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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영남지역 노론의 동향 - 송시열 문인가문을 중심으로-
이연숙 충남대학교 강사 논문
Ⅰ. 머리말
Ⅱ. 영남지역 송시열 문인
1. 좌도지역
2. 우도지역
Ⅲ. 영남노론의 동향
1. 신출노론의 출현
2. 문묘종사청원운동
3. 원우건립운동
Ⅳ. 향전
1. 인동향전(달수 주: 여헌 장현광의 후손인 남산파와 종파 여헌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과 인동장씨황상파일부의 노론추종자 와의 싸움
2. 경주 인산서원향전
3. 신안영당 훼판사건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6세기 후반 이후 사림세력은 정계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와 함께 정파의 분열이 나타났고, 인맥․지연에 따른 학파의 분열과 정파의 분화가 이루어져 1575년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나누어졌다.
기호는 근기지역과 호서․호남 지역을, 영남은 경상도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고려후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역사적 용어로 일반화된 것은 17세기부터로, 특히 영남은 기호지방과 서인에 대칭되는 퇴계학파와 남인의 중심지란 의미로 사용되었다.1) 학파의 분화이래 퇴계학파=영남지방, 율곡학파=기호지방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호와 영남의 지역적 성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학연이나 혼인관계, 거주지 이동으로 당색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붕당정치의 전개 양상에 따라 더 심화되어 노소분당과 갑술환국이후 노론 주도 정국 운영기에는 영남지역에 ‘新出老論’이 등장하기도 하였다.2)
신출노론은 중앙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노론이 향촌사회 분열책에 따라 자파세력의 부식 차원에서 출현시킨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영남지역 사족의 재지기반과 영남학파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는데,3) 이들 연구는 신출노론의 출현을 단순한 향촌 지배책에 의한 영향으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지역 송시열 문인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들의 학통이나 혼맥에 의한 자연스러운 전향이 전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그들의 학통과 혼맥에 의한 노론화에 중앙집권세력인 노론의 향촌 지배책이 부합되어 그 속도와 폭이 확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영남지역 송시열 문인과 그 가문을 중심으로 ‘신출노론’의 존재와 동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학통과 통혼권을 통하여 영남지역 우암계 신출노론의 출현배경과 儒疏나 원우건립운동을 통하여 향촌주도권 장악을 도모하였던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南․老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영남지역 송시열 학파의 형성과 위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 일조각, 1995.
2) 이수건은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에서 갑술환국(1694) 후의 영남지역 노론을 설명하면서 ‘新生老論’ 또는 ‘新出老論’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필자도 이 주장을 따르기로 한다.
3) 이수건, 영남학파의형성과전개 , 일조각, 1995;「남명학파의병활동의역사적의의」, 남명학연구 2,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2;「조선후기영남유소에대하여」,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 , 1987;「조선후기경주지역재지사족의향촌지배 , 민족문화논총 제15집,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94;정만조, 「영조 14년 안동 김상헌서원 건립시비 -탕평하 노․소론분쟁의일단-」, 한국학연구 1, 동덕여자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2;조준호, 「17~18세기 영양지방한양조씨의문중연구」, 북악사론 4, 국민대학교 사학과, 1997.
이상의 내용을 규명하기 위한 자료로는 화양연원록과 聯芳集에 수록된 「退軒從遊錄」과 「沙溪從撫疏擧錄」, 그리고 景陽齋文集「沙溪金先生卞誣同疏錄」등이 있다.4)
「사계 김장생승무소」는 숙종 27, 28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특정 시기 영남지역 송시열 문인 내지는 노론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중요한 자료이나, 시기의 변화나 정국의 추이에 따른 변화를 추적하기는 부족하다.
Ⅱ. 영남지역 송시열 문인
송시열문인은 화양연원록에 827명, 전고대방에190명 그리고 유교연원록에 305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중복으로 기재된 인물을 제외하더라도 1000여명에 이른다.
이중 화양연원록에 영남지역이 거주지로 기재된 인물은 4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영남 서인계(노론계) 유생들의 승무소와 노론계 원우건립운동을 볼 때, 상당한 세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앙정국의 추이에 따라 시류에 편승하는 자들의 일시적인 참여를 고려한다 해도 그러하다.
화양연원록에 등재된 인물을 중심으로 송시열 문인을 좌도지역(경주권․안동권)과 우도지역(상주권․진주권)으로 나누어 살펴 보자.
4)聯芳集은 옥천전씨 대구파 全克泰․克初․克念․克和․克敏형제의 문집이다. 권1~2 退軒遺稿(전극태), 권3 淸風堂遺稿(전극초), 권4~5 丹邱遺稿(전극념), 권6~7 洛浦遺稿(전극화), 권8 杏圃遺稿(전극민), 권9 退軒從遊錄, 沙溪金先生從享陞廡疏擧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退軒從遊錄」은 퇴헌 전극태의 각 지역 교우들의 명단이고, 「沙溪從撫疏擧錄」은 숙종 28년(1702)에 전극화를 소두로 하여 올린 문묘종사청원소에 참여한 영남지방 유생들의 명단이다. 景陽齋文集(국립중앙도서관)은 朴太古의 문집으로, 그는 숙종27년(1701)에 朴尙古를 소두로 올린 사계 김장생문묘청원소를 지은 인물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聯芳集(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1. 좌도지역
좌도지역의 경주권 송시열 문인은 대구의 옥천전씨 가문, 청도의 밀양박씨가 대표적이다. 경산의 한홍익, 永川의 송희경․송희렴․박문린,장기의 서유원․오도전, 하양의 송득남 등이 그들이다.
옥천전씨5)는 원래 旌善人이었으나 佾이 管城君에 봉해진 이후 관향을 옮겼고, 希哲은 단종 폐위 이후 榮川에 은거하였다. 전극태 가문이 영천에서 대구로 옮겨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時憲때부터이다. 시헌의 아들 有慶과 有章은 사계문인이자 송시열과 교유하여 화양연원록의사우편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들이 어떠한 계기로 사계문하에 입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학연을 통하여 송시열 문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으로서 각종 유소 발의를 주도하거나 원우창건에도 참여하였다. 이 가문과 혼인관계로 이어진 가문 중 노론계로는 청도의 밀양박씨와 대구의 인천채씨, 綾城具氏가 있다. 시헌의 사위가 박내장으로, 그의 아들 之賢과 손자 太古가 송시열 문인이다. 유익의 사위인 具時雄과 유경의 사위 蔡之沂 아들은 사계 김장생 승무소에 참여하였다.
