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0'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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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최첨단의 기술이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하루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시대이다. 이러한 과학의 근본에는 수학이 있다. 그리고 수학의 중심에는 숫자 ‘0’이 자리 잡고 있다. 과연 숫자 ‘0’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사가들은 기존의 역사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대체로 가정적 접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가정적 접근은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준다.
“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 ‘0’의 사용은커녕 그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명수준은 매우 낮을 것이다.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넘어 화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가 하면 동영상 이동전화기를 비롯한 최첨단의 이기를 사용하는 등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일 혹은 모레엔 또 어떤 신기한 기계가 발명되어 우리를 놀라게 할까?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다못해 인간성의 상실을 염려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토대 이끈 ‘0’
인류가 발견·발명한 각종의 원리나 기호들 중에서 인류로 하여금 한계를 알 수 없는 과학과 기술에 도전할 수 있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숫자 ‘0’일 것이다. 매우 단순하게 접근해도 0의 개념이 없으면 ‘-’, 즉 음수(陰數)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미분이나 적분 같은 고등수학은 생각할 수 없다. 인공위성, 컴퓨터, 휴대전화기, 나노 등은 모두 고등수학의 소산물이다.
화약, 나침반, 종이가 동양에서 발명되었지만 고등수학을 가능하게 한 0 또한 동양인의 고안물이었다. 사실 누가 최초로 0을 고안해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사가들은 견해일치에 이르지 못했다. 1 ~ 9까지의 숫자는 아랍인들이 인도로부터 배워 사용한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0의 경우 사가들은 아랍인들이 인도가 아닌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안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중국문화권인 인도차이나의 7세기경 문헌들에 0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미루어 볼 때 인도나 아랍이 아닌 중국이 0의 발명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가들은 ‘없음’을 의미하는 아랍어 ‘sifr’와 ‘0(cipher)’을 관련지어 위의 관점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0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은 혹 중국인일지 모르나 그것을 실제로 사용한 사람은 아랍인들이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대체로 8세기부터 11세기의 아랍세계는, 언뜻 석유·종교분쟁·이슬람원리주의·자살폭탄테러·지하드 등을 떠올리게 하는 금일과는 달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다. <새교육> 9월호에서 약술했지만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는 동으로는 인도의 인더스강에 이르고 서로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퍼져갔다. 이슬람교를 모체로 삼은 이슬람제국 또한 메카,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등을 중심으로 중동지역과 지중해세계를 장악했다.
서양에 앞선 높은 수준의 문명 이뤄
이슬람세계의 종교·군사적 성공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탁월한 문명이다. 당시의 아랍인들은 수학과 과학은 물론 다방면에서 경이로운 창조력을 발휘하여 인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들의 왕성한 문화 창조력은 봉건적 서유럽의 그것을 압도했다. 대체로 15, 16세기 이후 세계문화를 주도해 온(물론 정신문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서구도 중세에는 비잔틴제국이나 이슬람제국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후진적이었다. 서구 중심적 사관에서 사유하는 사가들도 그 시기에는 서양이 문화적으로도 이슬람세계에 현저히 뒤졌다는 점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랍인들로 하여금 9, 10세기 전후에 그처럼 탁월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한 것은 주로 이슬람교였다. 이슬람교는 아랍인들의 예술·문학·과학적 성취를 자극하고 촉진했다. 아랍인들에 있어서 삶 그 자체였던 이슬람교는 그들의 문화 창조력과 지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더욱이 이슬람교는 성지순례를 요구함으로써 사상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다. 거기다 <꾸란>은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읽기 위해서 아랍인들은 아라비아어를 익혀야 했다. 아라비아어는 융통성이 비교적 큰데다 <꾸란>의 언어였으므로 쉽게 이슬람세계의 표준어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어는 이슬람교와 함께 이슬람세계의 통합과 문화 창조를 촉진하고 자극했던 것이다.
이슬람제국은 또한 학문을 후원하고 장려했는데 아바스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철학·수학·천문학·의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바그다드에 도서관이 딸린 학문의 집 ‘바야트-알-히크마’를 세워 그리스 고전들을 번역하게 했다. 천문대가 있어 천문학자들은 경도와 위도를 측정했는데 금일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지구표면적을 계산했다. 당시에도 <꾸란>의 해석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가 하면 <꾸란>을 인간인 무함마드의 창조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 마문 또한 그런 경향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그는 827년에 칙령으로 <꾸란>의 창조설을 확인했고 833년에는 창조설에 반대하는 자들을 추방하고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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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흡수력으로 업적 이룬 아랍
거기다 아랍인들은 주변의 문화적 유산을 잘 흡수하여 소화시켰다. 이슬람제국에 정복당한 지역들은 훌륭한 문화를 자랑하던 페르시아나 비잔틴제국의 일부였다. 아랍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정치, 그리스로부터 철학, 페르시아와 그리스로부터 문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들은 페르시아·그리스·로마·비잔틴 등의 우수한 문화를 효과적으로 흡수했다. 이슬람제국과 비잔틴제국은 줄곧 대립했지만 간혹 평화롭게 지낼 동안 아랍인들은 비잔틴문화를 존중하고 배웠다.
