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오늘의 성인♡ =============== 성 아폴리나리스 프랑코(Apolinaris Franco)성 가롤로 스피놀라(Charles Spinola) 성 리카르도 드 생 안느, 성 프랑소와 드 생 보나방튀르, 성 폴 드 생 클래르. 성 세바스티아누스 기무라 성 바오로 나바로 축일 9월 10일 아폴리나리스 프랑코(Apolinaris Franco)와 카롤루스 스피놀라(Carolus Spinola, 또는 가롤로)및 동료 순교자들은 1622년 일본의 대박해 때에 순교하신 분들로서, 1867년에 비오 9세(Pius IX)에 의하여 205명의 일본 순교자들로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는 18명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22명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다.1614년 도쿠가와가 그리스도교 박멸 정책을 반포한 이래, 위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1617년과 1632년에 순교하였고, 이 박해가 점점 확대되어 1622년에는 대박해로 발전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이들 중에는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신부가 있다. 그는 카스틸랴 사람으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고, 1600년에 필리핀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 선교단에 합류하였다. 1617년경에 그는 나가사키에 있었는데, 오무라 지방에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용감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이분 외에 유명한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리카르도 드 생 안느, 프랑소와 드 생 보나방튀르, 폴 드 생 클래르. 이들 외에 특기할만한 분은 카롤루스 스피놀라이다.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박학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달을 관측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6년 만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은 일본인 사제인 세바스티아누스 기무라 등이다. 1622년 9월 10일, 두 명의 예수회원과 동료들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바오로 나바로 신부(예수회)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 성 네메시아노(Nemesian)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또 다른 성 펠릭스(Felix) 축일 9월 10일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 또는 네메시아노)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 성 니콜라오(Nicholas) 축일 9월 10일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젊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여, 1275년부터 죽을 때까지 고향인 마르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톨렌티니에서만 살았다. 그는 정열적으로 사목활동을 했는데 매우 뛰어난 설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기적까지 행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는 임종할 때 다음과 같은 바오로(Paulus) 사도의 말씀을 형제들에게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 성녀 님포도라(Nymphodora)성녀 메노도라(Menodora), 성녀 메트로도라(Metrodora), 축일 9월 10일 성녀 메노도라(Menodora), 메트로도라(Metrodora), 님포도라에 대한 행적은 시메온 메타프라테(Simeon Metaphrastes)의 시 속에 묘사된 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이 순교자들은 모두 고아들로서 자매간이며,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에서 은수생활을 하면서 선업을 베풀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중, 그들은 총독 프론토에게 보고되어 그의 앞에 끌려갔다. 이 세 자매는 용모가 뛰어나고 단정하여 그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고 신상 앞에 희생을 드리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세 자매는 이구동성으로 이를 거부하며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프론토는 마음을 돌려 볼 심산으로 두 자매 앞에서 메노도라를 야만적인 방법으로 고문까지 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메노도라는 “우리는 같은 좋은 나무의 세 가지입니다” 하며 프론토의 개종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매를 맞고 불로 지지는 고문을 받은 후에 참수치명 하였다. 그러나 막내둥이 님포도라는 매 맞은 후유증으로 운명하였다. ================================ 성 베드로 마르티네즈(Peter Martinez) 축일 9월 10일 성 베드로 마르티네스(Petrus Martinez)는 대주교이자 에스파냐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지도자였다. 그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에서 태어나서 950년경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모존조(Monzonzo)의 성 마리아(Maria) 수도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후에 콤포스텔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986년경 콤포스텔라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의 주창자로 유명하며, 전통적으로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의 작곡자 중 한 명으로 믿어진다. ================================ 성 베라노(Veranus) 축일 9월 10일 성 베라누스(또는 베라노)는 프랑스 남부 방스의 주교였다. 그는 리옹(Lyon)의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의 둘째 아들로 수도승으로서 살다가 주교가 되었다. ================================ 성 살비오(Salvius) 축일 9월 10일 성 살비우스(또는 살비오) 혹은 살비는 프랑스 알비가의 후손이며, 처음에는 고향에서 법률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현세에서 이탈하여 살고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주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서 움막을 지었으며, 열렬한 정으로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한번은 그가 고열로 인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달하였을 때, 하늘나라를 체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생기를 되찾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인 574년경에 그는 알비의 주교로 착좌하였으나, 그의 개인생활은 더더욱 엄격하였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남이 추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아송(Soissons)의 칠페릭 왕은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모셨고, 정통교리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과연 그는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함께 수도원의 정통성은 물론 교구의 정통성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성 테오다르도(Theodard) 축일 9월 10일 성 테오다르두스(Theodardus, 또는 테오다르도)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정열적인 주교였으나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리어져 있다. 