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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지태, 키가 계속 크는 배우 | |||||||
이동진 닷컴 | 기사입력 2007-05-30 06:02 | |||||||
유지태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사람에게서 “지태씨는 12년 동안 변한 게 전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지난 몇 년간 몇 차례 만났던 내게도 유지태는 늘 유지태였다. 유지태는 주관이 뚜렷하다. 유지태는 진지하다. 유지태는 과묵하다. 그리고 입에 발린 소리나 거짓말을 잘 못 한다.
그러나 자연인 유지태는 늘 유지태였지만, 배우 유지태는 늘 유지태가 아니었다. 청춘영화 ‘바이준’(1998년)으로 데뷔한 후 오래지 않아 확고한 스타덤에 오른 그는 10년간 16편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20대를 온통 도전의 궤적으로 그렸다. ‘봄날은 간다’에서 변해버린 사랑의 잔해와 마주쳤을 때, ‘올드보이’에서 운명의 밑바닥을 허무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을 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권태로운 삶의 비린내를 맡았을 때, ‘뚝방전설’에서 유리병으로 손을 거듭 내리치며 마음 속의 악마를 풀어놓았을 때, 배우 유지태의 영토는 한 뼘씩 계속 넓어졌다. 187센티미터나 되는 유지태의 배우로서의 키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그렇게 ‘유지태’라는 성장영화는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인 5월27일 저녁, 경복궁 근처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뒤뜰에서 그를 만났다. ‘황진이’에서 황진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놈이’로 출연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그는 막 식사를 시작하려다 말고 서둘러 입을 닦았다. “잠시 기다릴 테니 저녁 마저 드세요.” 그러나 그는 아예 그릇을 치웠다.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죠. 저는 그냥 여기 함께 나온 샌드위치 먹으면서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꽤 길었던 인터뷰의 끝까지, 단지 몇 번 물잔으로 목만 축였을 뿐, 샌드위치에 끝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날 그는 7주간 매달려온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의 마지막 공연을 마친 직후였다.
- 7주간 매일 같이 공연하신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를 오늘 막 끝내셨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도 있었는데, 연극이 다 끝나면 정말 어떤 기분입니까.
“드디어 끝났구나 싶은 마음이죠, 뭐.(웃음) 사실 직접적인 스트레스는 연극이 영화보다 더 많아요. 영화는 카메라라는 매개체가 있고 또 보호막도 있는데 연극은 모든 게 직접적이니까요. 이 연극에서 제 캐릭터(그는 이 연극에서 상처 입은 영혼을 보살펴주는 따뜻한 인물로 나왔다)가 남자들 보기엔 좀 비호감일 수도 있잖아요? 오늘도 맨 앞 줄의 남자 관객 한 분이 마치 들으라는 듯이 ‘아이, 참’ 그러더라구요. 그런 말을 듣고서도 흔들리지 않고 연기를 계속 해야 하는 게 연기자에겐 참 부담이 되는 부분이죠.”
- 그 분 틀림없이 여자친구랑 같이 오신 분일 겁니다.(웃음)
“맞아요.(웃음) 영화야 연기를 좀 못해도 술 먹는 자리가 아니면 대놓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그런데 연극은 직접적으로 들리거든요. 얼마 전에는 무대 위에서 대사가 좀 말렸는데 한 관객이 ‘유지태, 왜 그래’라고 대놓고 말하더라구요.(웃음) 어느 고등학생 관객은 ‘아, 뭐야’ 그러기도 하구요. 솔직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많습니다.”
- 장윤현 감독님의 영화 ‘황진이’에 개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유지태씨가 맡은 ‘놈이’라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황진이’들에서는 없었던 인물이니까요. 처음 역할을 제의 받았을 때 어떻게 느끼셨나요.
“홍석중 작가가 쓴 소설에서도 놈이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황진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지만 그녀의 진짜 사랑이 누구였냐를 생각하면 놈이를 연기하는 것이 영광이었죠. 그런데 왜 조연을 하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이번에도 어떤 기자 분이 물으시길래 ‘영화를 다 보시고나면 그런 생각 안 하실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솔직히 처음엔 그런 부분이 약간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멋진 캐릭터를 언제 해볼까,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훨씬 더 컸어요. 장윤현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구요. 사실 ‘올드 보이’ 때도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영화에서 주연을 하느니, 좋은 영화에서 단 한 커트 나오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 영화 제목이 ‘황진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네요. 타이틀 롤은 다른 배우가 하니까요.
