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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 명인
허씨는 비록 인구는 많지 않으나 고려, 조선에 걸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명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고려 때는 허재, 허경, 허공, 허만, 허금 등 명신이 즐비했고 조선 때는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만 5명을 배출했다.
권문해가 지은 <대동운옥大東韻玉>에서 허씨를 20개 큰 명족名族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허침은 친형제로서 함께 청백리로 뽑힌 인물이다.
허씨 가운데에도 양천허씨가 두각을 나타냈다. 허씨로 조선 때 문과급제한 사람이 122명인데 그 가운데 93명이 양천허씨, 이어서 김해허씨 16명, 하양허씨가 10명 함창 태인허씨가 각 1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조선 때 허씨 문중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을 대충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허감許礛
1736년(영조12) ~?. 조선후기 도화서 출신 화가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군명君明이며 화원 담의 아들이다. 벼슬은 첨사에 올랐다. 그림은 산수, 인물, 초충을 모두 잘 그렸다고 전해오나 알려진 유작은 없다.
2. 허강許綱
1362년(공민왕11) 안동도병마사가 되어 홍건적을 막아냈다. 이듬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 고려로 들여보내고자 할 때 밀직제학으로 찬성사 이공주와 함께 진정표를 가지고 연경에 사신으로 들어갔다. 연경에서 돌아와 밀직에 이르러 돌아가셨다. 공이 돌아가시자 신돈이 공의 아내를 취하려했다. 이에 상락군 김영후 손녀인 공의 아내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성誠은 경사經史에 밝아,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주周의 동생 12세 조稠는 권근權近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공양왕恭讓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법전화 하는데도 노력을 쏟았다. 조선전기 통치강령 예제五禮儀와 법제續六典를 찬정하고, 이조판서를 3번이나 역임하였다. 경사經史에도 밝아 후일 사육신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세종묘정에 배향되고 문경공 시호를 받았다.
조稠의 아들 13세 후詡는 문종文宗때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으로 단종을 보위하라는 문종의 고명을 받았다. 단종이 즉위하여서는 좌참찬 겸 판이조사로 계유정난을 반대하여 정인지와 맞서다가 거제도로 로 유배돼 끝내 교살 당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과 고려사 편찬을 주관하였으나 부록의 편수자 명단에서 삭제 당하였다. 영조에 의해 신원이 회복되고 정간貞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후詡의 아들 14세 조慥는 집현전 수찬으로 사육신 이개李塏의 매부이자 김문기金文起의 사돈이다. 성삼문 이개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자결하니 세조가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 고하며 박팽년 유성원의 시신과 같이 거열효수하고 아들형제도 연좌로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조에 의해 신원 회복과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증되고 아버지와 함께 정려가 내리고,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3대가 모두 사육신四六臣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힌다.
허조의 동생 12세 척倜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府使로 질姪 허후에 연좌되어 사직하였고, 아들 계誡는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고, 성종 25년에 가선대부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배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는 남한에 총 통계청 5,081가구 16,3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은 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와 대곡리, 와촌면 동강리와 계전리, 영천시 신녕면 일원과 전북 고창군, 정주시, 진안군 안천면 일원,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경남 합천군 일원에 있다.
※ 자료제공: 하양허씨대종회
허씨명인
허씨는 비록 인구는 많지 않으나 고려, 조선에 걸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명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고려 때는 허재, 허경, 허공, 허만, 허금 등 명신이 즐비했고 조선 때는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만 5명을 배출했다.
권문해가 지은 <대동운옥大東韻玉>에서 허씨를 20개 큰 명족名族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허침은 친형제로서 함께 청백리로 뽑힌 인물이다.
허씨 가운데에도 양천허씨가 두각을 나타냈다. 허씨로 조선 때 문과급제한 사람이 122명인데 그 가운데 93명이 양천허씨, 이어서 김해허씨 16명, 하양허씨가 10명 함창 태인허씨가 각 1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조선 때 허씨 문중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을 대충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허감許礛
1736년(영조12) ~?. 조선후기 도화서 출신 화가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군명君明이며 화원 담의 아들이다. 벼슬은 첨사에 올랐다. 그림은 산수, 인물, 초충을 모두 잘 그렸다고 전해오나 알려진 유작은 없다.