그는 정당하게 구입한 교회 땅에 대하여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할 목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 칠데릭 2세(Childeric II)를 만나려고 하였다. 그가 독일 슈파이어(Speyer) 교외 비엔발드 숲에 이르렀을 때 강도들을 만나 무참히 살해되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 성 핀니안(Finnian) 축일 9월 10일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스트랭퍼드(Strandford) 호수 교외에서 태어난 성 핀니안은 문헌상으로는 왕가 출신이다. 그는 성 콜만누스(Colmannus)의 문하생으로 드러모어(Dromore)에서, 성 모케(Mocha!!e)의 지도하에 마히 섬과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의 휘턴(Whithorn)에서 공부한 뒤에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던 픽트족의 공주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에 휘턴을 떠나야 했고, 로마(Rome)로 가서 사제가 되었다. 그 후 얼스터로 돌아온 뒤에 모빌을 중심으로 몇 개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유명한 이오나(Iona)의 성 콜룸바(Columba)를 제자로 두고 가르쳤다. 핀니안과 콜룸바는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콜룸바가 아일랜드에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시편 사본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히에로니무스의 시편은 핀니안이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콜룸바의 사본을 요구하였고 콜룸바가 이를 거절하자 국왕 디알마이드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콜룸바는 하는 수 없이 사본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성 핀니안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였고, 스코트랜드의 홀리우드(Holywood), 덤프리스(Dumfries) 등지를 돌며 순회설교를 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 성녀 풀체리아 아우구스타(Pulcheria Augusta)축일 : 9월 10일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Aelia Eudoxia) 황후의 딸로 태어난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또는 풀체리아)는 아홉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고, 어린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가 황제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414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고 왕의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동정서원을 발하고 오로지 동생의 성장과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 결과는 궁중의 분위기를 마치 수도원과 같이 변화시켰다. 421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테나이스 (Athenais)와 결혼하였다. 아테나이스는 에우도키아(Eudocia)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나서 남편으로부터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래서 풀케리아와 에우도키아 사이의 알력이 불가피해졌다. 에우도키아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지지한 반면 풀케리아는 정통 교회를 옹호하였다. 이때 에우도키아는 풀케리아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며 그녀를 귀양가게 했는데, 에우도키아 역시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귀양을 갔다. 황제는 에우티케스(Eutyches)와 그의 그리스도 단성설을 지지하고 또 에페수스(Ephesus)의 불법 시노드(Synod)에서 결의된 칙서를 옹호하였지만 풀케리아는 교황 성 대 레오(Leo)를 지지하였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냥 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풀케리아가 황녀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동정을 존중한다는 조건으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장군과 결혼하였고 그와 함께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들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Council of Chalcedon)를 적극 후원하여 그리스도 단성설을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교회, 구호소, 병원 등을 세우면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 성 알브로시오 발로우(ambrose barlow)축일 : 9월 10일알렉산더 발로우 경과 에드와드의 14명의 자녀 가운데 4번째인, 그는 잉글랜드, 만체스터의 발로우 홀에서 때어나 프로테스탄트로서 성장하였다. 후일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1614년에 두에이로 갔으며,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스페인의 발라돌리트로 갔다. 다음 해인 1615년, 그는 두에이의 성 그레고리오에서 베네딕또회에 입회하여 암브로시오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1617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영국으로 돌아가서, 랑케셔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 후 2년 6개월 동안 4차례나 체포되었으나 매번 석방되었다. 그러나, 1641년, 사제들이 영국으로부터 서품되거나 혹은 국사범으로 낙인찍혀 국가로부터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의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다가,그 해 부활절에 체포되었다. 석방시킬 터이니 사제직을 포기하라는 설득을 거절하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중재하게 해달라는 부탁도 거절한 채, 그는 교수형을 당하여 9월 10일에 운명하였는데, 이날은 그가 켄터버리의 원장으로 임명된 후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와 웰스의 40명의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 1970년, 교황 바울로 6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 성 아우베르토(aubert)축일 : 9월 10일프랑스 아브랑슈의 주교인 그는 자신의 환시에서 받은 성 미카엘의 명에 따라 8세기 초에 몽-쌩-미셸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는 706년과 708년, 3차례의 환시를 로슈 드 라 통브에서 보았는데, 성 미카엘이 이 자리에 성당을 지으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709년 10월 16일에 봉헌되었고, 성 아우베르토가 안장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 성 프리테스탄(Frithestan) 축일 9월 10일 베네딕토회 주교인 성 프리테스탄은 성 그림발두스(Grimbaldus, 7월 8일)와 성 플레그문두스(Plegmundus, 8월 2일)의 제자였다. 그는 영국 윈체스터의 주교로서 거의 25년간을 사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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