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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 서소문과 새남터, 그리고 황사영과 가마골의 의미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교육 · 홍보 분과장
1. 순교 성지 서소문
2. 순교 성지 새남터
3. 황사영과 가마골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순교 성지 서소문과 새남터, 그리고 황사영과 가마골의 의미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교육․홍보 분과장
1. 순교 성지 서소문
1) 서소문 밖의 순교 터
서소문(西小門) 즉 소의문(昭義門)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 시장으로 통하던 문이다. 이 서소문 밖에 서울의 형장이 설정된 시기는 1416년(태종 16)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의주로와 서소문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부근, 즉 지금의 서소문 공원 옆에 있던 이교(圯橋, 흙다리)의 남쪽 백사장이었다.
‘서소문 밖’ 형장은 무악산(毋岳山)에서 발원하여 용산으로 흐르는 만초천(蔓草川, 旭川) 변이었으며, 서소문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비탈진 언덕 길 아래에 있었다. 조선 초기 이래로 이 지역에는 합동(蛤洞, 조갯골)․두께우물골[蓋井洞]과 같은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세종 때 서부 반석방(盤石坊)에 편입되었다. 또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시전(市廛)이 발달한 데다가 마포와 아현 방향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기록상으로는 연산군 때부터 이곳에서 죄인들을 처형 사실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미 처형지로 이용해 왔음이 분명하며, 또 이곳을 형장으로 설정한 이유는 서경(書經)에서 “형장은 사직단(현 서울 종로구 사직 공원 소재) 우측에 있어야 한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이곳이 4대문 밖이면서도 형조나 포도청과 가까웠으므로 한양의 형장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 특히 가장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순교 터가 된 것이다. 한국의 103위 성인 중 44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으며, 박해 1세기 동안 이곳에서 피를 흘린 순교자수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만도 90여 명에 이른다.
2)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
천주교 신자로서 처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은 신유박해 직후에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고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8일)에 참수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 6명이었다. 이후 이곳에서는 3월 29일에 2명, 4월 2일에 6명, 4월 20일에 1명, 5월 22일에 9명, 8월 27일에 2명, 10월 23일에 2명, 11월 5일에 3명, 그리고 12월 26일(양력 1802년 1월 29일)에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등 9명이 순교할 때까지 모두 40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법(正法, 즉 참수형)을 당했지만, 10월 23일과 11월 5일에 각각 처형된 황심(黃沁, 토마스)과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만은 능지처사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서울에서는 1819년 윤5월 21일(양력 6월 13일)에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 동정 부부, 고(高) 바르바라(혹은 막달레나)가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소문 밖에서는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다시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먼저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이름으로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진 직후인 4월 12일(양력 5월 24일)에는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6월 10일에도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 8명이 처형되었다. 이어 7월 27일에 6명, 8월 15일에 2명, 8월 19일에 9명이 참수되었고, 11월 23일(양력 12월 28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된 이튿날에도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던 최창흡(崔昌洽, 요한) 등 7명이 참수되었다. 이로써 기해박해 때만 모두 41명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에도 서소문 밖에서는 1월 21일(양력 3월 7일)에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홍봉주(洪鳳周, 토마스)가 순교하였고, 1월 23일에는 성 전장운(全長雲, 요한)과 성 최형(崔炯, 베드로)이 같은 장소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1868년 윤4월 7일(양력 5월 28일)에는 다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이신규(李身逵, 토마스), 권복(權複, 프란치스코), 조 도사 등 4명이 순교하였으며, 1871년 4월 9일(양력 5월 27일)에는 김창실(金昌實, 안토니오), 김여강(金汝江), 이돈호(李敦浩) 등 3명이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1866년 11월 8일에 이용리(李容離, 베드로)가, 1868년에 김백철(金百喆), 조계승(曺啓承), 남 데레사 등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나 이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조사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1868년 