2. 허강許綱
1362년(공민왕11) 안동도병마사가 되어 홍건적을 막아냈다. 이듬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 고려로 들여보내고자 할 때 밀직제학으로 찬성사 이공주와 함께 진정표를 가지고 연경에 사신으로 들어갔다. 연경에서 돌아와 밀직에 이르러 돌아가셨다. 공이 돌아가시자 신돈이 공의 아내를 취하려했다. 이에 상락군 김영후 손녀인 공의 아내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508 제4편 수로왕의 후손
3. 허강許橿
1520년(중종15)~1592년(선조25). 조선 중기 학자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사아士牙, 호는 송호松湖이다. 좌찬성 자의 아들이며, 목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문정왕후 때 이기의 모함으로 홍원에 귀양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자 여막살이로 죽을 먹으면서 매우 슬퍼하였다. 복상을 마치매 행의 때문에 전감사별제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40년간 강호를 방랑하면서 옛사람들 책으로 자오하고 교유를 사절하였다. 다학박식하여 만물의 변에 능통한 정작, 이지함, 양사언, 김태균 등과 교계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 토산에서 피난하던 중 서거하였다. 아버지가 편찬하던 <역대사감>을 완성하였다. 저서로 <송호유고>가 있으며, 시조7수와 가사 <서호사(일명 서호별곡)> 1편이 허목이 엮은 <선조영언>에 수록되어 전한다.
4. 허격許格
생몰년 미상. 자는 춘장春長, 호는 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양천인이다. 굉의 5대손이요 부친 회는 시로써 이름을 날렸는데 광해군 난정 때 과거를 폐하고 몰했다.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강개하여 대절이 있었다. 동악 이안눌에게서 유학하니 안눌이 탄식하여 말하길 “웅혼한 문장과 높은 재주로 끝내 과거를 않더니 상처한 홀아비가 됐다”하였다. 1635년(인조13) 청나라와 강화가 이루어졌음을 듣고 단양 돈산 아래 돈거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天地幾時盡천지기시진 하늘과 땅은 언제 다하는지
無涯還有涯무애환유애 끝없는 것 도로 끝이 생기고
江城一甲子강성일갑자 강성이 한 갑자를 지남에
飄忽劇春花표홀극춘화 홀연한 표풍이 봄꽃 떨어뜨리네
시를 쓰고 안석에 기대서 숨을 거두었다. 동명 정두경은 그 문장을 칭찬하여 웅혼하고 청상하여 우리 왕조 3백여 년의 누습을 씻었다고 하였다.
5. 허견許堅
?~1630년(숙종6). 본관은 양천. 숙종 때 대신 적의 서자이다. 교서관 정자를 지
제2장 허씨 509
냈다. 숙종 초년에 허적을 비롯한 남인세력이 도체부를 복설시켜 병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때마침 그는 부친 세력을 믿고 황해도에서 수천 그루의 재목을 도벌하여 집을 짓고, 남의 처를 약탈하는 행위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선군과도 내왕이 있자 그가 역모를 꾀한다고 종척인 김석주 등한테서 고변을 당했다. 이 때문에 허견은 4월12일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 당하고 복선군, 복천군, 복평군과 허적을 비롯한 남인 실권자 등도 죽음을 당하였다.
6. 허경許慶
?~1115년(예종10). 고려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공암(양천)이다. 헌종 때 과거에 급제,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청렴하고 충직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숙종이 잠저에 있을 때 불러 부료로 삼았으며 즉위한 뒤 추밀원승선을 제수받고 금중에 출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1101년(숙종6) 상서좌승으로 즉위사가 되어 당시 동지추밀원사 곽상과 요에 다녀왔다. 예종이 즉위하자 이부시랑추밀원좌승선에 제수되었으며, 1109년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형부상서 추밀원사, 이부상서참지정사에 올랐다. 1113년 검교태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를 더하고 치사하였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7. 허경許坰
1511년(중종6)~1548년(명종3).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이며 자는 중원重遠이다. 우찬성 굉의 아들이다. 1536년(중종31)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되어 옥사를 함부로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등 행패를 자행하던 정유 삼홍의 한 사람인 허황의 죄에 연루되어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산수에 마음을 두고 노닐며 돌아올 줄 몰랐다. 저서로는 <호산록> 2권이 있으나, 병화로 전해지지 않는다.
8. 허경許熲
1650년(효종1)~1719년(숙종45). 조선 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요부堯
510 제4편 수로왕의 후손
夫, 호는 빙호氷湖이다. 아버지는 지평 열이며 어머니는 권현의 딸이다. 1675년(숙종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지평, 응교,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를 지냈다. 이어 경주부윤이 되고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저서로는 <빙호유고>가 있다.
9. 허경윤許景胤
1573년(선조6)에 태어나 1646년(인조24)에 타계하였다. 호는 죽암竹庵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남원으로 피난하였으나 왜적이 시조대왕 능을 파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장사 100명을 뽑고 밥을 틈타 김해로 달려가 흙을 채워 봉분을 다시 쌓았다. 그 뒤 왕릉에 나무를 심을 것을 관찰사에게 건의하여 조정에서 제수를 내리고 나무를 심어 보호하게 했다.