5) 應參海時憲有翼女李國馨
옥천전씨와의 혼인을 통하여 노론계로 전향한 것으로 보이는 인천채씨6)의 학연은 영남학파이다. 澄은 퇴계와 도의로 교제하였고, 應龍(중종 25, 1530~선조 7, 1574)은 퇴계문인, 先修(선조 1, 1568~인조12, 1634)는 한강문인으로 임진왜란 때에 倡義한 바 있으며, 模는 樂齋 徐思遠의 문인이다. 之江(광해군 2, 1610~숙종 14, 1684)은 병자호란 후에 은둔하여 숭정처사라 하였다. 선대부터 퇴계학통을 이은 남인이었는데, 之沂의 아들인 갑령, 연령, 숭령이 사계 김장생 종향승무소에 참여하였다. 이는 외조가 사계문인인 옥천전씨 有慶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청도의 밀양박씨7)는 10대조 杜村公楊茂가 정몽주의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며 우현보와도 교유하였다. 고려 멸망 이후 은거하면서 두촌이라고 自號하였다. 5대조 虎(중종 7, 1512~선조 12, 1579)는 청백리로 이름이 있고, 헌종 10년(1844)에 芝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가문의 혼인관계는 대구의 대표적인 서인(노론) 집안인 옥천전씨와의 결합이 눈에 띈다. 乃章이 옥천전씨 시헌의 딸과, 之賢은 옥천전씨 유장의 딸과, 그리고 彌章의 사위가 전극념이다.
이 집안의 사승관계를 朴之賢(인조 12, 1634~숙종 7, 1681)8)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증조 陽復은 일찍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生父乃章(선조 35, 1602~현종 6, 1665)은 장현광 문인이고, 지현의 父 宣章은(선조 40, 1608~숙종 11, 1685) 사계 김장생 문인이다. 지현의
아들 太古(효종 7, 1656~숙종 30, 1704)는 전극태를 따라 거제로 귀양 온 송시열을 찾아 뵙고 입문하였으며, 손자 重采(숙종 5, 1679~영조 26, 1750)는 권상하 문인이다.
이러한 사승관계를 통하여 자손들 대부분이 사계승무소에 참여하여 특히 숙종 27년(17001)의 청원소에서 각각 疏頭는 尙古, 製疏는 太古가 담당하였다. 또한, 이들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참여하였다. 영조 30년에 重宗을 소두로 重采등이, 중채의 아들 洪을 소두로 양송의 문묘종사 청원소를 올렸다.
안동권은 퇴계학파의 본산으로서 남인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 안동권의 송시열 문인은 봉화의 남양홍씨9) 聖傳(1640~1707)․翊相(1645~1723)․可相(1649~1740)10)․舜相(1661~1713)이 있다. 暹(1504~1585)의 문집 서문을 송시열이 찬한 바 있고, 錫(1603~1680)은 김상헌의 문인으로 정축년(1637) 이후에 과거를 포기하고 태백산 춘양동에 姜洽․鄭瀁․洪宇定․沈長世등과 은거하였다. 이들을 世稱太白五賢이라 하였다. 가상과 성전은 永川의 반남박씨 충기의 딸과 혼인하여 송시열 문인 朴文麟의 매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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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지현은 송시열 문인으로 숙종조에 道薦을 받아 장릉참봉으로 제수되었으
나 나아가지 않고 자양정사에 퇴거하였다. 그는 聖學을 몸소 실천하고 孝悌
로 후학을 독려하였다. 송시열이 그 효를 가상히 여겨 慕孝두 자로 그 서재
를 명명하고 문인들에 이르기를 “子兼(지현의 字)이 우리 문하의 孝士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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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도지역
우도지역의 상주권은 그 지리적으로 湖嶺之間에 위치하여 영남지역 가운데 송시열 문인이 가장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인동장씨는 인동의 토성으로 여헌 장현광을 배출한 대표적인 사족가문이다.
17대 嫡孫은 아들 4형제를 두어 宗派, 凰顙派, 虎鳴派그리고 蔚珍派로 분파되었다.
安世-仲陽-脩-俌-孟儲-嫡孫-渾(宗派)11)
潛(凰顙派)12)
濤(호명파)
演(울진파)
종파는 남인 집안으로 내도, 경유, 경우, 해, 그리고 澩은 장현광13) 문인이고, 내도는 인동향교 상량문을 찬한 바 있다. 해는 병자호란 때에 先師가 경상도호소사로 봉해졌을 때 인동의병장이 되었으며 인조27년에 인동향약장으로 후학을 교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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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파의 파조 潛은 조광조에게 수업하였고, 기사년 조광조 피화 시에 적소까지 따라갔다. 이 일로 이언적과 더불어 二賢으로 칭해졌다. 그는 누차에 걸쳐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죽림정사에서 강학하였다. 기묘명현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인동의 賢巖書院에 향사되었다. 울진파 演은 일찍부터 조광조 門下에서 종유하였으며 곧 英陽에서 은거하였다.
인동에서 사계승무소 소청 개설문제로 향전이 일어났는데, 인동장씨가 그 중심에 있었다. 황상파의 파조인 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그의 후손 중에 장영달, 장유 등이 송시열 문인이 되었다. 즉 인동장씨 중 황상파가 학연을 달리하면서 계파간 당색 갈등이 문중간의 향전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천채씨14)중에서 노론계 가문으로 함창과 대구에서 세거하는 계파를 찾을 수 있는데, 함창에 세거해 온 가문 중에 김장생 문인은 蔡夢井, 송시열 문인은 채하징, 채지면, 채석주가 있다. 河徵은 대구의 전극태와 송시열 예론에 관한 변무소를 올렸고, 之沔과 錫疇는 송시열 문인이며, 命寶는 경주 인산서원에 관하여 영조 1년에 上言하는 등 함창의 대표적인 노론가문이다. 이처럼 이들은 학통은 기호학통을 잇고, 정치적인 활동 또한 노론 성향을 띠고 있다.
상주에서 일찍부터 서인으로서 활동한 가문은 창령성씨15)와 평산신씨 가문이다. 그 중 창령성씨는 聽竹堂灠(명종 11, 1556~광해군 12, 1620)의 후손이다. 람은 율곡과 우계를 스승으로 섬겼고, 처향인 상주에서 이때부터 자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후손 중에 成震
昇이 송시열의 예설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고, 成德徵은 사계 김장생 승무소의 소두가 되고 영조 4년 무신난을 진압하기 위한 의병에도 참여하였다.16) 成憲柱는 양송의 문묘종사청원소의 소두로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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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신 창의록
成晩徵(추담, 효종 10, 1659~숙종 37, 1711)은 송시열, 권상하의 문인으로 숙종 30년(1704)에 만동묘 향사에 참여하고 영남인의 是非에 관한 시비를 辨明하는 소를 올린 바도 있다. 그의 아들 爾鴻(숙종 17, 1691~영조 25, 1749)은 권상하의 문인이고, 사위는 韓元鎭의 문인 韓德全이다.