“아까 그 기자 분에게 제가 사실 좀 공격적으로 답을 했어요. ‘고하토’라는 영화 보셨냐, 기타노 다케시와 최양일과 아사노 타다노부처럼 쟁쟁한 사람들이 다 조연이었는데 주연은 정작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구요. 저는 작품을 보고 들어간 거지, 배역의 비중이나 인기를 보고 들어간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내 인생의 영화로 ‘올드 보이’가 있어서 너무 자랑스러운데 거기서 조연과 주연을 나누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 그런 놈이를 어떻게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황진이’는 대중적인 코드가 맞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멜로영화의 규칙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멜로에 등장할 법한 멋진 남성으로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놈이는 사실 임꺽정과 비슷할 수도 있는 캐릭터인데,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상하니 나만의 놈이를 만들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이 영화의 유지태씨 첫 대사에서 “이놈저놈 할 때 바로 그 놈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장면이 나오죠. 놈이라는 이름 안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사회적인 문제, 계층적인 문제에 관심을 둘 것 같다는 느낌을 주죠.
“원작 작가인 홍석중씨가 북한 분이시니, 사회주의적인 생각이 투영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행동으로 조선의 완고한 계급 질서를 무너뜨린 황진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바로 천한 계급이었다는 거니까요.”
- 완성된 영화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대중성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메이킹이 훌륭한 영화라고 봅니다. 감독님의 노력이 그대로 엿보이는 작품이죠. 기생 황진이가 아니라 인간 황진이를 그리려고 하셨구요. 송혜교씨를 만날 때 감독님이 ‘내 아들도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셨대요. 만일 이런 대작이 대중적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런 것도 문제겠죠.”
- 함께 작업해본 장윤현 감독님은 어떠셨습니까.
“무척 영리하고 영민한 분이십니다. 게다가 배려심도 많아요. 너무 좋더라구요. 술을 좀 많이 드셔서 그게 좀 걱정이 돼요.”
- 송혜교씨는 어땠습니까.
“워낙 예쁜 사람이 행동도 참 예뻐서 촬영장에서 다들 송혜교씨를 많이 좋아했지요. 힘든 촬영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짜증을 안 내는 타입이더라구요. 제가 영화에 집중되어 있는 배우인데 비해서, 송혜교씨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영화까지 다 열어놓고 생각하는 배우입니다. 저는 사실 송혜교씨가 스스로 스타 이미지가 더 강한 배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좋더라구요. 연기도 중요하지만 지난 10년간 가꾼 스타성도 내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 좋았어요. ‘황진이’에서의 연기도 매우 잘했다고 봅니다.”
- 사극은 처음인데, 특별히 어렵진 않으셨나요
“다들 기술적으로 현대극과 차이가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사극 대사라도 제 말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을 담은 연기를 하면 그게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죠.”
- 그래도 다듬어지지 않은 긴 머리로 영화에 나오는 것은 부담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웃음)
“맞습니다.(웃음) 긴 머리를 붙여서 영화 속에 처음 등장할 때 사람들이 실소 할까봐 무척 고민했어요. 첫 장면에서 다들 웃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캐릭터도 깨질텐데. 그래서 분장하시는 분께 잘 부탁드린다고 거듭 말했어요.(웃음) 감독님도 제게 배려를 해주셨구요.”
- 황진이가 놈이에게 기둥서방이 되어달라고 말한 뒤, 놈이가 감추어둔 비밀을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어떠셨나요.
“원래 그 장면은 제가 고백할 때 저의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그걸 설명해주는 장면들이 이어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감정이 무척 중요한 장면이라고 판단해서 감독님께 제가 감정대로 연기를 해보겠다고 제안했지요. 그렇게 감독님이 흔쾌히 받아주셔서 바뀐 장면입니다.”
-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를 제작하시고 원안을 쓰시고 주연까지 하셨습니다. 이 연극은 어떻게 착상하시게 된 작품인가요.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원안을 썼습니다. 철 없었을 때 제가 어머니에 대해 오해했던 것을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그때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싶더라구요. 그걸 연극으로 옮기면 좋겠다 싶었어요. 거기에 서정주 시인의 시 ‘문둥이’에서 떠오른 이야기를 접목시킨 거죠.”
