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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본론 1. 생애 1)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1832) 2)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 2. 배경 1) 19세기 영국의 사회상 2) 사상적 배경 3. 공리주의 1)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2) 밀의 질적 공리주의 4. 공리주의의 영향과 한계 1) 영향 2) 한계 Ⅲ. 결론 |
Ⅰ. 서론
18․19세기의 서양 사상사의 주된 흐름은 15세기 재등장한 유명론, 르네상스, 경험주의와 계몽주의라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신으로부터 이성의 독립을 어느 정도 이룩한 시기였다. 동시에 사회적․경제적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안겨준 시기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영국 철학은 흄 이후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주목할 만한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도덕과 정치철학에서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영국이 전세계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통치할 때 도덕 및 정치철학은 자신들의 대외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1)
Ⅱ. 본론
1. 생애
1)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1832)
벤담은 런던에서 태어나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영국 법정에서 일을 하였다. 벤담이 공적인 도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던 부정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윤리, 정치, 법적 문제들에 대한 방대한 글을 남겼고,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는 데 매우 노력했다. 따라서 그는 ‘철학적 급진파(Philosophical Radicals)’라는 조직을 이끌어 감옥, 검열, 교육, 성(性)과 관련한 규율, 공적 제도에서의 부패 등을 척결하고자 했던, 즉 좌파 자유주의의 사회정책에 바탕이 된 것들에 대한 자유주의 개혁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벤담은 주로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1792년 새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고 유럽과 미국에 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벤담은 대개만성형의 사람이었고 대부분이 사람들과는 달리 나리가 들면서 점점 더 급진적 입장을 취했다.
1820년대 초반 죽음을 몇 해 앞둔 그는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라는 잡지를 출간하였고, 이 잡지는 이후 ‘선진적인’ 사상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토론의 기회를 제공했다.2) 한 때 토리당을 지지한 적이 있었으나 계몽주의 정치이론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자가 되었다. 말년의 벤담은 그의 은신처인 퀸즈 스퀘어 플레이스의 자택에 칩거하였고, 1832년 세상을 떠났다.3) 현재 그의 시신은 런던대학4)의 본부 로비에 평상복 차림으로 방부 처리되어 유리함에 전시되어 있다. 최근까지 이 유리 전시관에는 “현존하지만 투표하지 않는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고 하니 그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
① 밀은 오직 아버지에게서 배웠을 뿐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역사가로 유명한 제임스 밀(James Mill)로서 밀을 아주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가르쳤다. 밀은 그리스어, 라틴어, 산수, 역사 등을 배웠고 벤담의 가르침 아래 공리주의의 영향 아래 자랐다. 17세의 나이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인도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후, 1858년까지 일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너무 그의 삶을 강력히 지배했기 때문에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정을 경시하고 이성(理性)을 만능으로 보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을 읽고 생시몽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회주의학파를 연구했다. 이 때 그는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의 글을 처음 일게 되는데 이후로 그는 콩트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다. 1830년 여름, 밀은 파리를 여행하던 중 7월 혁명을 직접 체험한다. 그 직후 밀은 해리엣 테일러와 처음으로 교제하게 되는데, 20년 뒤 그녀가 남편과 사별한 후 둘은 결혼하게 된다. 1830년 밀은 그의 첫 주저 『논리학의 체계』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저서는 1843년 출간된다. 1848년 그의 두 번째 주저 『정치경제학의 원리』가 출간된다. 밀 자신은 『자유론』(1859)을 자신의 대표 저서로 생각했다. 1861년 그가 잡지 《프레이저스 매거진》에 연작으로 기고했던 도덕철학적 고찰은 2년 후 책으로 출판되었다(『공리주의』). 1865년에서 1868년까지 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는 『여성의 예속』(1869)을 통해 성의 평등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가 된다. 밀은 1873년 5월 8일 아비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에 그의 자서전이 사후 출간되었다.5)
2. 배경
1) 19세기 영국의 사회상
18세기는 낙관주의의 시대였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주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능력은 끝없이 발전하여 인류 사회는 밝은 미래를 바라보게 외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가져온 과격한 사회변혁들은 역으로 낙관주의에 큰 타격이 되기도 했다. 미국의 독립혁명(1776)이나 프랑스 혁명(1789), 영국의 산업혁명(1760년대부터 시동) 등이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세계사의 주무대를 대서양으로 옮겼으며, 프랑스혁명은 시민계급을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시켰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사건들의 결과가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8세기의 낙관론은 19세기에 들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 압제에서 해방하려고 일으킨 혁명이었으나 자코뱅 당의 과격성으로 반동이 일어나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압제자 나폴레옹을 불러들였고 이로 인한 나폴레옹 전쟁(1792-1815)은 유렵전역에 민족구의를 자극하여 보다 큰 전쟁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장의 평화와 풍요보다는 인구의 도시집중과 도시민의 궁핍화, 그리고 격심한 빈부차를 가져왔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 악화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차티스트운동 등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사회계급을 탄생케 하였다. 19세기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봉건적 잔재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주의, 자본주의는 질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6)