선산에 세거한 덕수이씨17)는 李珥의 동생 瑀의 가문이다. 그러나 우가선산에내려와살게된 정확한 동기는 알수없다.
선산읍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고, 우와 그의 아들 묘소가 선산에 있다. 주로 은진송씨와 광산김씨 사계 후손과 혼인을 하고 있다.
진주권의 송시열 문인으로는 삼가의 權錞․權鑑․權鍰, 鄭友益이 있고, 의령의 權宇亨이 있다. 의령의 권수창을 소두로 하여 숙종 41년(1715)에 김장생승무소를 올렸다. 그는 숙종 27, 28년의 승무소에도 그의 일족과 함께 참여한 바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시열 문인과 그 가문을 중심으로 한 통혼망이 영남지역에 산재했음과 노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송시열 문인은 영남지역 전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많은 가문과 활발한 활동을 보인 지역은 우도의 상주권에 해당하는 상주, 함창, 선산, 성주지역이다.
경상우도는 본래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일파가 몰락하자, 남명학파가 분해되어 일부는 퇴계학파에 합류했고, 일부는 정계 진출 및 생존의 차원에서 서인에게 접근하였으므로, 남명의 학통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했다.
조선후기에 경상우도 지역에는 노론으로 變轉한 가문이 상당수 있었다. 서인들과의 대립이 퇴계의 위상문제와 관계가 있는 경상좌도에서는 강경한 태도로 서인들과 대립을 벌였다. 그러나 퇴계의 위상에 관심이 그리 높지 않던 경상우도에서는 서인들과 적대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영남 남인들 가운데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 유림이, 서인과의 대립시 그 本營地역할을 했던 것이다.18)
이러한 경상우도의 특성상 상주권을 선두로 일찍부터 노론으로 變轉해 왔다고 하지만, 전반적인 영남지역의 성향으로 볼 때 노론으로서 뿌리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남지역 노론들은 중앙정국의 추이에 맞추어 문묘종사청원이라든가, 원우건립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재지기반을 확보하고 자파 세력의 부식이라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남인계 사족과의 충돌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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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허권수, 17세기문묘종사와예송에관한연구 , 성균관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2. 140~141쪽.
Ⅲ. 영남노론의 동향
영남내 서인세력은 송시열의 문인 가문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다가,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 후 노론정권의 적극적인 포섭책으로 더욱 확산시켰다. 이 시기 집권노론의 영남남인에 대한 정책은 기존의 남인계사족 중심의 향촌사회에서 소외된 세력을 적극적으로 자파세력으로 포섭하고 이를 확대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남인들에 대한 회유책과 이간책도 병행되었다. 그 결과 영남지역 곳곳에는 신흥노론 세력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17세기 중반이후 ‘우율승무소’, ‘예론소’, ‘사계승무소’, ‘양송승무소’ 등 중앙정계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있을 때마다 서인내지 노론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영남의 향론분열을 주도해 나갔다. 영남에서의 이러한 당파간 갈등은 18세기 이후 신출노론이 확대되면서 향전의 형태로 격화되어 전개되었다.19)
여기서는 17세기 중반이후에 유소를 통하여 당파성을 띤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신출노론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들이 세력을 확대시켜가는 과정에서 영남남인들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으로 자파계 서원을 건립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보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야기된 남․노 간의 갈등도 고찰해 보자.
19) 이수건 외, 「조선시대 영남서원 자료 현황 및 해제」, 조선시대 영남서원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1999.
1. 신출노론의 출현
갑술환국 이후 노론이 중앙정국을 장악함에 따라 영남지역내에서 노론으로 학연과 당파를 전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들 신출노론들의 출현은 송시열 문인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서인정권의 회유, 이간책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해당 가문의 계파 전체와 관련되어 세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1> 17세기 신출노론의 활약상20)
<표 1>을 보면, 경상좌도와 우도의 성격 차이와 상주유생들이 일찍부터 서인의 입장을 표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송시열 문인이 이들 지역에서 다수 배출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申碩亨은 申碩蕃의 종제이다. 신석번은 정경세와 李埈의 문인이나 영남의 논의에 따르지 않고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계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송준길의 천거로 중앙정계에 등용되었고,21) 현종 7년(1666)에는 성진승과 더불어 유세철 등 영남유림들이 송시열의 예론을 공격한 상소가 영남인의 공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사감에 의한 것이라는 상소를 함으로써 영남유림에 정면대응하기도 하였다.22)
또한 아들 爟역시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황상중(광해군 11, 1619~숙종 6, 1680)23)은 일찍부터 신석번․민정중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문행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경인년(효종 1, 1650) 종사반대소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나, 태도를 바꾸어 영남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무오년(숙종 4, 1678)에 우암변무소를 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퇴계학통의 남인집안으로 時幹은 寒岡문인이고 鄭經世․全湜․李埈과 도의로 사귀어 세칭 商山四老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중은 일찍부터 서인계와 종유하였고, 상주의 대표적인 서인 가문인 창령성씨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가 죽자 민진원․민진장이 治喪할 정도였다.
이처럼 상주지역에서 가장 일찍 서인으로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 양현승무소를 처음으로 올리게 된 배경에 창령성씨가 있었던 것이다. 창령성씨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람(1546~1620)때부터 상주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처가가 상주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후 ‘就食’ 때문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람은 堂兄浩와 함께 의리지학에 깊었는데, 어려서부터는 南彦經에게 수학하다가 약관의 나이에 율곡과 우계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상주에 와서부터 趙翊, 鄭經世, 李埈과 종유하였고, 나이 어린 趙翼, 崔明吉, 張維와도 자주 만나 강론하였다.24)
20) 이 표는 이수건의 글 중에서 서인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 인용한 것이다.(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 일조각, 1995, 529쪽)
21) 현종실록 즉위년 11월 무오.
22) 백원집 권 2, 소 변송시열피무소.