-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이번 연극의 계기도 그렇구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저는 힘든 시간을 지내오면서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그러다가 철이 들면서 여인으로서의 어머니 모습, 인간으로서의 어머니 모습, 어머니로서의 어머니 모습을 다 이해하게 됐다고 할까요. 제게 어머니는 단 하나 남은 가족이기도 합니다. 저는 친척도 없으니까요. 어머니가 힘드셨던 모습을 많이 보았기에 잘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연극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배우로서 좀더 폭넓은 연기에 도전하고 또 에너지를 얻을 기회로 삼으려 하시는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극을 직접 보니, 연기 못지 않게 만들고 싶은 극을 스스로 제작하려는 욕망도 그 못지 않게 큰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둘 다 맞습니다. 배우에게 무대는 에너지를 얻고 연기를 향상시킬 좋은 기회를 주지요. 또 하나는 말씀하신대로 이야기를 만들고 극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어요. 더 나아가서 저와 잘맞는 사람들과 일종의 인프라를 만들어보려는 생각도 있구요. 미래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 큰 것을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 오해하는 분들도 있죠. 제가 재능에 비해서 너무 많은 명성을 갖고 있다고 못마땅해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웃음) 그렇게 연극을 하면서 인생공부도 하고 배우는 거죠.”
- 2003년에 단편영화를 직접 연출한 뒤에도 비슷한 반응에 접한 적이 있으셨죠?(웃음)
“영화든 연극이든, 어느 현장이나 그런 분들이 계신 것 같더라구요. 심지어 어떤 영화 쫑파티 때는 제가 노래를 부르니까, 같이 공연했던 어느 배우 분께서 술에 취해 제 바로 앞에 와 어르는 식으로 ‘더해봐, 더해봐’라고 말하시더라구요. 그리고 나선 ‘연기 좀 더 해’라고 하셨죠. 그래도 함께 작업할 때 이해심 많고 선하신 분들이 정말 많아서 늘 감사해요.”
- 미래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 큰 것을 해볼 수도 있다는 말씀은 영화 연출을 뜻하시는 건가요?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확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훗날 장편영화를 연출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저는 상업영화 배우니까, 오히려 독립영화 쪽에 더 에너지를 쏟고 싶습니다. 한국영화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구분이 모호한 편인데, 독립영화를 하면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죠. 라스 폰 트리에나 마이크 피기스 감독처럼 저예산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 단순히 감독을 하시려는 게 아니네요. 꿈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데요?
“영화를 계속 찍다 보니까 스태프들의 복지 같은 영화 제작 환경에 관심이 많아지더라구요. 우리 영화계의 악습이 있다면 그걸 바꾸는 게 제 꿈의 일환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꿈은 큰데 재능이 모자라서 정말 아쉬워요.”
- 1998년에 ‘바이준’으로 충무로에 데뷔하신 후 10년간 16편의 영화에서 연기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영화에 출연하신 편인데요. 자부심이 있다면 어떤 것이고 후회가 있다면 또 어떤 겁니까.
“스타 마케팅을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타이프 캐스팅을 고수한 채 1-2년에 한 편씩 적합한 영화만 하면서 CF로 유지하는 게 제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더라구요. 물론 제가 그렇게까지 많이 했던 것은 영화를 좀더 알고 싶어서 무모하게 뛰어든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배우라면 필모그래피(작품목록)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을 때 할 수 있는 데까지 적극 도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제게 자부심이 있다면 그간 영화에 계속 출연해왔다는 것에 있지요. 그건 제가 노력을 계속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후회는 매번 들죠. 항상 나 스스로 자학하고 자책하고, 좀더 재능이 있었다면,하고 안타까워하죠.
- 유지태씨는 청춘 스타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셨죠. 그런데 그 열여섯편의 영화 목록을 쭈욱 보니까 유지태씨는 스스로의 스타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선택해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더라구요.
