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가 되어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은 광주사범 동창생 화죽(花竹) 백종팔(白鍾八) 형의 발인 날이다. 어제 보성중학교 동창생들과 ‘천지장례식장’으로 가서 백종팔 형의 영전(靈前)에 문상하고 온 이야기를 사범 친구들에게 전하였다.
장남의 이름이 ‘백승진’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 백종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아버지의 흔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엄마 쪽을 닮았다고 하였다. 엄마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머니가 미인이었던지 아들의 모습이 매우 환하고 현대적이었다. 그리고 미남스타일이었다. 서울대 건축과를 나와 삼성건설과 대우건설에서 일하였고, 지금은 근무했던 회사에서 나와 작은 건설 회사(시행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세워진 수많은 건설회사가 보낸 조화(弔花) 속에서 영화배우 ‘소지섭’과 ‘신하균’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예인들과도 친분이 있을 정도로 아들은 미남이었다. 아들 백승진의 모습은 신하균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화죽(花竹) 형이여! 이제 이승에서의 미련은 훌훌 털어버리고 저승에서 편안히 잠드소서.
백종팔은 매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백종팔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래서 4년이나 늦게 취학하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회천에 있는 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가난한 형님의 도움으로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내가 다니던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편입학을 한 사람이 졸업할 때에는 전교 일등을 하여 도지사 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우리가 다녔던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하였는데 역시 학비를 조달하려고, 회천면의 선배들이 하고 있던 지방에 있는 중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고등학교 입시문제집’을 방문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학비나 생활비를 벌어서 졸업한 사람이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들 백승진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면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에 입학시켜서 자기가 담임을 하고 열심히 아들을 가르쳤다. 아들이 2학년이 되면 자청하여 2학년 담임이 되어 아들을 자기 반에 넣어서 온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다. 그렇게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자기 아들을 맡아서 있는 힘을 다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초등학교는 고향인 회천에서 아버지의 직접 대면 교육을 받은 아들이, 중·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게 되자 아버지 역시 광주로 전근하여 조석으로 아버지의 훈육을 거쳐서, 서울대학교 건축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들이 서울로 가게 되자, 어느 날 아들에게
“내가 너를 가르치려고, 너를 따라 다니다가 벽지 점수가 없어서 승진을 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하였더니,
“아버지 인생은 아버지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인데, 왜 아버지가 나를 위해 희생하신다니 말이 안 됩니다.”
하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승진에 필요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 섬 지역으로 가서 벽지점수를 따고 연구점수를 확보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승진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만일 그가 아들에 대한 꿈을 접었더라면, 어느 누구보다 먼저 도 장학사가 되었거나 교육장, 초등교육과장을 역임하였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느덧 우리는 약사암에 도착하여 석등(石燈)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석간수(石澗水)를 볼이 터져라 마시고 하산하였다.
음악정자에서 지난주처럼 이용환이 내미는 뻥튀기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내일이 ‘제45회 스승의 날’ 이어서 강공수의 요청으로 오늘 아침에 윤상윤이 조사한 ‘스승의 날’이 생기게 된 과정을 다음에 제시한다.
◦스승의 날은 교권존중과 스승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해 교원의 사기진작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제정된 날이다.
◦스승의 날은 1958년 5월 청소년적십자 단원이었던 충청남도 지역의 강경여고 학생들이 현직 선생님과 은퇴하신 선생님. 병중에 계신 선생님들을 자발적으로 위문한데서 시작되었다. 이를 의미 있게 여긴 청소년적십자 충남협의회는 1963년, 9월 21일을 충청남도 지역의 '은사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실시했다. 1964년부터 '스승의 날'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해에 날짜도 5월 26일로 변경되었다.
◦1965년부터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스승 세종대왕의 탄생일인 5월15일로 바뀌었다.
◦1966년부터 대한적십자사에서 스승의 날 노래를 방송 매체에 보급하면서, 노래와 함께 행사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 1973년 3월 모든 교육관련 기념행사가 '국민교육헌장선포일'로 통합되면서 '스승의 날'은 1981년까지 금지되었다.
◦1982년 5월 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9년 만에 부활했고,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강공수의 JBL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추어 우리들은 ‘스승의 날’ 노래를 큰 소리로 두 번이나 불렀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식탁에 앉은 우리(9명)는 내 딸의 승진 자랑에 대한 ‘턱’(좋은 일이 있을 때에 남에게 베푸는 음식대접)을 냈다. ‘설기 떡’과 ‘오늘 점심’을 내가 내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소망은 자식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친구의 자식이 잘 되었다면 내 자식이 잘 된 것처럼 축하해주고 같이 기뻐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우리 들 모두 그런 마음이다. 나종만도 같이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종만의 건강이 빠른 시간 안에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