23) 생략
이러한 그의 사승․교우관계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은 일찍부터 서인으로 경도되었다. 이는 그 후손의 혼인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黃尙中의 딸, 선산의 율곡의 동생인 瑀의 증손인 東野의 딸, 선산곽씨 櫓의 딸, 옥천전씨 瑭의 딸, 밀양박씨 孟徵(송시열 문인)의 딸, 의령남씨 해(남극표의 종질)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이동야, 남극표, 곽진, 곽로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처럼 창령성씨는 상주의 대표적인 노론가문으로서, 혼맥 또한 송시열의 문인이거나 양현․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노론가문으로 형성되었다. 때문에 창령성씨가 상주를 중심으로, 지역 유생들의 노론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상주의 흥암리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흥암서원이 창건되고, 사액을 받는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 그리고 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향촌지배권의 향배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상주지역에서 신출노론이 많이 생긴 배경에 창령성씨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옥천전씨가 있다. 옥천전씨는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서인) 가문으로, 전유장이 현종 8년(1667) 3월에 양현승무소를 올렸다. 全有章은 전유경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아들 모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전극태는 함창의 채하징과 송시열변무소를 올린 바 있다. 종유록을 보면, 중앙의 노론계 인사 및 다른 영남지역의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전극념과 전극화는 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바 있으며, 특히 전극화는 거제와 장기에 송시열 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극초는 송시열의 덕원 적소행을 배행하였고, 만년에 명왕조가 망하자 동지 13賢과 팔공산에 은거하였다.25) 숙종 19년(1693) 14賢후손들이 儒契를 만들어 景賢堂을 세워 여름에 修契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인동의 향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혼인관계를 보면, 청도의 박내장, 대구의 인천채씨, 대구의 구시웅, 우석림 등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즉 옥천전씨도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노론가문으로 영남지역의 유소와 송시열 원우건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영남지역 서인계 유소의 疏頭였던 인사의 가문을 통해 신출노론의 출현배경을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하여 서인세력이 영남인들의 결집력을 약화시키고, 영남에 대한 분열책의 하나로서 신석형 등 영남유생들을 포섭하여 기존의 세력과 공론대결을 벌이도록 한 것26)이라는 분석, 즉 남․서인 대결구도에서 찾기 보다, 이들의 학통과 혼맥에서 찾을 수 있었다.
24) 「墓碣銘」(趙翼撰)
25) 全克初는 동지 13賢과 함께 팔공산에 은거하였는데, 동 이름을 大明이라 하였다. 그리고 ‘明’字를 넣어 號로 삼고 賦를 지으며 尊周義理를 지켰다. 이들의 명단은 明川漁子全克初(沃川人)․明洞主人崔道南(月城人)․明湖散人李言直(永陽)․明樓老叟鄭錡(東萊人)․明谷幽人許誡(金海人)․明嶺處士徐基泰(達城人)․明溪學士蔡生晩(仁川人)․明巖居士楊時佐(中和人)․明崖病叟都愼行(星山人)․明花冶卽柳汝樟(文化人)․明圃老人李贊(德山人)․明窩隱士任以賢(豊川人)․明野逸民禹錫璉(丹陽人)․明月山人呂渭興(星山人)이다. 이들의 당색은 대체로 노론이다. 전극초와 허계는 송시열 문인이고, 우석련은 숙종 27, 28년 사계 김장생 문묘종사청원소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당색도 <부록>의 표를 참고로 보면 노론계 가문이라고 볼 수 있다.
26) 설석규, 「조선시대유생의문묘종사운동과그성격」, 조선사연구 제3집, 복현조선사연구회, 1994.
2. 문묘종사청원운동
경신환국 후 노소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노론은 자신들을 정통으로 하는 도통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송시열은 양현종사가 이루어지자마자 황간이 주자가 예서의 해석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완성시켰음을 상기시키면서, 사계 김장생이 우리나라 예학에 끼친 공을 들어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김장생 종사청원운동은 송시열의 문인들에 의해 송시열의 학통형성과 도통확립 과정 속에서 추진되었다. 노론의 정국주도와 숙종의 병신처분으로 노론 정통론을 공인받을 수 있었고, 숙종 43년 김장생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졌다.
노론정통론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자, 노론은 율곡 - 사계 - 우암으로 이어지는 도통체계를 이루고자 하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의 적전으로서 성리학 체계를 朱熹(1130~1200)와 이이를 연결시켜 이해하고, 주희를 성리학 이해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공자 - 주자 - 율곡 - 사계라는 학통을 수립하고, 기호학파를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자임하는 도통관을 명시하였다.27)
송시열의 도통관은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문인들은 송시열의 기호학통 수립을 계승하고, 나아가 송시열을 비조로 하는 우암학통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노력은 여러방면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중 가장 공적이고 가시적인 파급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문묘종사였다.
양송문묘종사논의는 숙종43년 전라도 유생 鄭敏河(현종 12, 1671~영조 30, 1754)28)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세채 문묘종사가 제기됨에 따라, 노소론 유생간의 논의가 시작되었다. 갑술환국 후에 소론에서 전향한 박세채 문도들과 송시열 문인들 간에 박세채 종사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던 것이다. 숙종 후반의 정국이 花黨과 駱黨으로 분열되어 여기에 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파론이 합세하여 공론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문묘종사논의는 진행되었다.29)
사계와 양송문묘 종사 논의시 영남유생들은 송시열 문인 가문을 중심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전체 유소 가운데 각각 21%, 20%를 차지한다.
영남 노론의 사계․양송승무소를 도표화하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 영남유생 사계 및 양송승무소
疏頭의 가계나 행적을 모두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대체로 송시열의 문인이거나 그 문인, 친인척이거나 사제관계에 있는 인물들이다.30) 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승무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의령남씨의 남극표(인조 17, 1639~숙종 27, 1701)와 손자 道轍(숙종 24, 1698~영조 32, 1756),31) 밀양박씨의 朴尙古․朴太古와 태고의 아들 重采․興古의 아들 重宗, 중채의 아들 洪, 그리고 창령성씨의 成德徵․成喜徵과 희징의 손자 憲柱가 그들이다. 또한 洽은 김해허씨로 대구 용강서원에 제향되었고 「화양연원록」사우편에 등재된 許得良의 후손이자 송시열의 문인 許誡의 증손이다.32)
한편 영조 30년 9월 3일부터 17일까지 이승해․신광조․곽수범․박중종․허흡이 계속해서 올렸는데, 이는 그간의 논의와 다르게 송시열만 종사를 청하고 있다. 송시열만을 청한 뚜렷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 청원소에 이어 즉각 사학유생들이 신중하지 못한 일이라며 비난하고 있다.33)
이와 같이 송시열 문인들과 그 후손들의 승무소를 통해서 이들의 노론화가 일시적인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닌 학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세대를 이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7) 이연숙, 「17~18세기 우암학파의 형성-도통계승을 중심으로-」, 호서사학31, 2001.
