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코스:모악산관광단지~대원사~수왕사~모악산~공터~3층석탑~심원암~금산사~주차장
찾아가는길:총거리209.1km 소요시간:3시간8분
마산역~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간고속도로~익산장수고속도로-모악산관광단지
1.진주JC대전-통영간고속도로 통영방면으로 우측에 고속도로 출구369 m
2.이전 지점에서369m대전-통영간고속도로 서진주방면으로 우측 도로56.2 km
3.함양JC대전-통영간고속도로 지곡방면으로 좌측 도로29.7 km
4.장수JC익산장수고속도로 장수방면으로 우측에 고속도로 출구44.9 km
5.소양IC익산장수고속도로 소양방면으로 우측에 고속도로 출구1.1 km
6.이전 지점에서1.1km익산장수고속도로 소양IC265 m
7.소양교차로소양로,안덕원길,진북로 전주방면으로 우측 도로11.4 km
8.진북터널사거리화산로,곰솔나무길,평화로 도청방면으로 좌회전8.1 km
9.원당교차로구학전길 원당방면으로 2시방향으로 우회전624 m
10.이전 지점에서624m구이로 구이방면으로 우회전1.8 km
11.종료 지점0 m
호남지방엔 예부터 내려오는 네가지 경치 즉 湖南四景이 있다 하는데 그 중 第一景이 母岳春景이란다, 二景은 邊山夏景이요, 三景과 四景이 內藏秋景과 白羊雪景이라 한다.

마산역에서 7시40분 출발 9시14분 산청휴게소


10시16분 진안휴게소 안개가 많이끼어서 마이산을 볼수 없었다

모악산관광단지 도착하여 출발(11시09분)




모악은 전국에 수다하게 널려 있는 산으로서 대모, 자모의 이름으로도 불려지고 있는데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도 영국인이 그렇게 명명하기 전부터 현지 티베트에서는 “초오롱마”라고 불리고 있는바 그것은 “세계의 어머니의 산”이란 뜻이니 여기 모악산이 겨우 800미터에도 못미치는 높이를 가지고도 어머니의 산으로 유독 알려진것은 이웃하는 둘레에 큰산이 없기 때문에 호남일대에 군림하는 큰어머니인 것이다.
계집 ‘女’ 자에다가 점 둘을 찍으면 어미 ‘母’ 자가 된다. 점 둘은 여자의 젖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김제, 만경 평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니 ‘岳’(악) 자를 붙여 모악산이라 한 것이다.
이 호남평야의 중심부에서 제일 높은 모악산에서 발원된 강은 북으로 만경강, 남으로 동진강으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적셔주는 젖줄이 된다.



B코스와 갈림길이 있다(11시15분)





대원사 절에서 !!!!!!!!!!!!!


대원사
대원사(大院寺, 063-221-8502)는 모악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삼국통일 직전 열반종의 개창조 보덕 화상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 스님 등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대략 백제 의자왕 20년(660) 경으로 전하고 있는데 세 스님은 보덕 화상으로부터 열반종의 교학을 배운 뒤 고대산(孤大山, 高達山, 高德山, 603m) 경복사를 떠나 건너편 모악산 기슭에 대원사를 세우고 멀리서나마 스승인 보덕 화상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수행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절 이름을 대원사(大原寺)로, 『동국여지승람』에는 대원사(大圓寺)로 적고 있는데 1857년 초의 선사에 의해 묶여진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에는 대원사(大元寺)로 적고 있어 현재의 사명과 혼동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대원사(大院寺)의 사명에 쓰인 ‘원(院)’이란 글자를 『삼국유사』 제 5권에 기록된 개성 ‘천마산 총지암과 모악의 주석원(呪錫院)’과 관련해 당시에 번창했던 밀교 계통의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는 어지러웠던 구한말과 일제 침략기 불같이 타올랐던 민족종교의 영향에 따른 혼동 때문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호남의 전주성은 한때 동학의 총본부가 설치된 바 있고, 대원사는 근세 증산교를 개창한 강일순(甑山, 1871~1909)이 도를 깨친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창건 이후의 정확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대원사이지만 앞서 밝힌 기록과 대웅전 복원 당시 발견되었다는 ‘영락기미년(永樂己未年, 1439)’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통해 대원사의 한때나마 가늠해볼 수 있겠다. 그 동안의 자료를 모아 최근 주지 석문 스님이 정리한 『모악산 대원사』 사찰 사적에는 고려 인종 3년(1125) 원명 국사(圓明國師)의 2창, 고려 공민왕 23년(1374) 나옹 대사의 3창 그리고 조선 선조 35년(1602) 진묵 대사의 6창과 15년간 주석 등을 밝히고 있다.
『진묵조사유적고』에 보이는 진묵 일옥(震默一玉, 1562~1633) 스님의 신이한 행적 한 토막.
진묵 스님이 대원사에 머물 때이다. 스님에게는 기춘(奇春)이라는 시자가 있었는데 기춘은 전생에 사미 시절의 진묵 스님을 연모한 소녀였다. 대사는 기춘 스님을 총애하여 그와 더불어 일체의 세속적 즐거움을 떠난 이락삼매(離樂三昧)의 경지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없는 뭇 스님들은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했다.
하루는 대사가 기춘을 시켜 대중에게 국수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의 경지와 도력을 내보여 스님들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대사는 발우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씩을 각자의 발우 속에 넣도록 하였다. 잠시 후 대사의 발우는 국수로 가득하였으나, 다른 스님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바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1시37분 대원사 도착하다












