고려시대[羅麗之間]’라고 했으며, 임진왜란 때 자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청주 한씨라는 주장과 고려 충렬왕 때 좌정승을 지낸 한종유(韓宗愈, 한양 출신)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한장군이 신라 혹은 고려시대 사람이라고 전해올 뿐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지역에서는 한장군이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왜구를 물리쳐 태수가 된 실존인물이며, 자인 지역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어 왔다.
『자인읍지』와 임진왜란 때 자인의 의병장 최문병의 실록에 나타난 기록, 도천산성의 자취, 버들못가의 참왜석, 통일신라 유물이 출토된 삼정지안의 한장군 무덤, 자인의 계정숲(경상북도 기념물 123호) 안의 진충묘, 마곡리의 진충당으로 보아 한장군을 실존 인물로 믿고 있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듯 보인다.
내용, 의의
[내용]
자인에서는 단오가 되면,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현 자인초교 부근)에 모여 가장행렬로 진장터 광장까지 와서 여원무(女圓舞)를 올리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린 후 다시 현사로 돌아와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한다.
한장군놀이는 여원화를 쓰고 오색 채의(彩衣)를 입은 한장군 남매를 앞세우고 민호장(民戶長)과 사또가 따르는 가장행렬로 이루어진다. 이 가장행렬(호장굿)은 규모가 대단하여 필요한 구성 인원만도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 청룡기, 백호기, 나대유풍기(羅代遺風旗), 영기(令旗)를 든 사람과 농악대, 여원화 2명, 감사뚝, 군노 2명, 사령 2명, 포장(砲將), 포군 20명, 영장(營將), 기생전배(前陪) 4명, 중군(中軍), 삼재비(세민풍악), 전배통인(前陪通引), 일산(日傘) 및 파초선(芭蕉扇), 도원수 인배통인(印陪通引), 수배(隨陪)[독축관(讀祝官)]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가장행렬도 자인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기의 수와 참여 인원이 많이 줄었으며 복장도 바뀌고 행로도 달라졌다.
한장군놀이는 한장군을 추모하는 행사이므로 주가 되는 것은 한묘제사이다. 가장행렬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제사를 모시는데, 그 중 진충묘 제사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제사는 유교의식으로 거행되며, 이는 한장군이 실존 인물임을 나타내는 근거가 된다. 제사에 관한 기록이 남은 것은 정충언 현감 이후이다. 진충묘의 위패는 ‘증판서한장군신위(贈判書韓將軍神位)’이다. 제사는 먼저 정충언 현감이 지은 축문을 읽고, 동자가 영신사(迎神詞)를 낭송한다. 다음에는 유교식 홀기에 따라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로 제사를 모신다. 근래의 제사는 축문을 생략하고 영신사를 읽은 후 홀기대로 제사를 모신다.
여원무는 한장군이 왜구를 유인하기 위해 누이와 함께 꽃관을 쓰고 춤을 춘 데서 유래한 것이다. 먼저 회랭이(무당)의 아들로 13~14세 소년을 여장시켜 여원무가 시작되기 전에 나아가 춤을 춘다. 여장동남의 춤이 끝나면 먼저 높이 10척(약 3미터)의 여원화를 쓰고 땅에 닿는 오색 채의(치마)를 입은 2인의 관무부(官巫夫)가 중앙으로 나아가 덧배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그 속에 무부가 숨어 있는 채의는 화관에 달렸으며,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여원화의 주위에는 30∼40명이 원진을 치고 역시 덧배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여원화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많은 금기가 따른다. 단오제를 지내기 전에는 꽃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나, 단오제가 끝나는 마지막에는 모두들 꽃송이를 따가려고 한다. 이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 제액, 치병의 효험이 있다는 믿기때문이다. 이 행사가 끝난 뒤에는 여흥을 돋우고자 팔광대, 말달리기, 씨름, 그네뛰기가 이어진다.
1980년대에는 자인팔광대를 비롯하여 자인 큰굿, 자인큰줄땡기기 같은 새로운 자료 일부가 발굴되었고, 1991년부터는 한묘제사, 여원무, 호장굿(가장행렬), 자인팔광대, 무당굿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1996년에는 경산시가 후원하여 자인단오-한장군놀이-로 명칭을 정하고, 격년제로 하던 것을 매년 경산시민들의 축제로 열고 있다. 1997년 이후 민요, 씨름, 그네, 창포로 머리감기 같은 민속적 요소를 덧붙여 자인단오굿으로서 한장군놀이를 재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의]
한장군놀이는 예부터 자인 지역에 널리 전해온 한장군(韓將軍) 남매에 관한 이야기가 놀이화된 지역 축제이다. 자인에서는 역사 속의 한장군을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한 실존 인물로 믿고, 촌락마다 수호신으로 삼는다. 그러나 장군의 이야기는 영남 지역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는 장군이나 장수 전설과 같이 의역사화(擬歷史化)로 볼 수 있다.
한장군의 남매가 춘 여원무도 농경의례에서 오신(娛神)행사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시대의 고분군과 출토품, 장산사령기(獐山司命旗), 한장군 사당이 원래는 동제당의 신당이었다는 점, 그 신위가 영남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남매신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점(누님이나 누이로 나타나는 신격은 곡렴과 곡모와 관련 있는 신격으로 생각된다), 한장군 나이가 17세의 동자(대종동), 혹은 42~43세의 장년(자인), 혹은 백발노인[現夢時] 등으로 구전된다는 점, 그리고 제의가 무불유(巫佛儒) 방식을 혼용하고 있다는 점과 여러 가지 마나와 타부가 혼재한다는 점과 같은 유무형의 자료를 통해 그 기원과 함께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에 자인의 세시풍속에는 농경의례적인 요소로 보이는 내농작(內農作), 서리짓게, 줄다리기 등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한장군놀이 시기도 우리의 전통 명절인 음력 오월 단옷날이며, 이날 한장군의 추모제사, 여원무와 배우잡희(팔광대), 단오굿, 줄당기기, 씨름, 그네 같은 민속행사가 한바탕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