“그랬다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취향에 따라 작품을 골랐던 것 같아요. 멜로를 제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제 이미지만 갖고서 캐릭터를 만드는 일에 별다른 매력도 못 느꼈구요. 연기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이 더 좋아요. 그래서 이른바 루저(loser) 캐릭터를 많이 연기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는 일부러 저의 스타 이미지나 멜로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를 대놓고 망가뜨려보고 싶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나 보고 싶었거든요.(웃음)”
- 예전에는 멜로를 해도 ‘동감’이나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모성본능이랄까, 주로 여성 관객들이 보호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셨죠. 그런데 최근엔 ‘가을로’도 그렇고, ‘황진이’도 그렇고, 여성을 적극 보호해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어요. 이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웃음)
“관계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그런데 제가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듯한 이미지에서 스스로 탈피하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뚝방전설’이나 ‘올드보이’ 같은 자극적인 영화에서 독한 캐릭터들을 맡았던 것은 그런 무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아요.”
- 저는 사실 작년 여름에 개봉한 ‘뚝방전설’에서의 유지태씨 연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상대의 손을 잡은 채 교대로 유리병을 내리치는 장면에선 정말 섬뜩하더라구요. 악마적인 캐릭터에도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던데요.
“누구든 선한 감정, 악한 감정을 모두 함께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제가 갖고 있는 매력에 대해 최근 들어 혼돈스러울 때가 많아요. 저는 배우라서 무대에 서거나 카메라 앞에 서면 자꾸 뭔가를 하고 싶어져요. 그런데 이번 연극의 연출자께서 그러셨죠. ‘지태씨는 지태씨의 가장 큰 장점을 모르는 것 같아. 당신은 가만히 있을 때 가장 매력적이야’라구요. 가만히 있으면 제가 뭔가 큰 걸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대요. 악한 연기, 독한 연기, 선한 연기. 결국 연기는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색깔을 갖고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뚝방전설’도 제가 한 거구요.”
- 서른을 막 지났는데, 서른이라는 나이가 지나기에 어떠셨나요.
“서른이란 나이에 대한 느낌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나이라기보다는 내 연기에 대한 자학 때문에 크게 힘들었던 때가 있었죠. 저는 지금도 자학을 많이 하는 배우인데, ‘올드보이’ 끝나고 나서 정말 자학을 많이 했어요. 그때 박찬욱 감독님이나 최민식 선배에 비해서 제 자신이 너무나 작아 보이고 제가 그들의 영화를 망친 게 아닌가 싶은 자괴감 마저 들었죠. 저는 연기자에게 인품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올드보이’ 이후의 영화들에서 촬영 중 부딪치는 일이 생기면서 제가 과연 연기자로서 재능이 있는 것인지 괴로울 때가 많았어요. 그땐 너무 괴로워서 집에 처박혀서 3개월 동안 라면만 먹고 지낸 적도 있었죠. 그때가 제 연기 인생의 사춘기였나봐요. 공교롭게도 그때가 서른을 전후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 그렇게 3개월이나 자학하면서 괴로워하셨다면 뭔가 결론을 내셨겠네요.(웃음)
“고민하는 시간에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보자는 결론이었죠.(웃음) 어떤 분들은 배우가 영화를 굳이 많이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시죠. 연기는 순간의 진실이고 일종의 감각인데 너무 많이 영화를 보면 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배우가 영화에 박학다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이야기를 할 때도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에 대해서 툭 치면 툭 나와야 하는 겁니다.”
- 그렇게 챙겨보신 영화들 중에서 특히 좋았던 작품들은 어떤 건가요.
“저는 특정 감독의 영화를 전부 챙겨보는 스타일입니다. 주로 디비디로 보는데 국내에 없는 것은 아마존에 주문을 하기도 하고 외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합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참 좋은데 저는 ‘리노의 도박사’가 무척 인상적이더라구요.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도 좋았어요.”
- 주로 미국 쪽 젊은 감독들의 신선한 작품들을 좋아하시는군요.
“거장들의 영화도 챙겨 보고 있습니다. 마틴 스코세지는 ‘특근’같은 작품도 무척 좋았어요. 그리고 저는 짐 자무시를 일종의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 짐 자무시라니, 독립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꿈과 관련이 있으신 것 같네요.
“그렇죠?
‘버팔로 66’ 같은 영화도 좋아요.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나 미카엘 하네케 영화도 좋아합니다.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는 정말 좋더군요. 지난 번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기획했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프로그램에서도 저는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을 추천했어요. 그 분의 절제미 같은 게 좋더라구요. 스탠리 큐브릭도 너무 좋아해요.”