28) 정민하(현종 12, 1671~영조 30, 1754)의 자는 達夫, 호는 簫隱․歌隱으로, 澈의 5세손이다. 1746년(영조 22)에 학행으로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아 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시에 능하여 김창흡과의 화답이 유명하고, 그의 문집 소은유고 에 230여 수의 시가 전해진다.
29) 영조실록 권6, 1년 6월 정묘.
30) 송시열 문인의 가계도 참조.
31) 의령남씨 족보
32) 김해허씨 족보
33) 영조실록 권 82, 30년 9월 정유.
3. 원우건립운동
신출노론들은 門中院祠및 제향자의 후손이 없는 院祠를 중심으로 향촌문제에 적극적인 참여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서원을 통한 향론참여 문제는 남인들의 완강한 반발로 쉽게 성사될 수 없었다. 따라서 지역내 자기 존립을 위한 자파서원 건립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신흥 노론계의 지역내 이해관계와 집권노론 세력의 대영남남인 시책이 맞물리면서 도내 열읍에 노론계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집권노론은 영남지방내 자파세력의 확대를 통한 향론분열책의 일환으로서 서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34)
숙종 때 조정에서 몇 번의 남설 금지 논의가 있었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면서 자 자파계 인물의 신원을 위한 원우 건립은 본격화되었고, 이에 남설금지 조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남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신출노론의 노력으로 영남지방에 세워진 노론계 서원의 건립 현황은 <표 3>과 같다.
<표 3> 17~18세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
먼저 원우의 배향인물를 살펴보면, 노론이 정통으로 주장하는 이이-김장생-송준길․송시열로 이어지는 도통체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 중 흥암서원은 송준길이 독향되어 송시열의 화양서원과 같이 중시되었다. 이는 숙종이 31년(1705)과 42년(1716)에 致祭하였다는 점, 서원절목도 화양서원의 것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원장을 지낸 인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35)
송준길을 제향한 서원이 한 때 거주의 인연으로 건립되었고, 이에 따른 어떤 갈등도 없었던 것36)과는 달리 송시열을 제향한 원우는 적거지이거나 장리지지라는 이유로 건립되었다. 송시열은 집안의 혼맥이나 그의 행적을 보아도 참배나 유람 목적외에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말년에 영남과의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남인과 벌인 예송의 패배로 귀양지가 장기였던 것이다. 그는 적소에서도 강학활동을 계속 하였다. 5년여의 강학으로 영남사림들이 입문하게 되었고, 그곳에 서원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표 3>의 원우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이숙의 생사당인 尙德祠이다. 李䎘(인조 4, 1626~숙종 14, 1688)은 현종12년(1671)에 경상도 관찰사로 기근을 진휼한 공을 세웠다. 府民들이 사우를 건립하였고, 그가 죽자 위패를 봉안하였던 것이다. 兪拓基또한 경상도 관찰사를 두 번 역임하면서 세운 기민 진휼의 공으로 추향되었다.37) 김휘손․이존수 등 역대 경상감사를 지낸 인물들이 추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4) 이수건 외, 앞의 논문, 20쪽.
35) 흥암서원의 원장은 權尙夏․李宜顯․兪拓基․宋明欽․權震應․金亮行․金履安․李敏輔․沈煥之․李輝正․宋來熙이다( 흥암서원사실록 ).
36) 상주는 소시에 칩거했던 적이 있으며 그의 처향이고, 안의는 송준길이 인조15년(1637) 32세 되는 해부터 병자호란의 굴욕을 듣고 1여년간 은거한 곳이다( 동춘당선생집 속부록 권1, 연보).
이처럼 경상감사를 지낸 인물이 봉안한 데는 서인 내지 노론의 핵심인물이면서, 영남사림과 우호적인 인물을 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상감사는 경상도의 행정․군사업무 뿐만 아니라, 정권유지를 뒷받침할 영남 공론의 조정 임무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징성을 갖는 것이 바로 상덕사였다. 서원이나 사우는 관청에서 건립하는 것이 아닌 사림의 공론에 의해 설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상덕사 역시 사림의 공론을 표방하며 설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대구의 노론계 사림이 공론을 표방하며 건립한 것으로, 여기에는 이미 노론세력이 상당한 뿌리를 박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8)
서원의 건립 주도세력들을 보자. 청송의 병암서원은 閔僖, 沈柱, 沈弼良이 주도하였고,39) 상주의 서산서원40)은 金必千, 金必粹, 金必大 등이 창건을 주도하면서 청액소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숙종 27, 28년 사계 승무소에도 참여하였다. 거제의 반곡서원41)과 장기의 죽림서원42)은 전극화의 주도로 거제의 옥삼헌과 장기의 오도전 등 지역의 송시열 문인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그는 반곡․죽림서원의 院首․道院長이 되었다.
37) 대구읍지
38) 대구․경북역사연구회, 앞의 책, 2001.
39) 열읍원우사적 경상도 편.
40) 서산서원은 건립 후 조정에서 첩설서원지령이 있어 그 훼철대상이 되었으나 숙종의 특별교시로 제외되었다. 그리고 숙종 39년에는 김필수가, 다시 숙종45년(1719)에는 權勛이 사액을 신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그 후 정조20년(1796), 순조 18년(1818)에 중수를 하고, 철종 8년(1857)에는 金在淳과 成最烈의 주도로 이건하였다. 그 후 세 번에 걸쳐 사액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처럼 서산서원은 안동김문의 세도정국에서 수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지만 사액만은 받지 못하였다( 西山書院事實 ).
41) 거제는 송시열의 적거생활이 1년 밖에 되지 않아 영향이 크지 않다. 그러나 里名을 道論洞이라 할정도로 士風이 일어났다. 전극화는 종백씨(전극흠)와 함께 숙종 29년(1703)에 거제로 들어가 읍유들과 서당 건립을 상의하여, 읍의 원님이 재력을 모아 서당을 지었다. 이름을 勝昔堂으로 정하였다. 士人玉三 등이 유상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어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숙종 31년(1705) 5월 상순에 전극화는 院首로서 縟禮를 성대하게 치루었다( 연방집 권6, 「낙포유고」죽림서원창건일기).