1월 23일(양력 2월 16일)에 참수된 김경보(金景甫) 등 6명, 2월 13일과 4월 14일(양력 5월 6일) 사이에 참수된 30여 명도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던 것 같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아울러 순교자 현양 운동이 계속 전개되어 왔지만, 서소문 밖 형장은 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이곳에 새로 서소문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에 교회 당국에서는 옛 순교 터를 사적지로 조성하기 노력하였으며, 1984년에는 103위의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공원 안의 동쪽편에 ‘서소문 순교 현양탑’을 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이 헐리게 되었고, 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1999년 5월 순교자 현양 위원회의 주관 아래 그 자리에 현재의 순교자 현양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서소문 밖의 순교자 현황>
1. 신유박해(1801년) : 총 40명
․2월 26일(양력 4월 8일)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최창현(崔昌
顯, 요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홍낙민(洪樂敏,
루가)
․3월 29일(양력 5월 11일) : 이희영(李喜英, 루가), 김백순(金伯淳)
․4월 2일(양력 5월 14일) :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정인혁(鄭仁
赫, 타대오), 이합규(李鴿逵), 윤운혜(尹雲惠, 루치아), 정복혜(鄭福惠, 칸디다)
․4월 20일(양 6월 1일) : 김건순(金健淳, 요사팟)
․5월 22일(양 7월 2일) :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 김현우(金顯
禹, 마태오), 이현(李鉉, 안토니오), 홍정호(洪正浩),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 강경복
(姜景福, 수산나), 한신애(韓新愛, 아가다),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
․8월 27일(양 10월 4일) :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10월 23일(양력 11월 28일) : 황심(黃沁, 토마스), 김한빈(金漢彬, 베드로)
․11월 5일(양력 12월 10일) :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옥천희(玉千禧, 요한), 현계흠(玄
啓欽)
․12월 26일(양력 1802년 1월 29일) :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김백심(金百深), 손경윤
(孫敬允, 제르바시오), 김의호(金義浩), 송재기(宋再紀), 최설애(崔雪愛), 장덕유(張德
裕), 변득중(邊得中), 이경도(李景道, 가롤로)
2. 기해박해(1839년) : 총 41명
․4월 12일(양력 5월 24일) :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박아기(朴阿只, 안나), 남명혁(南明
赫, 다미아노),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이조이(李召
史,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한아기(韓阿只, 발바라), 김아기(金阿只, 아가
다)
․6월 10일(양력 7월 20일) : 이광렬(李光烈, 요한), 김장금(金長金, 안나), 김노사(金老沙,
로사),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김누시아(金累時阿, 루시아)
․7월 27일(양력 9월 4일) : 박후재(朴厚載, 요한), 박큰아기(朴大阿只, 마리아), 권희(權
喜, 바르바라),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
녜스)
․8월 15일(양력 9월 22일) :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8월 19일(양력 9월 26일) :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제
준(金濟俊, 이냐시오), 김유리대(金琉璃代,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박봉
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김효
임(金孝任, 골롬바)
․11월 24일(양력 12월 29일) : 최창흡(崔昌洽, 요한), 정정혜(丁情惠, 바르바라), 이영덕
(李榮德, 막달레나),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 조증이(趙
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3. 병인박해(1866년 이후)
․1866년 1월 21일(양력 3월 7일) : 남종삼(南鍾三, 요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66년 1월 23일(양력 3월 9일) : 전장운(全長雲, 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1866년 11월 8일(양력 12월 14일) : 이용리(李容離, 베드로)
․1868년 윤4월 7일(양력 5월 28일) :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이신규(李身逵, 토마스), 권
복(權複, 프란치스코), 조 도사
․1871년 4월 9일(양력 5월 27일) : 김창실(金昌實, 안토니오), 김여강(金汝江), 이돈호(李
敦浩) 등.
* 순교자의 유해 안장
①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 가족들에 의해 고향(인천 반주골, 광주 배알미리)과 선산(경
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에 각각 안장되었다가 정약종․이승훈의 묘는 1981
년에 천진암으로 이장됨
② 허계임(막달레나), 이정희(바르바라)․영희(박달레나) 모녀 : 고향 봉천에 안장되었다가
언구비 묘지로 이장되었으며, 1967년 절두산 성해실로 옮겨져 안장됨
③ 정하상(바오로) : 순교 후 광주 배알미리에 안장되었다가 1981년 12월 천진암으로 이
장됨
④ 남종삼(요한), 최형(베드로) : 순교 후 박순집(베드로) 등에 의해 용산의 와서(瓦署, 용
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909년 5월에 명동대성당 지하 묘역으로,
1967년에 절두산으로 이장됨.
⑤ 홍봉주(토마스), 전장운(요한) : 신자들에 의해 노구산(마포구 노구산동)에 안장됨
*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는 순교자 : 다블뤼 주교의 묘사 내용 참조.