아랍인들은 비잔틴제국의 그리스인들을 자기들 외의 유일한 문화민족으로 대우하고 외교적으로도 배려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가 활발히 교류되고 아랍인들이 그리스문화에 자주 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아랍인들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랍인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인정했으며, 외교상의 관례였지만 칼리프의 사신들에게만은 칼리프가(家)의 부녀자들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제국의 문화는 특히 과학부문에서 높은 성취를 자랑했다. 아랍인들은 그리스는 물론 주변세계의 과학적 열매를 흡수하여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역시 문물을 교류할 때의 그리스인들과 아랍인들은 서로 상대의 과학상의 성취를 인정하고 예찬했다). 아랍인들은 그리스와 인도의 위대한 과학·철학적 저작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또한 전술했듯이 중국과 인도로부터 정교한 수학적 기법을 배우고 특히 인도로부터는 1에서 9까지의 문자사용을 배웠다.
과학 분야에서도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수학·화학·의학이었다. ‘아라비아숫자’가 말해 주지만 아랍인들의 수학 상 업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전 인류가 사용하는 아라비아숫자를 이용하여 일상적 계산을 쉽고 편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고등수학의 길을 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라비아숫자에는 로마인이 알지 못했던 0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0’개념을 모르면 음수개념은 존재할 수 없고, 음수를 알지 못했을 경우 오늘날 수학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아랍인들은 유클리드기하학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석기하학에 도전했다. 그들은 평면 및 구면 삼각법을 창시했으며 3차 방정식 등 대수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0을 최초로 책에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진 9세기의 알-카와리즈미는 그리스와 힌두적 요소를 결합하여 대수학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대수학을 의미하는 영어 ‘알제브라(algebra)’는 그의 아랍어책 <알-제브라(al-Gebra)>에서 유래했다.
11세기경에 톨레도 등 스페인의 아랍계 도시들을 통해 아랍의 수학, 철학, 의학 등이 유럽에 유입되었다. 아라비아숫자는 처음 대학들에서 사용되고 이어 상인사회에 수용되었다. 동지중해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13세기부터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연금술 통해 화학·의학 발전에 기여
다음은 아랍의 화학과 의학에 관한 이야기다. 9, 10세기경의 아랍에서는 연금술이 유행했고, 그것은 화학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기게 했다. 중국의 경우 연금술은 주로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발전했고, 그리하여 중국적 신비주의와 결합했다. 반면 아랍에서는 비(卑)금속으로 귀금속(철학자의 돌)을 합성해내는 연금술, 즉 마술과 과학이 결합한 연금술로 발전했다.
아연이나 알루미늄 같은 비금속으로 금과 같은 귀금속을 만들어낸다면 얼마나 신날까? 연금술사들은 각종 비금속에 이런저런 화학약품을 넣고 열을 가하거나 감하는 시행착오적 실험을 되풀이했고, 그런 실험과정을 통해 증류·여과·승화 등 과학적 방법을 개발하거나 발전시켰다. 또한 탄산소다·알룸(명반)·붕산·질산·유황산·질산은·초산·알코올 등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었다.
화학실험과 화학원소의 발견은 당연히 의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아랍인들은 그들 스스로 의학을 연구하고 치료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등 그리스 의학지식을 활발하게 수용했다. 그처럼 아랍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의학을 배웠으되 그들을 능가했다. 중세 전성기와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 대학에서의 의학교육은 주로 아랍 의학자들(알 라지·이븐알아바스·이븐시나(아비세나)·아불카심 등)의 의서(醫書)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에 의존했다. 특히 안질·천연두·홍역 등의 치료에 관한 아랍 의서들은 18세기까지도 그 분야의 권위서로 통했다.
아마도 아랍의 가장 유명한 의학자는 알라지와 이븐시나일 것이다. 알라지는 10세기에 모든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20권의 개론서 <의학대전>을 남겼다. 이븐 시나는 기왕의 의학을 체계화하여 중세의 가장 뛰어난 의학서로 평가받은 <의학규범>을 썼으며 <회복의 서>도 남겼다. 특히 <의학대전>은 그리스와 아랍의 의학은 물론 페르시아와 인도의 의학까지 종합한 의서였고,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이래 17세기까지 서구 대학들의 의학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밖에 이슬람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에는 대소 병원과 의학도서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약전(藥典)도 처음으로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이곳저곳의 효험 있는 다수의 식물이나 약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했다.
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이 인도와 중국의 도움을 받아 0을 포함한 아라비아숫자를 고안해 내거나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특히 0을 고안해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위에서 지적했지만 현재의 첨단과학은 불가능하거나 그 수준이 훨씬 낮을 것이다. 로마의 숫자 I(1), V(5), X(10), L(50), C(100)를 염두에 둘 경우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IV(4) IX(9) LV(55), CL(150) 등으로 미·적분은커녕 제곱, 세제곱을 수행할 수 있을까? 로마숫자로 수행되는 수학을 바탕으로 인공위성이나 컴퓨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