42) 장기는 송시열이 숙종 1년(1675) 6월 15일 덕원에서 이배되어 숙종 5년(1679) 4월에 거제로 이배되기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이 오랜기간 동안 송시열은 강학을 멈추지 않아 대구의 전극태 형제를 비롯 많은 士人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 장기의 사인들에게서 立祠에 대한 논의가 없자, 전극화는 거제의 반곡서원 봉안례에서 오도전에게 입사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직접 숙종 33년(1707)에 서울로 가서 유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유상을 장기
로 옮기는 중에 상주와 영천을 거쳐 장기에 도착하였는데 유상이 경유하는 이들 지역의 지방관들이 노론으로 이들의 원활한 협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봉산영당인데, 첩설의 시비를 피하기 위하여 영당으로 건립되었다가, 숙종 42년(1716)에 도내사림들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이 때 道院長이 全克和이고, 鄕院首는吳道全이며, 應辨任司는吳時佐이다( 연방집 권6, 「낙포유고」죽림서원창건일기).
17세기 중반이후가 되면 영남지방의 서원은 문중원사의 성격을 띠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지역내 문중원사의 건립은 族勢나 邑勢등 형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후손에 의해 발의되어 직손․방손․외파 및 향중내 각 문중의 도움을 받아 성사되었다. 따라서 운영도 후손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43)
문중서원의 건립양상은 인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동에는 吳山서원(길재 제향)과 東洛서원(장현광 제향)이 있는데, 모두 사액서원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동장씨는 계파에 따라 당색을 달리하였다. 이에 인동장씨 내의 신출노론인 황상파의 張瑠는 숙종 20년(1694)에 송시열․송준길의 합향을 청하는 등 서원 중심으로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인동의 賢巖祠는 숙종 18년(1692)에 창건되어44) 張潛을 제향하였다.
잠은 조광조의 문인이고, 백인걸과 동문이었다. 장잠의 道學과 이언적과의 도의지교를 추모하여 장현광이 尸祝之議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 후 張應一, 張慶遇, 蔡楙, 李秀俊등이 건립을 발의하여 도내 장보들이 숙종 18년에 건립하였다. 서원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남인이었다. 그러나 숙종 24년, 28년 두 차례의 이건과정에서는 잠의 후손인 張瑠가 사적을, 상량문은 南極杓(인조 17, 1639~숙종 27, 1701 / 송시열 문인)가 찬하였다.45) 이로 보아 현암사는 창건 당시와 이건과정에서 서원의 주도세력이 잠의 후손인 노론계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인계는 숙종 28년(1702)에 張以愉․張銢(광해군 14, 1622~숙종 31, 1705)이 창의하여 嘯巖祠를 건립하였다. 蔡夢硯(명종 16, 1561~인조 16, 1638), 蔡楙(선조 21, 1588~현종 11, 1670)를 제향하였다.46) 채몽연 봉안문은 金壽聃이, 채무 봉안문과 사적은 張萬紀가, 상량문은 張羽溟이 찬하였다.
이외에 인동읍지에는 인동장씨 문중서원으로 보이는龜峰서원(張應一제향), 玉溪祠(張安世, 仲陽, 해, 澩제향), 봉림서원과 鳳陽서원(張龍翰․張瑠제향) 등이 보인다.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인동장씨 계파별 당색이 대립되는 인물들을 제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 영남지방 노론계 서원의 건립현황을 보면, 숙종 27년 장희빈이 사사되고 남인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영남사림들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같은 지역내에 남인계 서원건립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남지방에 한정된 상황은 아니고 거의 전국적인 추세였다. 조정에서는 서원이 남설되자 몇 차례 남설금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고, 자파계 인물의 신원과 자파세력 부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47)
43) 이수건, 「조선시대영남서원자료현황및해제」, 조선시대영남서원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1999.
44) 서원가고 에는 숙종 28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5) 열읍원우사적 경상도편.
46) 읍지 에는 배향인물이 張乃範과 채무로 되어 있다.
47) 조준호, 「17~18세기영양지방한양조씨의문중연구」, 북악사론 4, 국민대학교 사학과, 210~211쪽.
Ⅳ. 향전
17세기 중반이후 당쟁과 관련된 향전은 이 시기 집권세력에 의해 포섭된 서인(노론)세력의 형성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18세기 이후 남노간의 향전으로 확대되어 노론계 서원의 건립문제로 확대되었다.
남노간의 향전은 17세기 중반에는 ‘양현승무소’ 문제로 남인과 서인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영남유생으로서 맨 처음 올린 신석형을 영남유생들이 집을 허물고 도에서 축출하는 등 私罰을 가하자, 당시 정권의 비호 속에 다시 이들을 보복 처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영남지역의 남인과 서인의 갈등은 개인에 대한 처벌로 마무리되었으나, 신출노론 세력이 확대되면서 사계승무소 소청설치 문제와 향교 교임문제를 벌어진 인동에서의 남노간의 갈등과 노론계 서원 건립 문제로 야기된 경주와 영덕에서의 갈등은 향전의 양상을 띠었다.
1. 인동 향전
인동은 인동장씨의 세거지이자 퇴계학파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장현광을 배출한 지역이다. 장현광이 차지하는 영남지역내 정치적․학문적인 위치로 볼 때 인동에서, 그것도 인동장씨 내에서의 남노간의 갈등이 야기되었다는 사실은 신출노론세력의 판도를 가늠하게 해 준다.
인동장씨는 종파와 황상파가 학연을 달리하면서 당색이 대립하게 되었다. 황상파의 파조잠은 조광조문인으로 기묘명현록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잠의 후손 중에 장영달, 장류 등 송시열 문인이 배출되면서 노론화되었다.
인동향전의발단과전개과정은 丹邱遺稿 에실려있는 「上道伯辨誣文」, 「卞呈文」, 「對擧道通文」, 「出己巳錄略」48)에 자세하다. 숙종 1년(1675)에 제2차 예송에서 패하여 정권이 남인으로 바뀌면서 당색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숙종 7(1681)년 겨울에 張宇溟․宇翰․宇樞․金順發등이 張璿을 공격하면서 향전이 일어났다. 재임배들은 서로 呈狀하여 각 죄목을 말하였고, 감사는 이를 양쪽 모두 방면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본격적인 향전은 사계종무소 소청 문제로 전개되었다. 張慶弘과 張瑠등이 숙종 8년(1682) 2월에 15일 감시가 인동부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사계 김장생 청원소 계획을 세웠다. 14일에 김장생 청원소에 관한 道會를 인동 향교에서 열었으나 의논이 정해지지 않아 16일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장만기(여헌 정현광의 증손자), 김순발, 장우한․우주(모두 종파) 등이 그 子姪과 함께 향교에 둔거하였다. 장경홍과 류가 향교로 들어가 사림을 맞이하여 들였는데, 이 때 회원에 전극태․극념 형제, 李鼎華, 金相玉, 李璋, 蔡恒吉이 있었다. 교임 이재헌과 이헌명 등이 宋時烈按律凶疏卞誣와 사계종사소청을 인동향교에 3월 25일 열기로 정하였다.