12시5분 수왕사 도착
수왕사는 터도 좁을 뿐 더러 변변한 殿閣 하나 갖춘 게 없는 절간이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인데 또 한편으론 요란스럽지 않아 그런대로 운치조차 있어 보이는 절이다. 벽암 주지스님은 스승으로부터 술 빗는 법을 전수받아 절을 크게 중창시키고자 곡차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벽암스님이 무려 12대 수왕사 전통주 전승자라 하니 그 곡차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바위벽에서 石間水가 나오는데 파이프를 통해 요사채 마당으로 연결해 방문자들에게 물맛을 보여준다. 정말 물맛이 예사롭지 않다, 가져간 물을 다 버리고 석간수로 가득 채운다. 바위벽 옆엔 '震默祖師殿'이라 씌여있는 수왕사 경내 유일한 전통양식의 전각이 있다. 수왕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년) 보덕화상이 수행을 위해 만든 암자인데 근처 절들과 함께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진묵대사가 중창했다 한다.


진묵은 異蹟과 기이한 행동으로 한 세상을 풍미했던 은둔자적 스님이었다. 서산대사나 유정대사는 법복을 집어던지고 나라를 구하고자 殺生의 亂場 속으로 뛰어 들었지만, 임진왜란 3년 전 정여립과 기축옥사(1589년)로 1,000여 명의 죄없는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생생한 현장을 목도한 진묵은 무너지는 나라를 외면한 채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다. 아마 진묵에겐 조선과 선조임금은 망하고 죽어야 마땅한 대상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진묵은 또한 곡차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 좋은 수왕사를 우선 중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俗人과 仙人의 경계을 벗어났다고 칭송받는 진묵은 그야말로 한국 불교의 生佛이며 또한 어머니를 잘 모신 효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진묵대사의 고향
天衾地席爲山枕(천금지석위산침)
月燭雲屛作樽海(월촉운병작준해)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卦崑崙(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 땅을 자리, 산을 배게 하고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바다로 술잔 하여
얼큰히 취해 거연히 더덩실 춤추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 게 불편하이.
임진, 병자호란 무렵 전라도 땅에 행적이 변화무쌍한 진묵대사(震默大師)라는 괴승이 있었다.
스님이 어느 날 위와 같은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그 시가 너무나 호연지기하여 모악산, 부여 무령사를 비롯한 스님이 노닐던 곳에 주렴으로 걸어 놓고 즐겼다 한다.
우리 외사촌 아우 송원순 사장이 구해준 그 글을 나도 액자에 고이 담아 거실에 걸어 놓고 그런 경지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두주불사하시던 우리 아버지를 닮아 일찍부터 술을 즐겨서 목숨을 걸고 마시고 다니는 경지에 도달하고 보니, 주머니 사정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건강이 가장 염려되었다. 그 좋아하는 술을 더 오래 마시려면 무엇보다 건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다.
그래서 갸륵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호를 일만(一萬)이라 하여 돈으로서나마 술의 양을 조절하려 하였다. 술의 종류도 가능하다면 도수가 얕은 막걸리를 주로 하였고, 그것도 요즘에 와서는 흔들지 않은 맑은 윗 것만을 조심스럽게 딸아 마시는 것으로 나의 위장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진묵대사의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혹자는 '그런 술은 왜 먹는 거지?' 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일만의 답은 이렇다. 취하라고 마시고, 싸니까 마시고, 물리지 않아서 마시는 거다.
지금 나는 그 진묵대사의 고향 김제의 모악산을 향하고 있다. 그가 유했다고 하는 대원사까지는 갈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진묵대사는 고(高)씨 처녀가 빨래터로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먹고 낳았다 해서 호로 자식이라고 버림받다가 7세 때에 출가하여 소석가(小釋迦)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고승이 되신 분이다.


여기서부터 눈과얼음길........... 조심조심??????





12시32분 무제봉 과 장군봉도착












전망대 도착(12시51분) 안개 때문에 전망을 촬영했으나 희미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중계탑 도착(통제구역이나 문이 열려 있어 관람하다)(12시58분)







산행에서 최고의 기쁨 점심시간(13시24분)




식사 후 출발(13시39분)



명칭 : 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분류 : 석탑(고려시대)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
수량 : 1基
소유자 : 금산사
관리자 : 금산사
금산사 심원암에서 볼 때 북쪽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탑이다.『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었는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이 절을 창건하여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몸돌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지붕돌은 넓적하며, 낙수면의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였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깊은 산중에 있었던 탓인지 탑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소원을 빌며 탑을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는 회원님들
















14시29분 부도전 도착

첫댓글 함께 하여 주심에 감사하고 여러모로 배려 하여 주심과 수고로움에 머리숙여 존경의 예를 올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눈밟으며 즐겁게 산행하신 선생님 부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같은산을 다녀 왔을텐데 선생님에 비하면 저는 별로담은게 없습니다. 분발해야 겠지요 ? 감사히 보고 갑니다.
게으른 지는 선생님의 수고에 편안하게 공부하고 갑니다....감사드리며 ..... 나눔은 언제나 좋습니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