- 좋아하는 영화들 말씀하시는데, 눈이 반짝반짝 하시네요.(웃음) 큐브릭 영화 중에서는 어떤 작품을 베스트로 여기십니까.
“저는 ‘베리 린든’이요. ‘킬러스 키스’까지 큐브릭 영화는 다 봤어요. 저희 집에서는 텔레비전이 안 나와요. 텔레비전이 있긴 하지만 그걸 모니터로만 쓰고 있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지요. 가급적 하루에 한 편은 꼭 보려고 노력해요. 요 몇 달은 연극 공연 때문에 그렇게 못했지만요.”
- 유지태씨가 영화를 통해 말한 모든 대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아마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일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은 변하면 안 되거나 변할 수 없는 건가요?(웃음)
“사랑은 변하지 않는데 사람은 변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순간의 진실일 거예요. 그 순간을 1초로 할지, 100년으로 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겠죠.”
- 정말 내 인생의 사랑이 온다면 그 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그게 얼마나 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을 최대한 늘리려고,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 며칠 전 유지태씨와 김효진씨의 사랑에 대한 기사 때문에 신경 많이 쓰이셨죠? 제가 그 이야기에 대해서 묻는다면 불편하신가요?
“아뇨. 불편하지 않아요. 4년 전에 광고 촬영으로 만난 후 그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영화와 음악과 책에 대한 취향이 서로 상당히 비슷해요. 저는 요즘 상대적으로 영화를 더 많이 보고 그 친구는 책을 더 많이 보긴 하지만요. 그러다가 5-6개월 전에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외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한국에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허전하더군요. 옆에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래서 전화 통화를 길게 자주 했죠. 그러다가 제가 술 먹은 김에 사랑 고백을 했어요.(웃음) 연인 사이라는 게 공개되니까 더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좀더 책임감을 느끼게 됐으니까요.”
- 자신의 행동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억지로 그러는 것은 아닌데 제 성향 따라서 가는 것 같습니다. 확신이 든다면 감출 것도 없고 말을 가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현명한 말이라면 말이죠. 남들에게 숨긴 채 몰래 만나고 그러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 점에서도 그 친구가 잘 이해해줘서 고맙더라구요.”
-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시죠?
“네. 집에 있으면 잘 안 나와요.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책 보다 보면, 시간이 언제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런 면에서도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죠?
“그렇습니다. 사실, 배우니까 가능한 특혜지요.”
-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었죠. 늘 심사를 받는 입장에서 직접 심사를 해보니 어떠셨나요?
“재미있었어요. 무척 특이한 경험이었죠. 영어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웃음) 그런데 심사하면서 솔직히 괴롭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단편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잘 알거든요. 그런데 그걸 딱 한 번 보고 심사하는 게 너무 잔인하다고 느낀 거죠. 사실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몇 해 전 어느 감독이 국내에서 열리는 한 영화제에 단편영화를 보냈는데, 실수로 자투리만 모아놓은 필름을 잘못 보냈다죠? 그런데 심사위원들로부터 ‘무척 실험적인 영화’라는 평가가 나왔답니다.(웃음)”
- 본인이 배우라는 직업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항상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연기자로서 제가 재능이 있는지를 매일 자문해봐요.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그런데 저는 사람에겐 운명이라는 게 있는데, 그 운명을 받아들일 자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배우가 운명이라면 기꺼이 배우로 남을 겁니다.”
- 이제껏 함께 하셨던 감독님들 중에 어떤 분과의 작업이 가장 좋으셨습니까.
“아무래도 허진호, 박찬욱, 김대승 감독님이죠.”
- 그 세 분을 비교해주신다면요?
“모두 인품이 좋으시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강하시다는 공통점이 있으세요. 허진호 감독님은 리얼리티를 아주 중시하십니다. 규정화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시고 콘티도 없이 현장에서 느낌으로 만들 때가 많으시죠. 박찬욱 감독님은 워낙 완벽주의적인 분이시라 모든 걸 머리 속에 이미 다 짜놓고 형상화하십니다. 배우의 예술성을 인정해주시는 것도 참 좋구요. 김대승 감독님은 규칙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미리 짜놓은 규칙성이 아니라 만들어지지 않은 데서 나오는 규칙성입니다. 콘티가 없는데도 현장에 가보면 미장센을 무척 중요시하고 모두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컨트롤하시지요.”