18일에 우한등이 김순발, 장우일(장현광의 조카), 장만기, 장우추 등 20인이 발문하고, 20일에 장우한 등 수백인이 校宮에 난입하여 장경홍․장류를 교적에서 삭제하였다. 이 때의 향전은 방면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진통을 겪고 나온 것이 바로 5월 25일 곽의지를 소두로 하여 올린 청원소이다.
7월에는 金順發․宇樞․宇溟등이 張英達과 향교 校任을 놓고 다시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으로 김순발과 장우추(종파)가 목숨을 잃고, 장영달은 향전의 연고로 같은 형을 받았으나 살아 남았다. 당시 방백은 李秀彦으로 송시열 문인이다.
이후 인동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대립은 소강상태였다. 당시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숙종12(1686)년에 봄에 鄕人들이 합의하여 6년이래 鄕飮酒儀를 설행하고, 父老들이 각각 자제로 直月을 정하여 서로 경계하는 등 “근년에 영남에 드문 일이라”라고 할 정도였다.
숙종 15년(1689) 2월에 장우한․우명․만용 등이 의성감시에 가서 金侃 (죽봉) 등과 모의하여 客舍문에 “宋某按律事設於仁同其計仍殺士類也”라고 하였다. 이에 장경홍과 류는 먼저 전극태․극념형제와 상의하여 송시열 변무소 疏廳을 인동향교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장우한 등이 급히 상경하여 목내선, 장희재, 민암 등과 상의하여 협조의 약속을 받고 장만기, 장우상 등이 우추의 아들 次翼과 순발의 아들 昌冑와 함께 격쟁을 일으켰다. 따라서 전극태․극념형제가 준비한 송시열변무소는 이루지 못하였다. 장차익이 방백 李玄錫에게 정소하였고,49) 방백은 인동의 장영달, 장경홍, 장류, 대구의 전극태, 전극념, 선산의 李璋, 함창의 蔡恒吉등에 대한 조사를 벌여 옥에 가두었다. 이들이 노론측 향전의 주역인 셈이다.
이와 같이 영남지역내 노론이 승무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향전이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지적 기반이 확고한 남인들의 집요한 방해와 저지를 중앙정국의 비호 속에 노론이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방에서는 각 당파 세력간의 균형 유지를 놓고 대립과 분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사림의 공론이 존중되고 그에 따라 정치가 좌우되는 당시의 정치풍토 하에서 자파에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지방세력의 포섭과, 이를 통해 당세를 부식․확산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48) 이 자료는 전극념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이 중 「출기사록략」은 장경홍이 지은 것이다. 이 자료는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만 사건의 전개과정만을 본다면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49) 이 때 방백이 이현석으로 교체되었는데, 이현석은 전후 정국의 변화로 볼 때 남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창주와 장차익이 방백에게 보고하기를 자신의 아비가 죽임을 당하였을 때에 이수언이 在側하였고, 指導者는 전극태, 在外書囑者는 李東溟, 其間往來謀殺者는 장경홍과 전극념 등이라고 하였다.
2. 인산서원 향전
영남지역 내에서 서원건립을 두고 南老간의 향전이 일어난 대표적인 것이 인산서원의 치폐과정이다. 인산서원은 숙종 45년(1719)에 노론 정권의 적극적인 비호하에 경주부의 대표적노론인 谷山韓氏의 주도로 봉암산 아래에 창건되어 鳳巖影堂이라 하였다. 이 시기는 숙종 42년의 병신처분으로 노론의 도통이 정통으로 인정 받고, 정권장악이 확실해진 시기였다. 노론에 의해 서원신설 금지령이 발표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금령의 저촉을 피해 영당으로 건립된 것이다.
경종의 즉위 이후 소론 정권이 수립되고, 2년(1722)에 부윤이 권세항으로 교체되었다. 이에 울산부사 홍상빈이 권집․최남봉․정도양․박사겸․이광희․서행원․이덕문 등과 훼철하였다. 영정은 한흥유 집에 모시게 되었고, 韓是愈는 죽음을 당하였다. 영조의 즉위로 시국이 바뀌자, 영조 1년(1725)에 蔡命寶가 상언하고 閔鎭遠의 계로 그 해 7월 13일 본주 유생 韓再愈․鄭現등이 부윤 조명봉과 상의하여 인왕산 아래에 영당을 중건하고 11월 17일 유상을 봉안하여 인산영당이라 하였다.50)
인산서원의 치폐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한흥유․한시유 등 곡산한씨 들이다. 谷山韓氏는 15세기 韓淑老이래 경주지역에 세거하면서 노론화하기 이전까지는 유향소․향교 및 서악․옥산서원에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 문제에 남인계 사족들과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 한씨가 어떤 이유로 노론화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이후 정․주․서․백․유씨 등 기존의 남인계사족 중심의 향촌사회에서 소외된 세력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경주지역에서는 노론계가 크게 확대되었다.51)
50) 열읍원우사적
51) 이수건외, 「조선후기경주지역재지사족의향촌지배」, 민족문화논총 제15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3. 신안영당 훼판사건
영남지역 송시열을 제향한 원우가 적거지나 장리지지였던 것에 비해, 신안영당은 지역의 산명과 지명을 따랐다. 우암 추배시 道儒尹海가 찬한 院記에 의하면, 영덕현의 서쪽에 朱山이 있는데, 주산 아래에는 신안동이 있었다. 주산의 좌우에는 주정동, 성조동이 있었으며 신안동의 앞에는 화야리, 군자리 등이 있어 ‘신안’이란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숙종 28년(1702)에 유생들의 주도로 창건되었으며,52) 영조 24년(1748)에 읍촌 근처로 이건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주자만 제향하다가52) 신안영당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기타의 서원 관계자료 등에는 숙종28년(1702)으로되어있는데, 서원등록 만은 영조11년(1735)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많은 사료가 채택하고 있는 ‘숙종 28년’을 따라야겠지만 서원등록 의기록도무시할수가없다.왜냐하면 서원등록 의원․사기록은 숙종 40년부터 영조 17년 사이에 무허가로 건립되었다가 훼철된 것을 모두 수록한 것으로 건립 당시의 지방관까지 기록하고 있어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숙종 28년 창건되었다가 그 후 일시적으로 훼철되었고 영조 11년 다시 改建한 것을 양측이 서로 달리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조 6년(1740) 우암을 추배하였다. 노론은 주자와 송시열을 배향하는 원우를 각처에 세움으로써, 주자-송시열로 이어지는 도통체계를 수립하여 노론정통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론의 시도는 지방 유생들 향권 다툼으로 이어져 신향과 구향으로 대립되는 양상이 벌어졌다. 영덕현의 신세적 등이 영당에 침입하여 주자와 송시열의 진상을 훔쳐 내어 불태운 것이다.53) 여기서 영조 23년 영남어사 한광조의 보고를 보자.
