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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3월13일(토)맑음
김태완선생의 대혜서장 강의 149를 듣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 보듯 해야 한다’ 부분에서 느낀 바 있었다.
①깨달음을 이해하고 자기가 이해한 것을 경전과 조사의 어록에서 확인하여 증거로 삼으려는 시도를 보라.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 한켠에 아직도 찜찜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 불안을 잠재우려는 짓이다. ②자기가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려는 모든 시도가 헛된 짓임을! 나는 이렇게 기특한 것(선종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알았다! 내가 그걸 알려줄 게라는 자만이다. 한 꺼풀 막이 가려져 있음을 어찌 알리오!
2021년3월14일(일)맑음
본래의 것에 진실해지려면 몸과 마음을 던져라. 자신의 살을 발라내고 자신의 뼈를 부수어 솥에 넣고 끓인 고깃국을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라. 육신의 몸을 펄펄 끓는 용광로에 던져버려서 허공의 몸으로 다시 일어나라. 순결한 초심으로 살라. 순수한 無知로 살라.
2021년3월15일(월)맑음
세상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아니할 때 전체로 산다.
그 어떤 주장도 하지 아니할 때 견해에 걸림이 없다.
생각이 있건 없건 妙法은 이미 드러나 있다.
육신을 통하여 법을 드러낸다.
앎은 어둠에 물들지도 않고 밝음에도 물들지 않으나, 어둠인 줄 알고, 밝음인 줄 안다.
앎은 있으나, 아는 자는 알려지지 않는다. 깨어있는 허공이라 해야 할까?
앎은 있으나 아는 자는 없다. 앎은 黙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다.
상대동에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저녁 강의 취소하다.
무문관을 독파하고 짓다.
無門烏鵲自往來, 무문오작자왕래
久座成勞無所用; 구좌성로무소용
眼中童子面前人, 안중동자면전인
行雲流水路茫茫. 행운유수로망망
문 없는 문을 까치와 참새는 스스로 오가는데
피곤하게 오래 앉음이 무슨 소용 있으랴
눈 속에 있는 아이가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이라
구름 따라 물 따라 흘러가니 망망하구나
2021년3월16일(화)맑음
김태완 선생의 부대사 심왕명 01 강의를 듣다가, 뭔가 바탕자리,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자리를 느끼다. 도는 닦는 게 아니니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이게 다인가’라는 막연한 불만족에서 ‘이게 다다’라는 확연분명함으로
근원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에서 이상적인 경계를 꿈꾸고 상상하게 만든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지 말고 꿈을 꿈인 줄 알라.
근원에 대한 향수가 보리심으로 이끈다.
무엇에 의지하려 하거나 도피하려는 자세로는 무위에 계합할 수 없다.
생각이 꿈이다. 생각따라, 감각따라, 말따라 가면 꿈꾸는 것이다.
진정한 소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A4.62)라고 했다. ‘정당한 원리’는 ‘dhammikā dhammaladdhā’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여법하게 올바로 얻어진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담마는 법답고 여법한 것이다. 재산도 법답고 여법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소유(atthi)와 향유(bhoga)는 다르다. 소유는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향유는 재물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소유한 것을 베풀어야 향유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소유의 행복보다 향유의 행복이 더 수승하다. 이를 세간적 무소유라 해야 할 것이다. -진흙 속의 연꽃 님의 글을 정리하다.
2021년3월17일(수)맑음
봄소식은 이미 벌써 와있는데,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보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다.
울 밑에 황금 수선화 피어나고 담장 위에 목련이 빛난다.
법이 항상 눈앞에 드러나 있는데, 왜 보지 못하느냐?
2021년3월18일(목)맑음
오후12:50 버스타고 동래 시외버스터미널 도착. 택시 타고 해운대구 반송동 길상사 일진스님 찾아뵈다. 3:00에 談禪담선 시작하다.
1. 일진선사 안내말: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의 장점은 무엇이지? 그걸 어떻게 꺼내어 활용할 수 있게 해주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자신이 있는 존재 그대로 특별하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주위를 빛나게 합니다. 원담스님은 사유의 폭이 넓고 깊으면서 독서의 양이 많은 것이 장점이에요.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자기 안으로 움츠리는 것, 남 앞에 나서길 두려워하는 것,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것, 온순한 성질,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단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든지 장점으로 살려낼 수 있어요. 자기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의 틀 밖으로 나가라. 자기 프레임에서 벗어나라. 이것이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 本來面目본래면목(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 얼굴)이며, 깨달음이고 禪이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소명을 타고 난다. 그건 그 사람의 업이다. 그 업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업(Karma)란 소극적인 숙명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타고난 업을 기반으로 창조적인 업을 굴려 가는 것이다. 관건은 ‘깨침’이다. 이 깨침만 성숙하면 그 어떤 옷을 입어도 멋있는 삶이 된다. 자신감은 깨달음에서 나와요.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름답고 멋있어요. 堂堂世上당당세상, 自作充溢자작충일. 세상에서 당당하라. 스스로 창조하여 충만하게 살라. 당당함이 오히려 겸손함입니다. 그게 自他幸福자타행복, 남과 나를 행복하게 하거든요. 60세가 넘어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게 우리에겐 무한한 축복입니다.