10. 허계許誡
?~1502년(연산군8).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하양이다. 중추원부사 척의 아들이다. 1459년(세조5) 진사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로 등용되어 집의를 거쳐 1475년(성종6) 장령이 되고, 1488년 좌통례가 되었다.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이어 우부승지와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90년(성종21)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공으로 표리가 하사되었다. 1493년 형조참의가 되고 곧 대사간이 되었다.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글씨에 뛰어나 당시 금석문 중에는 그의 작품이 많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심공숙신도비문과 판서윤계겸묘비문이 있다.
11. 허계許啓
1594년(선조27)~?.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옥여沃余, 호는 성암醒菴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휘이며 어머니는 한광립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4) 진사가 되고, 1624년(인조2) 호조좌랑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1636년 준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37년 우승지, 경기도관찰사를 1642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이경여, 이명한, 신익성, 신익전 등과 함께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사건 즉 오신죄안五臣罪案에 연루되어 심양에 잡혀가 심문을 받
제2장 허씨 511
고 관직을 삭탈당한 뒤 이듬해 귀국하였다. 귀국 후 도승지가 되고 호조, 병조,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성암집>이 있다.
12. 허계許棨
1798년(정조22)~1866년(고종3). 조선 후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이숙而肅이며 통제사 임의 손자이자 군수 즙의 아들이다. 1814년(순조14)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1815년 무과에 급제, 1835년(헌종1)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3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84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46년(헌종12) 통제사로 있으면서 가락루 현판을 직접 써서 걸었다. 1857년에는 공의 아들 허습이 김해부사로 있으면서 연신루 건물에다 새로 봉타루奉妥樓라는 현판을 달고서 그 감회를 간략하게 적은 봉타루기를 지었다. 1851년(철종2) 좌변포도대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뒤 1858년 금위대장을 지냈다. 1865년 조두순 내각에서 공조판서, 어영대장으로 경복궁건영도감의 제조가 된 뒤 판의금부사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13. 허계도許繼道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 효자. 본관은 김해로 의의 손자이며 전리판서 옹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1365년(공민왕14) 사헌부장령으로 직간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개성 소윤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383년(우왕9) 왜구의 침입으로 전란이 치열할 때였는데도 어머니 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을 떠나지 않은 사실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14. 허공許珙
1233년(고종20)~1291년(충렬왕17). 고려시대 문신이다. 본관은 공암(양천)이고 자는 온궤饂匱이다. 추밀원부사를 지낸 수의 아들이다. 1258년(고종45) 평장사 최자의 문하에서 병과에 급제, 승선 유경의 추천으로 최령, 원공식 등과 함께 내시로 추천되어 정사점필원이 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방삼걸이라 불렀다. 이후 국학박사에 보임되고 원종 초에는 각문지후를 제수받았으며 1267년(원종8) 호부시랑으로서 신종, 희종, 강종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512 제4편 수로왕의 후손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로 진출하였다. 이때 권신 임연이 정권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무를 딸과 혼인시키려는 것을 거절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그뒤 첨서추월원사를 거쳐 1279년(충렬왕5) 지첨의부사로 있을 때 원나라로 일본정벌을 위하여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지휘사 홍자번이 일을 반도 마차지 않을을 때 이미 마치고 돌아오니 모두들 그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81년(충렬왕7) 동지추밀원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이익방 등 33인의 진사를 취하였다. 이어 세자조호 판밀 직사사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 참문학세자보가 되고, 1284년(충렬왕10) 수국사가 되어 원부, 한강 등과 더불어 <고금록>을 편찬하고 첨의종찬에 임명되었다. 1290년(충렬왕16)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합단이 침입하였던 바 이때 홍자번과 더불어 서울을 수비하였다. 1310년(충선왕 복위2)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5. 허관許冠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공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당문학 극민의 딸 윤씨이다. 부인은 도첨의중찬 송분의 딸이다. 낭장에 임명된 지 4년이 지나도록 사은(은명에 사례하고 직임에 나가는 것)하지 않고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1302년(충렬왕28)에 드디어 병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자 왕이 평소 그 이름을 듣고 발 앞까지 불러 서각띠를 주었다. 대장서승, 승봉랑 판도좌랑을 거쳐 호부산랑에 이르니 찬성사를 증하였다.