“영덕의 故家와 大族은 모두 남인인데, 이른바 新鄕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西人이 되었다고 일컫는 자입니다. 요즈음에는 학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으나, 舊鄕과 서로 傾軋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자의 화상이 비가 스며든 것으로 인하여 더럽혀졌기 때문에, 신향의 무리가 간혹 그 죄를 성토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화를 전가시킬 계획을 꾸며 그 화상을 감추고 아울러 선정신 송시열의 화상도 감추어 버리고는 남인이 훔쳐갔다고 말을 퍼뜨렸습니다”54)
이 기사는 당색을 달리하는 구향과 신향이 향촌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졌고, 영당 화상을 빌미로 신향이 구향을 공격하였다. 이는 지방관의 비호 속에 사실이 왜곡되다가 어사의 파견으로 그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8세기에 오면 노론 주도의 정국운영이 장기화됨에 따라 영남지역내 노론의 수적 증가도 비례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나 자파계 서원을 근거지로 하여 남인과 향촌주도권을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53) 영조실록 권61, 21년 1월 갑신.
54) 영조실록 권65, 23년 6월 갑술.
Ⅴ. 맺음말
이상 영남지역 노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송시열 문인을 중심으로 학연․혈연관계를 분석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영남 지역 노론의 동향을 - 문묘종사청원과 원우건립운동을 중심으로 - 살펴 보았다. 그리고 영남노론이 출현하고 세력을 확대시켜 가는 과정에서 야기된 향전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았다.
송시열 문인들은 경상좌․우도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좌도의 경주권의 대표적인 송시열 문인 가문은 옥천전씨와, 밀양박씨이고, 안동권은 남양홍씨이며, 우도의 상주권은 창령성씨, 인천채씨, 인동장씨이고, 진주권은 안동권씨이다. 그 중에서 우도의 상주권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고, 활동의 폭 또한 적극적이고 활발하였다. 즉 상주지역의 사족들 중에 노론화가 일찍부터 이루어져, 영남 유생의 집요한 반대소에 반박하여 양현승무소를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올렸다.
이들 송시열 문인과 학연․혈연으로 연관된 신출노론들은 상주의 창령성씨와 대구의 옥천전씨를 중심으로 갑술환국 후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17세기 중반이후 ‘우율승무소’, ‘예론소’, ‘사계승무소’, ‘양송승무소’ 등 중앙정계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있을 때마다 세대를 이어가며 서인내지 노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원우건립을 통하여 노론세력의 확대를 가져와 급기야 남인과의 갈등을 빚고, 향전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노간의 향전은 사계승무소 疏廳설치문제와, 원우건립을 둘러싸고 중앙정국의 주도권의 향배에 따른 치폐문
제로 발생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초기 영남 유생의 노론화, 즉 신출노론 출현의 배경을 서인세력이 영남인들의 결집력을 약화시키고, 영남에 대한 분열책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남․서인 대결구도에서 그 배경을 찾기 보다 학통과 혼맥에서 찾아 보았다. 그리하여 영남지역의 노론화는 서인정권의 회유, 이간책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해당 가문의 계파 전체와 관련되어 세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본고는 영남지역 송시열의 문인을 중심으로 노론화 과정과 동향에 대한 분석에 치중하였고, 이와 함께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앞으로는 이들의 학문성향에 관한 고찰이 요구된다.
18세기 노론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정계와 학계가 낙론의 주도 속에 근기남인들의 부분 참여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호서․호남․영남지역은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고, 지역성은 더 고착되었다. 이는 중앙정계와 당색을 달리하는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였다.
노론 학계의 학문경향은 노론 낙학계의 시대적인 유연성과 근기남인의계 실학의 박학적인 면에 비하여, 가학으로 위축되고, 영남학 또한 퇴계학 일변도로 학문세계가 지나치게 편협하였다.55) 이에 관한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연구를 통하여 18세기 學界의 京鄕分岐현상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생각된다.
55) 영남학이 퇴계학 일변도로 학문세계가 지나치게 편협하다는 것은 이수건의 의견을 반영하였다(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 일조각, 1995).
첫댓글 감 사 합 니 다.
안동의 강흠(姜恰) 안연석(安鍊石) 이회보(李回寶) 系, 예안의 평산신씨, 상주의 함안조씨-조여(趙旅)의 후손, 순흥의 홍인한(洪翼漢) 홍섬(洪暹) 系, 대구의 윤두수(尹斗壽) 후손, 함창의 신석번(申碩蕃) 신석형(申碩亨) 系, 예천의 신민일(申敏一) 系, 선산의 김취문(金就問) 이약동(李約東) 김응기(金應箕) 박수홍(朴守弘) 후손, 김천(金山)의 조위(曺偉) 후손, 영주(榮川)의 하위지(河緯地) 系 등이 서인 내지 서인세력이라고 합니다. -이수건-
언제가 안동 지역에 사는 지인이 말하기를 자네 내 인동장씨는 노론을 해서 벼슬 한것이 아닌가하며 농 반 진반 하기에 장황하게 설명 할수 없어서 웃고만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노론 들에게 가장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의 14대조 문목공(장응일)은 우암과 적대적이라 후손 들이(위 인동 향전 참고) 많은 고통을 받았고 급기야 정조국상 중 노론 수령과 심환지 일당의 무고로 역모가 조작되어(세칭 경신옥사) 5명이 죽고 원찬되거나 감영에 수감되어 10ㄴ제 8대조부는 감영에서 옥사하고 과거는 40여년간 정거 되는 참화를 입었지요. 제 고조부가 병조참의 재임시 우암의 후손이 병조판서가 되자 부임하지 않자 임금이 이유를 묻자 장
원상의 선조(문목공 장응일)와 자기의 선조(송시렬)과 혐의가 있어서 부임할수 없다고 하여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낙민이 카페에 올린 자료는 보관되어
후세에 많은 지식을 전달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