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술희/ 우직하게 태조 유언 받들어 끝까지 혜종 보필-
-왕규/ 이해득실 따지며 권모술수부리다 비참한 최후-
박술희(朴述熙)는 혜성군(지금의 충남 당진군 면천) 출신이었다. 그 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용감했다. 먹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식성도 좋았다. 심지어는 두꺼비나 개미도 먹어치웠다.
그는 나이 18살에 궁예의 호위병으로 입신했지만 왕건 덕분에 출세 했다. 고려 개국 1등공신이었던 복지겸의 고향이기도 한 면천은 당 시 해상무역의 요지였다. 개성이나 나주 같은 지역과 동질적인 성격 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씨와 친밀해질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
실제 그는 왕건에게 충성을 다했다. 전쟁터에 나가면 누구보다 용감 하게 싸웠다. 왕건의 첫째 아들이었던 무(武)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무의 태자 책봉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의 생모 오씨의 집안이 ‘측미(側微)’하여 반대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측미하다는 말 은 신분적으로 미천하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권력이나 군사력의 부 족을 뜻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자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주었 다. 자황포는 태자들이 입는 옷감이었다. 오씨는 다시 이를 박술희에 게 보여주었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무를 태자로 책봉 할 것을 청했다. 무가 태자로 책봉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는 그만큼 박술희에 대한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얘기다. 태조 는 재위 26년(943) 4월 죽음을 대비해 써두었던 훈요 10조를 그에게 넘겨주었고, 임종할 때에는 그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그대의 힘에 의해 태자가 책봉되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태자를 잘 보 필하여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오.”
그러나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태조의 다른 아들들이 왕 위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에게는 29명에 달하는 왕비가 있 었다. 거기서 25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다 왕위를 노리고 있었 다. 그들의 아버지나 친척, 특히 왕규가 그러했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장인이었다. 혜종의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씨가 바로 왕규의 딸이었다. 그러나 왕규는 이미 태조에게 두 딸을 바친 바 있다. 따라서 혜종에게는 장인일 뿐 아니라 외할아버지 뻘이 되 기도 했다. 왕규의 딸과 태조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광주원군이라 했다.
왕규는 원래 함규(咸規)였다. 그는 최고 관부였던 광평성의 차관급인 시랑이었다. 후에는 태조공신이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왕씨 성을 받 았다. 그도 태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태조의 임종 때 염상· 박수문 등과 더불어 유조(遺詔)를 받을 정도였다. 태조는 생시에도 우세한 정치적 지위에 있던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함을 보강시켜주었다.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신명순성태후 유씨의 아들인 요·소의 세력이 었다. 이들은 혜종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장자가 아 니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왕규는 혜종 2년(945) 이런 움 직임을 왕에게 알렸다. 이때 사천공봉의 직위에 있던 최지몽도 국가 에 반드시 반적이 있을 것이라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혜종은 오 히려 딸을 소와 결혼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혜종이 그의 딸 을 소와 결혼시키자 잘못하면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사위인 혜종을 제거하고 외손자인 광주원 군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밤에 왕의 침실에 자객을 보냈다. 자객은 혜종이 깊이 잠든 줄 알았다. 장차 칼을 내리치려 하는데 혜종의 주 먹이 먼저 얼굴을 강타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혜종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자객을 끌어내게 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묻지 않았다.
또 하루는 혜종이 몸이 불편하여 신덕전에 있었다. 그런데 최지몽이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는 일찍부터 천기를 볼 줄 알았다. “폐하! 제 가 천기를 보니 오늘밤에 큰 변고가 있을 조짐이옵니다. 그러하니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십시오.” 혜종은 그의 말대로 몰래 중광전으 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왕규는 야밤에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벽을 뚫었다. 혜종의 침실로 들어가니 침대는 이미 비어 있었다. 왕규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최지몽의 계략인 줄 눈치챘다. 평소 가깝게 지냈 던 그였기에 이를 안 것은 최지몽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지몽을 불렀다. 그리고 칼을 빼어 위협했다. “임금의 침석을 옮긴 것이 너 의 모사이지? 너를 죽여 없앨 것이다.” 그러나 최지몽은 눈을 감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왕규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혜종의 측근이었 고 신망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규는 조용히 물러갔다. 혜종은 이 역시 벌하지 못했다. 공연한 사 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왕규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좋든 싫든 자신에게는 장인어른이었다.
이러한 왕규의 혜종 제거 시도는 2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같은 혜종의 지지세력이었던 박술희와의 결별을 초래했다. 박술희는 신변 의 위협을 느끼고 항상 병사 100여 명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다. 둘째는 혜종의 성격 변화로 나타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질고 도 량이 넓었던 혜종이 의심하고 꺼려하는 바가 많게 되었다. 감정의 통제도 불가능해졌다. 아무 때나 화를 내고 어떤 때는 혼자 껄껄 웃 기도 했다. 아첨하는 소인들만 가까이 하고 상벌도 공평성을 잃었다. 그러자 혜종이 즉위할 때 기뻐했던 많은 사람이 이제 불평하고 원망 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혜종은 병이 들었다. 혜종은 자신의 제1비 진천 임씨에게서 낳은 흥화랑군(興化郞君)을 후사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우들 중에서 후사를 고 를까도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처형의 아들이며 장인의 외 손이기도 한 광주원군을 후사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번 째 이복동생인 요를 제치고 그를 후사로 정하는 것도 비합리적이었다.
요(정종)는 이 틈을 타서 긴밀하게 움직였다. 그는 박술희가 반역을 음모했다고 모함하여 그를 갑곶으로 유배시킨 뒤 살해했다. 이때 왕 규도 박술희의 제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박술희는 왕규와 요에 게는 공동의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요는 박술희를 제거한 뒤 서경의 왕식렴 군대를 끌여들여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마지막 장애물이었 던 왕규를 제거했다.
박술희와 왕규는 처음에는 한 배를 탔던 인물이었다. 태조 왕건의 큰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혜종(무)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혜종이 정치적 결단을 확고히 하지 못하자 분열했다. 박술희는 우직 하게 태조의 유언을 지키려 했다. 끝까지 혜종의 곁을 떠나지 않았 다. 그러나 왕규는 재빨리 이해득실을 따졌다. 그리고 자신의 사위였 던 혜종을 제거하고자 했다.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 해서였다. 태조의 또다른 아들인 요·소의 세력을 이용하여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날은 다시 자 신에게 돌아왔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린 꼴이었다. 권모술 수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