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 꽝! 꽝!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포격을 가해왔다. 38선을 넘어왔다. 이게 6.25 전쟁의 시작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38선을 넘어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포격을 가해왔다. 이게 6.25 전쟁의 시작이다.
‘38선’은 무엇인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그 이남은 미군이 진출하고, 그 이북은 소련군이 진출하기로 약속한 군사분계선이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 사령부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 설정한 경계선이다.
한국군은 밀렸다. 제1사단 제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고,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물러나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맞섰으며,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방어전을 펼쳤다.
6월 26일, 제1사단의 동쪽으로 제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도 취약해졌다. 북한군 제6사단이 더 강하게 공격해왔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나고,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물러났다.
6월 28일,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를 점령하고 서울 양천구까지 밀고 내려왔다. 한국군의 제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 봉일천은 서울시와 고양시에 인접한 파주시 조리읍의 중심구역이다.
그때, 한국군은 전쟁을 예견하고 대비하고 있었을까? 전혀 아니다.
38선의 남쪽 개성지역은 한국군 제1사단의 경비구역이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까지 무려 80km를 경비하고, 제13연대는 개성에서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를 경비하며, 예비부대인 제11연대는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은 불합리한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에 따라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방어 훈련도 새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제1사단은 그 훈련 진도가 늦었다. 제11연대와 제12연대는, 전술훈련을 막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고, 제1대대는 자하리(紫霞里) 부근에서 야외훈련 중이었다.
한국군은 병력 1/3은 휴가를 떠났고, 나머지 병력도 1/3 범위 내에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갔다. 결국 57%의 병력이 부대를 벗어난 상태였다.
경비 상황은 어떠했을까? 제12연대의 방어 정면이 80km인데, 방비할 병력은 겨우 800여 명이다. 제3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서쪽 청단군 금학리 부근의 읍천(邑川)에서 동쪽 예성강 건너 개풍군 전포리(錢浦里)까지 54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초소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였다.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서쪽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의 북쪽을 지나고,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靑鶴洞)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6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초소와 초소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 제13연대의 경비구역도 대원리(大院里) -소반고개 -판문점 북측 지역 –두매리 –조금리 –고랑포리 –원당리(元堂里)의 거리가 20km이다.
전투 장비는 어떠했을까? 보유 차량은 모두 기지창으로 후송되었고, 제11연대의 공용화기인 60mm 박격포와 81mm 박격포도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된 실정이다. 열악한 장비였지만, 그것마저도 병사들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4월 22일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그는, 부대 실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고급간부 교육에 소집되어,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을 대리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사단장을 비롯하여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전쟁에 대한 경각심은 없었다.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한군은 전쟁 준비는 철저하다.
북한군은 적성 북쪽 △137로부터 서쪽으로 △282(대원리-송악산 개성) -△325(백천) -△120(연안 북쪽) -△98(청단 북쪽) 등 감제 지역에 진지를 편성했다. ‘△137’는 137고지, ‘△98(청단 북쪽)’은 98고지 청단 북쪽인 듯하다.
특히 개성 시가지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제1, 제2, 제3 경비여단을 엄호하게 했다. 그 후방 남천에 제1사단(사단장 최광 소장) 예하의 제1, 제2, 제3 연대와 포병연대까지 세 겹으로 배치했다. 그 병력도 무려 2만 1천 명에 이른다.
전투 장비는 어떠했을까? 122m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총사령부 직할,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자주포 32문 등 소련제 무기를 갖추었다.
한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렸다. 21,000명 대 800명의 병력 규모에서 밀리고, 소련제 무기의 막강한 화력에서 밀리고, ‘조국 해방 전쟁’이라는 전쟁 명분에서도 밀렸다. 일방적으로 밀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등줄기에서 땀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