16. 허관許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하양이다. 자는 경지敬之이며 이조참판 성의 아들이다. 1517년(중종12)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20년(중종15)헌납을 거쳐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이어 부교리, 교리, 검상, 장령, 집의 등을 거쳐 1524년(중종19) 평안도여제헌관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전한이 되었으며 경기어사로 다녀와 죄수의 추국을 늦추고 오래 가두어 형해만 남게 한 감사와 차사원에게 문책할 것을 진언하였다. 1526년(중종21) 의주목사가 되었으며 좌승지를 거쳐 1531년 도승지에 올랐다. 153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귀
제2장 허씨 513
국할 때 중국의 귀보물화를 지나치게 많이 사왔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39년 형조참의를 거쳐 영흥부사가 되고, 이듬해 장례원 판결사와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7. 허굉許硡
1471년(성종2)~1529년(중종24). 자는 굉지硡之이고 좌의정 문정공 침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23)에 진사에 합격하고 1503년 문과에 올라 1504년에 춘추관에 추천받아 들어 가고 예에 따라 대교로 승진하여 형조와 병조의 낭관으로 전직하였다. 1507년 호조좌랑을 거쳐 지평으로 탁배가 되었는데 중종반정 후에 원종공신을 범람되게 받은 자가 무수한지라 공이 이를 논집하여 그치지를 않았다. 1508년(중종3) 이조 정랑으로 옮겨 배수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의 태감 진호 등이 고명을 받들고 오니 공이 원접사 송질을 따라 의주로 갔다.
1510년에 사성을 배하였는데 이때 남쪽 변방에 왜인이 들어와 변을 일으킨다는 정보가 있자 유순정이 가서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고 공이 그 막료로서 종군하였다. 151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13년에 상을 마친 다음 갑술 1514년에 직제학을 제수받고 1515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1516년에 나가 호남을 안찰하니 가르고 해결하는 것이 물 흐름과 같아 일에 유체되는 것이 없었다.
1519년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를 안찰하였는데 1520년 겨울에 조정에서 고형산을 보내 의주에 외성을 쌓게 하니 공은 축성의 이해와 군사를 조발하는 일의 어려움과 쉬움을 열거하여 불가하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1524년 조정으로 돌아와 1525년 가을에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잠시 뒤에 이조판서로 옮기니 명이 내리는 날 조야가 서로 공이 이조판서가 된 것을 경하하였다. 1529년(중종24) 가을에 병환으로 평양에서 서거하니 연세가 59세였다.
18. 허교許喬
1567년(명종22)~1632년(인조10).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유악維岳, 수옹壽翁이며 별제 강의 아들이다. 부인은 임제의 딸이다. 어려서 수호자에게서 시를, 신봉생에게서 <사기>를 배우고 박지화의 문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지 토산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많은 가족을 이끌고 각지를 전
514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전하며 이들을 봉양하였다. 김명원의 천거로 군자참참봉이 되고 그뒤 직장과 판관을 거쳐 거창현감이 되었다. 인근 읍에 살인가가 있었는데 세력있는 자가 그를 숨기고 오래도록 의옥이 되게 하였다. 이에 그가 추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였다. 1632년(인조10) 포천현감이 되었다.
19. 허균許筠
1569년에 태어나 1618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라 하셨다. 선조 기축년 진사에 합격하고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형조판서,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문을 잘 지어 그 이름을 나라 안에 떨쳤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공의 문장에 크게 놀라 감탄하였다. 난설헌 아우이며 혁신 정치가로서 탐관오리와 간신배에 맞섰다. 공이 지은 <홍길동전>은 조선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 걸작이며 혁명적인 소설이다.공은 서얼이 아님에도 서얼차대 철폐庶孼差待撤廢를 주장하고 만민평등을 내세우셨으니 계급을 반대하는 평등사상과 혁명성은 한국 사상사에 근대화 시발점이었다.
20. 허금許錦
1340년(충혜왕 복위1)~1388년(우왕14). 고려시대 무신이다. 본관은 공암(양천). 자는 재중在中, 호는 야당埜堂으로 양천군 백의 손자이며 지신사를 지낸 경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죽산박씨 원의 딸이다. 1357년(공미왕6) 당시 정당문학 이인복 문하에서 급제하여 교서교감을 제수받았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의정랑이 되었다. 우왕을 옹립하는데 반대하였으며 윤소정, 조인옥, 조준 등 뒷날 조선왕조 개국의 주역과 친교가 있었다. 50이 못되어 죽으니 사람이 크게 애석하였다 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21. 허금파許錦波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판소리 명창이다. 철종 때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김세종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하여 진채선에 이어 여자 판소리 명창의 선구자가 되었다. 뒤에는 신재효로부터 판소리 지도를 받아 대명창이 되어 고종 때 이
제2장 허씨 515
름을 떨쳤다. 1900년 광무대 협률사 공연에 참가하였고 1903년 원각사 창극공연에 참가하여 <춘향가>를 잘 불렀고, 특히 ‘옥중상봉’ 대목이 더늠(장기)이라 한다. 김세종의 소리제를 이어 받았고 신재효로부터 이론 지도를 받을 만큼 매우 품위있는 소리를 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22. 허기許耆
1738년(영조14) 태어났다. 자는 국로國老, 호는 행와杏窩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1799년(정조23) 회로당을 중수할 때 능감으로 공사를 주관했으며 회로당기를 썼다. 회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1742년(영조18)에 새로 건립하였고 1798년(정조22) 9월 다시 증축되어 재실로 사용하였다. 이때 신주神廚가 함께 중수되었고 향대청과 동재 서재 등도 세웠다. 1814년(순조14)에 타계했다.