2. 순교 성지 새남터
1) 새남터의 위치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이촌 2동 199-1 소재) 남쪽 150~200m 지점.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새남터’[沙南基]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룻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1468년에 모반 죄인의 판결을 받은 남이(南怡) 장군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서소문(西小門)밖 대신 성직자들이나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2) 박해와 새남터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에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다섯날 동안 백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과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가 8월 14일(양력 9월 21일)에 주문모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어 1849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7월 26일(양력 9월 16일)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7월 29일에 역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de Bretenières, 白),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é, 申妖案) 신부 등이 1월 21일(양력 3월 7일)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신(앵베르, 모방, 샤스탕)은 신자들에 의해 노구산(老軀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漢尾山)으로 옮겨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의 1번지)으로 이장되었다. 다음으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일시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된 반면에 현석문의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진 정의배 회장의 시신은 노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전되었고, 베르뇌 주교와 우세영 등을 비롯하여 7명의 시신은 새남터에 가매장되었다가 1866년 4월 14일 신자들에게 거두어져 와서에 안장되었다.
3) 순교자 현양과 사적지 조성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운데서 주문모 신부 이외의 13명 순교자는 훗날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중 기해․병오박해의 순교자 5명은 1925년 7월 5일에,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프티니콜라와 푸르티에 신부를 제외한 6명은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남터의 순교자 중에서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중요한 순교 성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선 와서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7명의 시신을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다음으로 1901년 10월 2일에는 삼성산에 안장되어 있던 기해박해 순교자 3명의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에 다시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미리내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1886년에 1차로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새남터 사적지를 중시해 왔으며, 1890년에는 그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6년 9월 16일에 발족을 본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중심이 되어 다시 이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50년에는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7월 8일에는 그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이하게 된 1981년에는 ‘새남터 본당’이 설립되었고, 1987년 9월 12일에는 이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온 한국순교복자회에서 현재의 기념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3. 황사영과 가마골
1) 순교자 황사영과 그 가족의 애환
주문모 신부와 지도층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장해 가던 천주교회는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정약종을 비롯하여 지도층으로 지목된 신자들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도 의금부에 자수한 뒤 4월 19일(양력 5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봉양면 구학리) 교우촌으로 피신하였고, 9월 22일에는 그곳에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장문의 보고 서한을 명주에 작성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서>(帛書 : 명주에 담은 신앙)였다. 그러나 이 서한을 북경에 전하기로 된 밀사 옥천희(요한)가 체포됨으로써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도 관리들에게 압수되고 말았다.
* 교회 밀사와 신자들의 서한 : 밀사들의 활동과 서한 전달의 애환 설명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 1773~1838) 즉 정명련(丁命連)은 바로 황사영의 부인이었다. 마리아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 땅 마재(馬峴, 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정약현(丁若鉉)과 이씨 부인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정약현은 집안의 맏아들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의 이복형이었고, 모친 이씨 부인은 이벽(요한)의 손윗누이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의 조카요 정하상 성인의 4촌 누님이 된다. 바로 이러한 집안의 신앙 분위기 때문에 마리아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마리아는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에 16세의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을 하였다. 바로 그 해에 황사영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시(詩)에서 일등을 하여 정조로부터 ‘백지 3권, 붓 세 자루, 먹 세 자루’를 상으로 받기까지 하였다. 한편 황씨 집안과 정씨 집안은 모두 유명한 남인(南人) 가문으로 선대부터 같은 당색 안에서 혼인 관계를 맺어 왔다. 황사영이 정씨 집안의 맏딸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 들이게 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였음에 틀림없다.