2) 사상적 배경
공리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근본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영국의 경험론이다. 공리주의는 이기적인 개인이 어떻게 사회적인 이익과 선에 부합되도록 행위 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학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쾌락과 고통이라는 심리학적 명제를 기본적 분석도구로 삼았다. 공리주의가 의존하는 심리학적 방법인 이른바 '연상심리설'과 '쾌락주의설'은 흄의 인식론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있었으며 로크, 홉스, 베이컨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흄에 있어서는 의지작용과 행동은 결국 감정의 기계론적 결합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인상은 일정한 쾌와 불쾌의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어떤 대상이 나에게 쾌감을 일으키게 할 때는 이를 도덕적으로 시인하게 되며 나에게 불쾌감을 줄때에는 이를 도덕적으로 부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이 나에게 쾌감을 주어 도덕적인 시인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것이 유용(Useful)하기 때문이고, 유용하다는 것은 곧 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용하기 때문에 느껴진다는 도덕적 시인의 느낌은 나에게는 유용하지만 타인 혹은 사회전체에는 해악이 되는 행동과 타인 혹은 사회전체에는 유용하지만 나에게는 해악이 되는 행동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는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동정(Sympathy)'과 '자선심(humanity)' 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이 같은 흄의 심리학적 방법을 빌려서 이기적인 개인과 사회적인 선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대립관계를 조절하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려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리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영국의 경험론에 있어 중요한 점은 공리주의사상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기초개념으로서 심리학적 방법을 택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감정을 그 분석도구로 삼음으로써 공리주의 정신에 평등의 개념이 내재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7)
3. 공리주의
1)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알아보기에 앞서 그 철학적 기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자아인식과 도덕론의 주된 원천이었다고 파악했는데, 그 영향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에게 종교는 신의 위대함과 전능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매우 저열하게 평가하는 근본적으로 반(反)인간적인 것이었다. 또한 종교가 가르치는 도덕이 경험적 조사나 이성적 논증을 배제하고 신의 권위에 입각한 것이므로 결국은 종교 지도자의 상상 혹은 편견의 산물이라 여기고 그러한 종교에 기반한 도덕은 비자유주의적이고 전제적이라고 평가하였다.8)
벤담은 매우 강렬한 反종교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이에 공리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벤담의 윤리론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그의 윤리론은 인간본성의 경향과 욕구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외부에서 혹은 초월적이라고 주장된 원천에서 나온 요구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윤리론은 도덕 과학이어야 한다. 윤리론은 과학적 인식에 기반하고 그 도덕률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그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성격일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의도는 주관적인 데 비하여 결과는 객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결국 벤담의 윤리론은 “결과를 문제삼는 합리주의적 도덕체계”인 것이다.9)
이처럼 벤담의 공리주의 윤리론은 행위의 정당성 여부는 행위의 결과가 좋고 나쁨에 달려 있다는 결과론으로 이는 일반적 도덕론10)과 대조된다.
<<도덕 및 입법 원리 입문>>에서 벤담은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 주는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지적해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고통의 회피 혹은 쾌락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당위의 근거로 삼고 있다. 즉 심리학적 사실로부터 공리성의 원리로 나아간다. 그에게 있어서 공리성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란 “무슨 행위이든 그것이 행복을 증가시키는 경향을 가졌느냐 아니면 ……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용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벤담은 자신의 이론에 수학적 엄밀성을 기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쾌락과 고통의 총량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이 총량들의 값을 계산해야 하며, 또 실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특정한 쾌락과 고통의 가치와 그것을 산출하는 행동에 관하여 선악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는 쾌락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강도성, 확실성, 근접성, 지속성, 다산선, 순수성, 범위의 일곱 가지가 그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계량을 하기 위해서 쾌락 자체에 아무런 질적 차이를 두지 않고 오직 양적 대소만을 인정하고 쾌락은 양적인 차이만으로 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라 한다.11) 이 원칙에 의해 만일 모든 행위들이 동일한 쾌락의 양을 산출한다면 그것들은 동등한 선이라는 설명이 가능해 지고 따라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공리의 원칙은 행복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켜야만 하는 듯한 취지에 따라 모든 행동을 평가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유일하게 옳고 정당한 인간 행동의 목적이며, 법률 및 법률상의 제도는 이 목적에 적합한지 부족한지에 의해 시험되어야 한다. 공리의 원칙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법과 나쁜 법을 구분할 수 있게 하며 정치적 의무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 자연법이나 천부의 권리, 또는 사회 계약에 대한 신념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벤담은 주장한다.12)
벤담의 공리주의는 특히 형벌제도의 완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다음은 형벌제도의 목적에 대한 토론내용이다.