23. 허난설헌許蘭雪軒
초당 따님이자 교산 허균의 누이이다. 자는 난설헌蘭雪軒, 별호는 경번景樊이다. 강능 출신이며 시인 이달에게 사사하고 서당 김성립에게 출가하였다.
7세 때 시를 능숙하게 짓고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썼다. 글재주 뿐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여신동으로 불리었다. 아우 교산이 난설헌 시 몇 편을 명나라 주지번에게 주니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여러 사람이 보게 되었다. 슬픔과 아픔을 잘 표현하는 분위기를 남기셨으며 총 142수에 이르는 시와 가사는 규원원가閨元怨歌 봉선화가鳳仙花歌 등이 있다. 시집 난설헌집이 전한다. 가난한 집 딸(빈여음貧女吟)이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豈是乏容色개시핍용색 예쁜 모습 고은 자태 누구한테 빠지리
工針復工織공침복공직 바느질 뛰어난데 짜기도 잘해
少小長寒門소소장한문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랐기로
良媒不相識양매불상식 중신하는 늙은 할미 아직 모르오
516 제4편 수로왕의 후손
24. 허노
1610년(광해군2)~1637년(인조15). 1633년(인조11) 무과에 급제하고 다시 명년에 선전관에 선임되고 비변사의 낭관을 겸했다. 1636년 12월 가을에 조정에서 서북 변방을 돌아보며 진우할 때에 인재를 가려 그쪽 주현의 원을 무관으로 보임함에 따라 공이 순안(현감)을 얻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우리 국경을 유린하여 길게 치달려 들어오니 능히 방어를 못하여 곧바로 경도(서울)로 질주했다.
1637년 정월에 공은 평안도 감영의 좌영장으로서 방백 홍명구를 좇아 근왕코자 서울로 오던 길에 김화에서 적을 만났다. 공은 후현에 거점을 잡고 높은 것을 의지해 아래쪽을 압박할 것을 청했으나 방백 홍명구가 꿈을 믿고 들판에 진을 치는 지라 공이 힘써 다투었으나 끝내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다. 공은 기병을 거느리고 머뭇거리는 적을 두 차례 격파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적의 대군이 과연 후현을 넘어 졸지에 아군을 핍박해 왔다. 공이 급히 격전을 벌여 사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궤멸 당하니 감사 홍명구가 전사했다. 공이 분연히 칼을 휘둘러 에워싼 것을 돌파해 나와 말에서 내려 잠시 쉬자 시종이 후퇴할 것을 재촉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죽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하고는 시종을 달래어 보내 피하게 하고 다시 말에 올라 채찍을 날려 크게 외치며 오랑캐 진을 관통하여 출입한 것이 세 차례 인데 화살을 몸에 맞고 쓰러지니 때가 정월 28일이었다. 그 시신을 찾지 못해 의관을 장사지내니 묘소는 적성(경기도 파주)의 선영을 면한 아래의 언덕에 있으며 그로부터 13년 후인 1649년(인조27)에 그 전사한 공을 논하여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하였다.
25. 허단許慱
생몰년 미상. 자는 여약汝約이며, 성은 허씨로 공암의 세가이다. 첨지중추부사 평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광주노씨이다. 인조반정 10년 뒤에 국자를 양시로 선발하니 거기에 입격하여 처음 사옹원 참봉을 배수 받았다. 이듬해 대과에 올라 괴원(승문원)에 선입되고 승정원 주서로 옮겼다. 1636년 호란에 임금을 좇아 남한산성에 갔는데 임금이 이미 성을 내려와 항복하였으므로 낙남하였다. 여름에 형조의 낭관을 제수받고 잠시 만에 예조로 옮겨서는 상소를 올리니 그 말씀한 바는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 사람을 속환시키는 일이었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곧은지라 상께서 채택하여 의정부에 내려 의논케 하였으나 필경 시행되지 않았다. 이듬해 1637년 봄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 임실현감이 되니 1년을 치러하지
제2장 허씨 517
마땅히 포상을 해야 한다는 소문이 났으나 그해 11월 모일에 재관객사하니 나이 44세였다. 백성이 슬퍼하기를 친척과 같이 하고 읍리마다에는 추사비가 섰다.