2. 일진선사의 直指: (잠시 두 스님은 깊은 침묵에 들다. 한참 후에) 일진선사 가로되, “원담스님, 지금 이 침묵이 깨달음입니다. 이 침묵을 못 느껴요? 이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이것을 구할 필요가 있어요? 이것을 찾을 필요가 있어요? 이 침묵! 지금 이렇게 팔팔 살아 있습니다. (손을 벌리면서)이렇게 생생합니다. 원담스님 지금 “이!것!”이 분명합니까? 지금 팔팔 살아 있습니까? 지금 여기 생각이 있습니까? 지금 여기 무어 부족한 게 있어요? 지금 여기! 바로 “그!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원담은 이 말소리에 계합하여 폭발이 일어나다. 정수리 끝에서 발끝까지 찌르르한 전기가 관통한다. 100촉 전구에 불이 확 들어온 것 같다.
3. 일진선사 착어: 黙照묵조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침묵을 비춘다’라고 일반적인 해석할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지금, 말이 끊어진 지금을 바로 가리키고(直指) 바로 안다(直知, 直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여, 아는 게 아닙니다. 그냥 통하면 될 뿐, 그 밖의 다른 일이 없습니다. 배우고 익혀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당장 이것, 지금 Now, 無心무심 No Mind입니다. 상쾌하고 투명합니다. 늘상 드러나 있고, 일상에 사용하는 것인데 생각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침묵이 어렸을 때는 없었나요? 어릴 때의 침묵이 지금의 침묵과 다르나요? 어릴 때부터 항상 알고 있었던 것, 지금도 분명한 이 침묵! 이것을! 바로 체험해야지 이해로는 가닿을 수 없습니다.
法法不隱藏, 古今常顯露. 법법불은장, 고금상현로.
법은 법을 감추어두지 않나니, 고금에 언제나 드러나 있구나.
4. 선문답 탁마: 당신의 머리를 끊어버린다면 그대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암두밀계, 마조원상법문, 효봉스님의 미륵3관, 조주 무자화두에 대해 탁마하다.
5. 청주에서 오신 홍보살과 민재거사를 위한 마조어록 강의: 두 분은 모자간인데, 이미 견성을 하신 분이라, 선사의 무문관 강의를 통해 견처를 점검한다. 교재는 무문관(김태완 역주)이다. 오늘 내용은 p165~p175
제30칙 마음이 부처 卽心是佛
일진선사: 법상스님이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방망이를 때린다. 왜? 그 질문이 생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다. 좋다, 그러면 무엇이 마음입니까?
민재거사: 온 천지가 마음입니다.
홍보살: 지금입니다.
일진선사: 그렇지, 바로 이거야, 이거!
‘부처’라는 말이 벌써 더럽혀진 것이기에 ‘아이구, 스님 입을 헹구세요’라고 합니다. 부처네, 마음이네, 하는 것이 벌써 생각에 물든 거라, 저울눈금을 잘 못 읽은 겁니다. 저울질을 잘못했다는 거죠.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삼십리나 달아나겠다. 여!기!에 이름을 지어 붙일 수 없는데 뭐라고 하니까 잘못에 잘못을 덧붙이는 짓이 아닌가? 찾을 필요가 없어요. 다시 어떤 것이 부처냐? 훔친 물건을 안고 억울하다고 한다. 抱贓叫屈 포장규굴이다. 영구가 자기 눈을 가리고 영구 없다! 고 소리치는 격이다. 제가 훔친 물건(贓物장물)을 안고 도둑이야! 라고 소리치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원담: 失錢遭罪실전조죄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본전도 잃고 죄도 받는다. 불법에 대해 뭣이라 말하는 즉시 자기 살림도 잃어버리고(失錢) 방망이를 맞게 된다(遭罪). 입 열면 벌써 그르친다.
일진선사: 김태완 거사가 덧붙이기를 ‘부처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속이지 말라.’ 이렇게 나가야 멋지지. 거사가 다시 덧붙이길 ‘마음이 부처라 하니, 꿈속에서 꿈을 말하네.’ 나 같으면 ‘ 꿈을 꾸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한 번 더 되 지른다. 그래야 금상첨화지.