징벌의 직접적이고 주요한 목적은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 행동이란 위반자나 다른 사람의 행동이다. 위반자의 행동에 대해서는 개선책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경우 의지에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또 무력화책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경우 육체적인 힘에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통제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지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달리 영향을 미칠 수 엇다. 그 경우 본보기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벤담은 범죄에 대한 보복 이론을 거부하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정의는 해를 끼친 사람의 고통이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억제나 교정의 효과를 갖든 갖지 않든, 해를 끼친 사람은 해를 겪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악을 악으로 분명하게 되갚는 그런 보복은 정의의 균형을 회복시키기보다는 그저 세상의 악의 양을 증가시키기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벤담은 징벌이 위반에 뒤따를 것 같은 이익과 손실에 대한 잠재적 위반자의 계산에 미칠 효과에 기초한 징벌과 위반 간의 비율을 정하는 규칙들을 입안했다.13)
2) 밀의 질적 공리주의
밀(1806~1873)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행동들이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에 비례하여 옳고, 행복의 반대(불행)를 산출하는 경향에 비례하여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벤담의 주장과 동일하나 벤담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돼지에게나 합당한 철학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응하여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였다.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고상하다는 것이다. 즉 소량의 고급쾌락이 다량의 저급쾌락보다 더 낫다. 그렇다면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밀에 따르면 양자를 다 잘 아는 자가 선호하는 쾌락이 고급쾌락이며, 쾌락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면 다수의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14)
밀에 따르면 쾌락은 그 양으로서가 아니라 그 질로서 등급 지워져야 한다. 예컨대 지성, 정서, 상상력, 도덕적 감정 등의 쾌락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보다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즉 단순한 쾌락의 양은 동질의 쾌락들 간에 하나의 선택이 행해져야 할 때 부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밀에게는 만족한 바보보다는 차라리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만족한 돼지보다는 오히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그의 질적 공리주의이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비해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벤담은 우리가 행위할 때 우리에게 최대 행복의 양을 제공해 주는 행위들을 선택해야 하며, 타인들이 행복을 성취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이기주의적인 동기에 근거한다.
그러나 밀은 공리주의 원리에 이타주의의 질을 첨가하여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형성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모두의 행복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벤담의 이기주의적 쾌락 추구를 수정했다. 즉 밀은 최대 행복의 원리는 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15)
4. 공리주의의 영향과 한계
1) 영향
19세기 밀과 시지윅(H. Sidgwick)에 의해 벤담의 윤리론이 좀 더 개인윤리의 방향으로 발전괴고 20세기에 와서도 공리주의는 사랑받지는 못했어도 분명히 가장 많이 검토되는 윤리론이다. 도한 벤담의 사상은 20세기 후생경제학의 기원이라고 지적된다. 소비자의 만족도로서 정의되는 효용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고 효용의 산정을 시도하는 점에서 후생경제학은 벤담이 쾌락설의 후계자이다.