26. 허도許道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관리이다. 검교한성윤, 지제생원사를 역임하였다. 1406년(태종6) 부인들이 질병이 있을 때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남자 의원에게 진맥을 청하지 않아 사망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창고궁사 동녀 수십 명을 선발하여 맥경, 침구를 가르쳐 부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을 상언, 왕이 이에 따라 제생원으로 하여금 이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것이 의녀제도의 창시이다.
27. 허돈許燉
1586년(선조19)~1632년(인조10).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덕휘德輝, 호는 창주滄洲이다. 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홍재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언례의 딸이다. 처음 노흠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임명된 뒤 성균관박사를 거쳐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때 폐모설이 나오자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크게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와림천에서 부모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23년(인조1)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여 전라도사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7년 남한산성에서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친구 임진부에게 준 시 300구절에서는 모두 시대를 한탄하고 나라를 걱정하였다. 고암서원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창주집>이 있다.
28. 허득량許得良
1597년(선조30)~1637년(인조15). 조선 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국필國弼, 호는 상무헌尙武軒이며 직장 승립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김상용, 김상헌으로부터 배우다가 붓을 던지고 병서를 탐독하고 스스로 상무헌이라 일컬었다. 1620년(인조2) 이괄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별장이 되어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절충장군에 올라 부호군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제 복량과 더불어 민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병마절도사 민영의 진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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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광주쌍령에서 많은 적병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1652년(효종3)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대구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상무헌유고>가 있다.
29. 허득선許得善
생몰년 미상. 한말에 활약한 서도소리 명창이며 비조이다. 평양 출신으로 김관준과 함께 서도소리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학식이 있어서 서도 잡가의 사설을 다듬고 좋은 사설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재주가 있다.
서울 경기 선소리의 시조라는 의택이와 종대가 평양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을 때 이를 듣고 배워서 서도 선소리를 만들었고 널리 유행시켰다. 그의 의발은 김관준이 이어받았다. 그뒤 그의 소리는 문영수, 이정화 등 서도명창에 의하여 서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고, 서울의 잡가 명창들도 다투어 배웠다. 그 결과 경서도창이 생겨서 요즘에는 경기명창들은 으레 서도소리를 부르게 되었다. 고종과 민비 앞에서 <기밀경> 등 서도 가무를 열연하여 민비의 주선으로 1882년 왕세자비 책봉 때 총순 벼슬을 하사 받았다. <기밀경>은 제자인 김칠성을 거쳐서 김옥선에게 전하여 졌으나 지금은 아는 이가 없다.
30. 허련許鍊
1809년(순조9)~1892년(고종29). 조선 말기 선비화가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癡, 노치老痴, 석치石痴이다. 조희룡, 전기 등과 함께 김정희 일파에 속한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의 이름을 따서 허유許維라고 개명하였고,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초년에는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화풍을 익혔다. 대흥사 초의의 소개로 1839년 상경하여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의 미불,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의 석도 등을 배우고 그의 시풍도 전수 받으면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여 김정희 일파 가운데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로 지목된다.
1865년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방산방을 마련하고 제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제2장 허씨 519
1866년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선면산수도> 등을 남겼고, 1867년에는 <몽연록> 등과 <소치실록>을 저술하였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과 예잔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의 자유분방 한 필치다. 생면한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볼 수 있다. 스승 김정희도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만한 화가가 없다. 소치 그림이 내 것 보다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아들 형에게 이어졌고, 손자 건, 방계인 허백련 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유작으로는 <산수도첩><오백장군암도><방예찬죽수계정도><방석산수도> <선면산수도><누각산수도><김정희 초상> 등이 있으며 이밖에 모란, 괴석, 사군자 등 많은 양의 작품이 전한다.
31. 허명許溟
1817년(순조7) 왕후릉의 재각인 숭보재崇報齋를 세우고 그 기문記文을 지었다. 이 기문에 따르면 숭보재 건립에 필요한 재원은 1792년(정조16) 공의 아버지가 기부한 출연금 3천냥을 늘여서 마련했다고 한다.
32. 허목許穆
1595년(선조28)에 영천에서 태어나 1682년에 돌아가셨다. 출생 때 손에 문文이 있어 자를 문부文父라 했고, 수미叟眉가 길어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본관은 양천이다. 문명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수차례나 왕의 부름을 받았다.