마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슬그머니 다시 되묻기를 ‘마음이 무엇입니까?’라고 해야 하는데 아쉽다. 법상스님이 마조선사에게 ‘마음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녀야 합니까?’라고 묻는데, 이거 시원찮다. 왜 나한테 물어, 그대가 알아야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이런 뜻이다. 어떤 것이 법입니까? 어떤 것이 조사의 마음입니까?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마음이다, 마음이다, 라고 하니까 법상은 ‘마음’이란 말에 걸려서 해결이 안 됩니다. 사실 마조선사는 이것이다! 이것이다! 라고 계속해서 지시하고 있는 겁니다. 어록을 읽을 때 행간의 뜻을 살펴야 해요. 마음을 알기만 하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요. 법상스님은 그 자리를 깨달았다. 그걸 현묘한 뜻 玄旨현지라 한다. 그러고는 大梅山 아래 움막을 짓고 30년을 지냈다. 대매산에 오래 살았으므로 大梅法常대매법상스님이라 알려졌다. 뒷날 염관제안선사의 문하에 있던 한 수좌가 산속에 사는 법상스님을 우연히 만나 인사를 건네니, 법상스님은 사람을 만나 말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말을 더듬는다. 요즘 마조스님의 불법은 어떻게 되는가? 라고 물으니 요즘은 非心非佛비심비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합니다. 법상스님이 탄식하기를 ‘옛날에는 마조 그 늙은이가 마음이 부처 卽心是佛이라고 하더니만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非心非佛로 바꾸었네. 하지만 나는 오직 마음이 부처다.’ 염관선사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매실이 익었구나. 너희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어라.’ 법이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堂堂世上당당세상이다.
민재거사: 왜 묵언 수행을 합니까?
일진선사: 묵언을 하면 자기 생각 굴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 마음을 볼 수 있다. 나도 3년 묵언 수행을 해본 적이 있다. 묵언 수행으로 자기를 살필 수 있다.
민재거사: 만일 대매산에 묻혀 살았던 법상스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아 법을 펼칠 수 없었다면 불법에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일진선사: 그렇지 않다. 법이 산속에 숨어서 드러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법은 법계에 충만해 있다. 사람이 알든 모르든, 법이 드러나든 숨어있든, 법은 부증불감이라 법계에
항상 충만해 있다. 다만 세간에서 법이 드러나고 숨는 일은 시절인연에 따른 것이다. 인연이 도래하면 법의 꽃은 개화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시절인연이란 것도 사람이 만든다.
어느 스님과 지암志岩거사(일진선사가 曾谷거사라 이름 붙여주다)의 대화:
증곡거사: 정법이 무엇입니까?
스님: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증곡거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선이 아닙니까?
스님: 묵묵부답.
일진선사: 누가 말하길 “정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방망이 맞을 것이다”라고 하면, 일진은 대꾸하길 “어디다 방망이를 놓으시렵니까?” “무엇이 정법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법은 모른다네, 자네가 사법邪法을 말해주소.”
이렇게 권투하듯 공격은 방어이고 방어는 공격이야. 이게 동시야! 이렇게 활발발하게 해야 즉문즉답 선문답이 돼요! 원담스님은 이제사 깨달아서 아직 그게 안 돼! 걱정할 것 없어요. 시간만 지니면 해결이 돼요. 늘 항상 이!것!이 팔팔 살아 있으면 돼요. 안목은 차차로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홍보살과 민재거사와 저녁 공양하고 진주로 돌아오니 밤 8:30. 충만한 하루였다.
<일진선사의 오도기연>
1987년 하안거가 끝나고 수좌들이 우루루 절을 떠난 후 몇몇 스님들만 남아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에 평소처럼 지팡이를 들고 봉암사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무심히 걷고 있는데 덤불에 숨어있던 꿩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꽹!꽹!꽹~하고 날아갔다. 스님도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으윽하며 뒤로 주춤하는 찰나 통 밑이 둘러 빠지면서 천지가 뒤집어졌다. 심안이 환히 열린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체험이며 우발적 사건이었다. 사람이 깨달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깨달음이 벼락처럼 내려꽂힌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이 없이 돌아와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당시 선방에는 오매일여를 통과해야 깨달음으로 인정하는 풍조가 만연했으므로 가슴 가운데 한 가닥 의심이 늘 남아 있었다. 아직 미진한 무엇이 있는가? 더 깨달아야 할 것이 남아 있는가? 라는 의심이었다. 그 후로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도를 물었으나 적절하고 유용한 가르침은 받을 수 없었다. 운수행각을 하던 차 어느 날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아가는 비행기 뒤로 하얀 연기 한 줄기가 길게 그으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홀연 마음의 한 가닥 의심이 확 풀려버렸다. 툭 터져 걸림이 없어졌다. 확철대오였다! 절간이나 시장 가운데나 인연따라 법을 보시하면서 오늘까지 당당하게 살고 있다.
<오도송>
初夜携杖步溪逕, 초야휴장보계경
忽被雉鳴俄驚愕; 홀피치명아경악
桶底脫落沒巴鼻, 통저탈락몰파비
快然堂堂無奇特. 쾌연당당무기특
초저녁 지팡이 짚고 계곡 솔길 걷다가
느닷없는 꿩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네
통 밑이 빠져 움켜잡을 것 전혀 없네
통쾌하고 당당하나 별다른 일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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