황사영은 1775년에 서울의 아현(阿峴, 즉 애고개)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마리아도 그와 혼인한 뒤 이곳 아현에서 생활했음이 분명하다. 또 황사영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인척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게 되었으며, 이승훈․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하였다. 그리고는 과거 공부까지 폐기한 채 오로지 전교 활동에만 힘쓰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여 주문모 신부를 도왔고, 자신의 집을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아현의 집에는 자연히 신자들이 자주 모이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마리아가 이 공동체를 뒷바라지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몸을 숨기기로 작정하고 1801년 2월 15일 서울을 떠났으며, 2월 그믐부터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될 때까지 은거 생활을 하면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마리아와 아현에 함께 거처하던 가족들은 이에 앞서 2월 10일경에 이미 체포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따라서 포졸들이 그의 종적을 찾기 위해 먼저 그의 집을 급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강화도에 살던 황사영의 숙부 황석필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황사영과 같은 지도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가족들은 남편의 종적을 알아내려는 포졸들로부터 갖은 문초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는 어린 경한이를 데리고 오랜 옥중 생활을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도 따랐을 것이다. 실제로 법률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그때 양반 출신 부녀자들에 대한 문초와 형벌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주 신부가 박해의 종식을 위해 자수한 뒤에도 황사영의 종적만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7개월 후,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압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다루었고,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는 그에게 능지처사(陵遲處死)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11월 7일에는 부인 정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판결 내용을 보면, 모친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부인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이어서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을 나이가 안되었기 때문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이로써 황사영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 제주도는 유배지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이었다. 신유박해 때 이곳으로 유배된 사람들은 정난주(마리아) 외에도 이승훈의 아우 이치훈(李致薰)이 있었으나, 그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 때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 같다. 유배 이후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楸子島)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마리아와 경한에 관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라크루 신부는 한국 선교사로 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 교수 신부로 임명되어 귀국해 있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1909년 10월 5일에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과 황경한의 후손들의 비참한 사실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 잡지 <미션 가톨릭>(Les missions Catholiques)에 소개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의 후원자들이 라크루 신부에게 480프랑을 보내 주었으며, 그는 이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을 사주고 밭도 사주었다. 아울러 이때 그는 정난주(마리아)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 황경한에게 보낸 서한을 얻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때 라크루 신부는 마리아의 유배 생활에 대해서까지 조사하지는 않았다.
<라크루 신부의 1909년 10월 5일자 서한>
내게 미래에 대한 좋은 희망을 주는 것은, 내가 지난해 6월에 추자도에서 황 알렉산델(알렉시오의 잘못)의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방문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황 알렉산델은 1802년(1801년의 잘못)에 순교한 신자로, 샤를르 달레의 교회사에 그의 전기가 다소 길게 언급되어 있다.……북경의 주교(즉 구베아 주교)가 주(문모)라고 하는 중국인 사제 한 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황 알렉산델은 여러 해 동안 그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었다.
이 거룩한 사제와 모든 유명한 신자들이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박해자들의 손아귀를 기적적으로 벗어난 알렉산델은 회장이 되었다. 조선 교회는 이후 30년 후에야 사제를 얻게 되었다.
황 알렉산델은 고발되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동안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그에게 남겨진 모든 재산을 압수당하였다. 그의 모든 친척들이 유배되었는데, 모친은 거제도로, 그의 젊은 아내는 제주도로, 그의 세 살(두 살의 잘못)된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모두가 불행하게 생활하였으나, 비판을 받는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바로 나는 순교자의 후손들, 즉 세 살 때 추자도로 유배된 아이의 아들과 손자를 다시 찾는 무한한 기쁨을 누린 것이다. 신앙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참아받은 한 집안을 불행하게 그대로 놔둘 수 있을 것인가?
이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70년대에 와서 교회에서는 다시 한 번 마리아와 경한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대구의 교회사가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이 1970년에 우연히 황사영의 후손 황찬수(당시 대구시 신암동 거주, 황경한의 4대손)를 만나 그로부터 창원 황씨 족보와 가첩, 서한 등을 받아 검토하게 되었고, 황찬수가 소장해 오던 제주 사람 김상집(金相集, 혹은 尙集)의 1838년 서한 2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어 김구정은 1973년 초 모슬포 본당에 재임하던 고 김병준(金丙準, 요한) 신부에게 자신이 황찬수에게 들은 여러 사실들을 확인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침내 정난주(마리아)의 무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 제주의 대정 성지와 추자도 성역화 사업
2) 외로운 가마골의 무덤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는 순교자 무덤이 외롭게 안장되어 있다. 신유박해로 순교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알렉시오)의 무덤이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 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 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우 찾은 황사영의 묘비에는 ‘순교자 황사영 공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매국의 결과로 치부되었을지라도 묘비를 건립한 사람들은 이를 순교로 이해했던 것이다. 아니면 “황사영은 출생 가문과 개인적인 공로로, 또 드물게 보이는 재능과 덕행으로 일반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7쪽)라고 한 것처럼 그의 덕행을 기리고자 한 것임이 분명하다.
황사영의 무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사적지로 조성되기도 전에 주변이 개발되면서 순교자의 무덤은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이제 황사영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 황사영과 시복 시성 : 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