숙종 때 허적과 더불어 남인의 영수로 추앙받았으며 특히 현종 때 2차례에 걸쳐 송시열과 치열한 예송논쟁을 벌였다. 이로 말미암아 1674년(헌종15)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송시열 처벌 문제로 허적과 마찰을 일으켜 1679년(숙종5)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고학에 밝았으며 특히 한자 서체인 전篆은 동방제일로 알려졌다. 그림에도 뛰어나 매화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한다. 유작 가운데 묵매도일쌍黙梅圖一双이나 월매도月梅圖 또는 묵죽도墨竹圖는 필치가 청아하고 경건하여 그 품격이 고매하다는 평가
520 제4편 수로왕의 후손
를 받는다.
후진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드신 도해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에서 이기론을 설명하였다.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氣에서 행하므로 이기理氣를 나눌 수 없다는 주장이, 공의 이기론理氣論이다.
웅연에 배를 대고 영숙에게 보내는 시, 웅연흘주시영숙雄淵汔舟示永叔을 소개한다.
山下春江深下流산하춘강심하류 강물은 깊고 깊어 흐르지 않고
錄蘋風動浪花浮녹빈풍동랑화부 물결만 바람따라 출렁이는구나
草靑沙白汀注晩초청사백정주만 강기슭 흰 모래 푸른 풀빛 좋은데
捲釣移舟上渡頭권조이주상도두 낚시 걷고 노 저어 배는 떠나누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가락기를 전제하였다. 1682년(숙종8)에 타계하니 수 88세였다. 숙종은 돌아가신 지 7년 째인 1688년 경신환국 때 삭탈했던 관직을 회복시키고 예장의 명을 내려 승지를 보내 제사지내고 자손을 등용하게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미수기언>은 그의 문집이다.
33. 허반許磐
?~1498년(연산군4). 조선초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병文柄이다. 아버지는 사지 인이며, 어머니는 권지명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사직서참봉이 되었다. 1494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고, 이해에 <성종실록>편찬이 시작되면서 사관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수록되어 있음이 밝혀져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 이목, 권오복, 권경유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단정하여 세칭 무오사화의 오현이라 일컬어졌다. 뒤에 신원되었다.
34. 허백許伯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공암(양천)이다. 첨의종찬 공의 손자이며 충렬왕대에 호부산랑의 찬성사에 증직된 관의 아들이다. 1317년(충숙왕4) 병과로 급제, 1344년(충목왕1)년 판전민도감사가 되고, 이어서 동지밀직사사에 올라
제2장 허씨 521
이제현과 더불어 서연에서 시독하였으며 같은 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347년 지공거가 되어 이곡과 더불어 진사를 취하고 김인관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49년(충정왕1) 찬성사가 되고 1356년(공민왕5) 중서시랑동평장사 되어 양천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5. 허백기許伯琦
1493년(성종24)~?.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여진汝珍, 호는 삼송三松, 호재浩齋이며 직제학 정의 아들이다. 조광조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14) 진사시를 거쳐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관과 주서가 되었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526년 형조정랑, 1528년 경상도 도사, 그리고 이듬해는 진위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1년 헌납과 장령, 1544년 사간과 교리 그리고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 1533년(명종8)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36. 허복량許復良
?~1636년(인조14). 조선 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김해, 운로의 아들이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문인이다. 벼슬이 부총관에 이르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득량과 함께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영의 진에 나아가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대구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37. 허봉許篈
1551년(명종6)~1588년(선조21). 휘는 봉이고 자는 미숙美叔이다. 7세에 문장을 구성할 줄 알았고 10세에 경사에 통해 시문을 지었다. 1568년 15세 되던 해 생원시에 장원하니 사장과 학문이 날로 풍부해졌다. 1572년 나이 22세로 3월 정시에 등과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배수되고 잠시만에 예문관 검열로 선발되었다.
1573년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1574년 예조좌랑을 배해서는 자청으로 서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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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 중국 사대부들과 더불어 주자와 육상산을 분변하는 논란을 벌이며 지위가 높은 선생급 인사들한테 굴하지 않으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1576년 부교리로 제수되어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가 교리로 전직했다. 1577년 가을에 의정부 검상으로 추천 제수되어 사인으로 승진하고 두 차례 사헌부 장령으로 전직되었다가 두 차례 사인으로 돌아가서는 홍문관 응교 겸 예문관 응교로 옮겼다. 1578년에 어사로서 함경도를 순무하고 1579년 장령을 배했다가 곧 사인에 제수되고 응교로 돌아왔다.
1580년에 부모상을 당하여 1582년 복상을 마치고 사복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배수치 않고 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듭하여 제수되어도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1588년 황달에다 시고 차가운 음식을 과식하여 한질(감기)에 걸렸다. 고통이 심하여 의원에게 보이려고 동교(서울 동대문)로 실려 오다가 9월 17일 김화현 생창역에서 졸하니 향년 38세였다.