- 이제껏 출연한 영화 중에서 가장 자랑스런 작품은 어떤 겁니까.
“제게는 사실 칭찬 받은 영화가 별로 없잖아요.(웃음)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칭찬을 많이 받은 작품에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올드보이’와 ‘봄날은 간다’죠, 뭐.”
- 아직 함께 해보지 못한 감독들 중에서는 어떤 분의 연출작에 출연하고 싶으세요?
“봉준호 이재용 김태용 감독님 같은 분들이예요. 배우들은 다 비슷할 거예요. 배우들이 다들 영리해서, 스타성이 있는 배우들은 좋은 감독님을 찜 해놓고 ‘나랑 하자’고 하니, 인기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야 해요. 옛날에는 ‘영화는 영화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감독 스태프 투자 배급까지 다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 궁극적으로는 어떤 연기를 하고 싶으세요.
“저는 ‘연기를 안 하는 연기’가 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직 관철시키진 못했죠. 그런데, 무대에 서 있으면 관객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괜히 괄약근도 더 조여야 할 것 같죠.(웃음) 목소리도 더 크게 해야 할 것 같구요. 카메라 앞에서도 마찬가지죠.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 연기라는 것은 결국 안 하는 게 더 어렵군요.
“ ‘피아니스트’에서 이자벨 위페르를 보면, 정말 절제하는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또 ‘8명의 여인들’에서 보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연기를 하잖습니까. 이런 걸 다 잘해야 하는데 참 어렵죠. 결국 유지태식의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중이 유지태씨에게서 바라는 모습과 유지태씨가 바라는 모습이 상충하면 어떻게 선택하실 건가요.
“제 경험에 비춰보면, 타협한 영화가 최악의 영화였어요. 그래서 제 뜻을 버리고 타협하진 않으려 해요. 제가 더 이상 선택받지 못하면 그때는 영화를 즐기는 관객으로서 영화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다른 한 편, 제 취향대로만 고르면 관객이 외면할 거라는 생각도 해요. 배우라면 그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외면하면 제가 설 자리가 없어지니까요. 연기는 제 삶이잖습니까. 더스틴 호프먼이나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대배우가 ‘미트 페어런츠’ 같은 영화 하시는 거 보면, 그런 선택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그 작품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잖아요. 결국 제가 선택하기 나름일 것 같아요. 감독이 신인이라도 시나리오가 좋거나 가능성이 있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거죠. 그 선택이 예전만큼 자유롭지는 않아서, 압박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그 압박이 나이 들수록 더 심해지갰죠. 그래서 젊을 때 저축도 많이 하고 외제차 타지 않고 국산차 타고 그래야 돼요. 나중을 위해서.”
- 초기에 출연했던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로 코미디는 전혀 찍지 않으셨네요. 코미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가요?
“아뇨. 다만 코미디는 자칫 경박해질 수도 있으니까 좀더 신중할 뿐입니다. 코미디의 경우 감독님의 주관이 뚜렷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요즘엔 제 연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제 연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아주 조금이라도 풍족해졌으면 좋겠어요.” |
첫댓글 읽고 너무 놀랐씀미다...정말 꽉찬 배우더군요... 제목때문에 낚였다가... 읽으면서 낚이길 잘했다고 생각했씁니다.
로메 언니 오랜만이예요~~ 근데 문장도 오랜만인가봐~~~ㅋㄷㅋㄷ
1.10년간 16편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20대를 온통 도전의 궤적..2.좋지 않은 영화에서 주연을 하느니, 좋은 영화에서 단 한 커트 나오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3.연기를 안 하는 연기’가 하고 싶어요... 앞으로,,키가 더 클것같은 느낌이 팍팍,, 기대가되는 배우인것 같습니다,,
만약...제가 동건님을 몰랐다면...지금쯤 이배우를 좋아하고 있겠군요....그러나 전 동건님이 좋습니다^^ 좋아하는것...제맘을 어찌 못하잖아요
유지태는 그냥 있어도 왜 이케 분위기가 존지...ㅋ.ㅋ
나두 나두......글케보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