역사가들은 벤담의 공리주의의 이론이 19세기 영국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에 ‘법률 개혁의 시기와 벤담의 시기는 일치한다.’는 평가가 내려진 바였다. 좀 더 실증적으로 접근하면 벤담이 제안한 구체적 제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가 초점이 된다. 이에 있어서는 형법의 완화, 주 법원의 설치, 증거주의 절차의 합리화 등이 실현되어 그 성과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근래에 있어서는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19세기 중기에 실시된 중앙정부 간섭의 구체적인 예처럼 논쟁이 실증적이 될 수록 벤담 사상의 역할을 긍정하는 주장에 비해 부정론이 유리한 듯 하다. 그러나 벤담의 사상과 19세기 영국이 행정개혁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수립하지는 못하더라도 19세기 이래 현대국가의 발전과 그 방향이 일치한다는 점은 사실이다.16)
2) 한계17)
․결과주의- 공리주의가 주장하듯이 행복이 유일한 선이라면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동이 행복을 얼마나 산출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 혹은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결과의 예측이 완전히 정확해야 한다. 한 행동의 결과는 무한히 파급되어 나가고 그 결과는 자주 예측과 다르게 나타난다. 이 경우 공리주의가 행위선택의 도덕적 기준으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과는 별도로 결과의 정확한 수량적 측정의 문제가 존재한다. 선한 동기는 일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쉽고 악한 동기는 나쁜 결과를 산출하기 쉬우나 충분한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불충분한 지식 때문에 의도되지 않은 결과가 산출될지라도 동기는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대행복의 원리- 사회의 모든 성원의 행복은 모두 합산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평등주의적 속성을 지닌다. 공리주의는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공평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기주의화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 공리주의의 관심은 행복의 총합의 크기이지 내부구성이 아니다. 이것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개인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이런 점에서 개인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나 권리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분배적 정의- 벤담은 정의란 공리원리의 적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정의와 공리의 관계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밀은 정의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따라서 더 절대적이고 명령적인 어떠한 사회적 공리에 대한 이름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정의론은 경제적 분배에 적용하면 부와 소득을 어떻게 분배하도록 요구하는가? 공리주의 정의론은 분배갈등을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개인이 자기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공리주의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합리적 선택의 원리를 사회에 적용한다.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개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내의 각 부분들이 갈등하지 않는 것처럼 거대한 개인의 부분들도 갈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매우 큰 빈부격차를 허용할 수 있고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당해 주기 못한다.
Ⅲ. 결론
서양의 지성사를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공리주의는 유명론이라 할 수 있다. 즉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상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따르고 있고 시대의 영향으로 흄의 사상과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도덕이 쾌락을 통해 얻는 행복이라는 그의 사상은 그의 제가 밀에게 받아들여지고, 밀은 이것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행복의 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기초한 개인적 공리주의라면, 밀은 공리주의를 인간의 이타적 본성에 기초한 사회적 공리주의로 발전시켰으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 설명되어 질 수 있다.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사상은 비록 시대를 초월하는 사상적 위대함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부르조아 계층을 고려해 본다면 상당히 사회 안정적 사상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사이트★
․김영한, <<서양의 지적운동 2>>, 서울:지식산업사, 1998.
․김완진․송현호․이재율, <<공리주의․개혁주의․자유주의>>, 서울:서울대학교출판사, 1996.
․윤병윤, <<서양철학사>>(서울:삼광출판사, 1995)
․브라이언 매기, 박은미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서울:시공사, 2002.
․버틀란트 러셀, 한철하 옮김. <<서양철학사>>, 서울: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5.
․앤소니 케니, 이영주 옮김. <<서양철학사>>, 서울:동문선, 2003.
․에드문트 야코비 지음, 안성찬 옮김.<<클라시커50 철학가>>, 서울:해냄, 2002.
2001년 발표문.
http://blog.naver.com/woki123/120001068248
1) 브라이언 매기, 박은미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서울:시공사, 2002). p. 182.
2) 브라이언 매기, pp.182-183.
3) 2001년 발표문.
4) 흔히 벤담이 런던대학교를 세웠다고 추측되지만 실제로는 제임스 밀, 노퍽(Norfolk) 등이 속해 있던 협회에서 세운 것이고 벤담은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순응적이지 않고 가톨릭이나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게임브리지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이 대학은 종교와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가워 거리에 있는 신이 없는 학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5) 에드문트 야코비 지음, 안성찬 옮김.<<클라시커50 철학가>>(서울:해냄,2002). p.219.
6) 2001년도 발표문.
7) http://blog.naver.com/woki123/120001068248
8) 김영한, <<서양의 지적운동 2>>(서울:지식산업사, 1998), p. 143.
9) 김영한, pp. 143-144.
10) 일반적 도덕론은 십계명 등의 도덕률을 중심에 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지키도록 하는 의무론이다.
11) 윤병윤, <<서양철학사>>(서울:삼광출판사, 1995), p.444.
12) 앤소니 케니, 이영주 옮김. <<서양철학사>>(서울:동문선, 2003). p. 467.
13) 앤소니 케니, pp.470-471.
14) 김완진․송현호․이재율, <<공리주의․개혁주의․자유주의>>(서울:서울대학교출판사,1996) p. 29.
15) 윤병윤, pp. 446-447.
16) 김영한, pp161-162.
17) http://blog.naver.com/woki123/120001068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