공은 굳세고 방정하며 상쾌히 통달하여 일에 있어 확고함이 매우 깊었다. 옳다고 보는 일이면 집요하게 꺾이지 않아 비록 천만인이 회유해도 바뀌지 않았다.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함은 그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일을 의론함에 강개하여 비록 임금 앞에서라도 굴함이 없었는데 때로 임금 얼굴을 마부 보면서 굳세게 간하면 천위(임금의 위엄)가 진동하여 옆에 있는 이가 땀을 흘려도 공은 동요치 않았다. 그 관직에 처하고 사무에 임해서는 비록 간이하고 서서히 보는 것 같지만 이를 구분하고 규획하는 것은 모두가 조리에 심히 합당하였다. 저술은 <조천록><북변기사><하곡수어><의례산주><이산잡술><독역관견> 등 책과 시문이 있는데 병화로 산실되고 단지 남은 것은 유고 몇 편 뿐이니 진실로 큰 산의 터럭 끝 하나일 뿐이다.
38. 허부
생몰년 미상. 자는 유선惟善이며 호는 동강東岡이다. 부친인 판서공이 만년에 말질(불치병)을 얻어 기거에 반드시 사람이 필요했는데 공이 여러 해를 거듭하여 좌우에서 힘써 복무하고 보호하니 판서공이 안정되었다. 1618년 집안 숙부 허균이 역모에 좌죄되어 벽진군으로 유배되니 이연히 순응해 떠나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지킴에 변화가 없었다. 1623년 비로소 해도에서 나와 서호 삼포에 거주지를 정하고 이안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담장과 정원을 다스려 청결히 수양하며 이름난 꽃과 아름다운 초목을 심어 가꾸되 거문고와 바둑으로 세상과 병풍과 장막을 치니 정밀
제2장 허씨 523
하게 정돈되지 않음이 없었다. 주렴을 친 집 문안에서 안석에 의지해 유연하게 하루해를 기울이면서 손이 오는 것을 즐기되 내객을 가리는 바가 없었다. 본성이 음주를 못했는데 빈객이 이르면 반드시 술과 밥으로 대접하며 환희를 다하였다. 또한 자기가 지니던 골동품 등을 남에게 베풀되, 오직 상대방이 받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39. 허부許富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 문관이다. 본관은 공암(양천). 첨의중찬 공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우대언이 되었는데 1320년(충숙왕7) 과시를 관장하여 정을보 등 80여인을 뽑았다. 글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두에 있는 1인만 뽑고 나머지는 우열을 가리지 않고 봉한 이름을 열어보고 차례로 이름을 썼으므로 사람들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선부전서가 되었다.
40. 허사종許嗣宗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거문고의 대가이다. 그가 연주했던 <만대엽평조><북천><삭대엽> 등 세 거문고 악곡들이 이득윤이 지은 <현금동문유기>에 합자보로 기보되어 전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금합자보>의 저자인 안상과 함께 <현금동문유기>에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이전에 활약했던 거문고 대가의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41. 허새許璽
?~1682년(숙종8). 조선 후기 유생이다. 무옥에 희생당한 유생 대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집권한 뒤 남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기 위하여, 서인의 김석주, 김익훈 등이 전 병사 김환, 출신 이회, 기패관 한수만 등을 시켜 남인 유생이던 허새 등이 주상이 무도하고 조정이 문란하므로 300여 명의 병사가 궁궐을 침범하여 북평군을 추대하고 대왕대비를 수렴청정하게 한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이에 국청을 설치하여 관련된 남인을 모두 처단하게 되었는데, 이 무옥의 주동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신원되었다.
524 제4편 수로왕의 후손
42. 허서許瑞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 공신으로 양천군 유의 아들이다.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에 침입하여 개경이 점령되고 왕이 남천할 때 상호군으로서 왕과 공주 및 태후와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행하여 수종한 공으로 1363년에 신축호종 1등공신에 서훈되었다. 또한 개경이 점령당한 뒤 1362년 수복경성2등공신이 되었다. 1365년 전리판서로 있을 때 필직 김란이 신돈에게 두 처녀를 바치자 이에 최영이 김란을 꾸짖는 사건에 연루되어 구가세족으로서 허유, 변광수, 김귀, 이인수 등과 더불어 참소되어 유배되었다.
43. 허성許誠
1382년(우왕8)~1441년(세종24). 조선 초기 문신이다. 본관은 하양. 자는 맹명孟明이며 한성부판윤을 지낸 주의 아들이다. 1402년(태종2) 식년문과에 동지사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다. 그뒤 형조, 예조, 병조 좌랑을 거쳐 1411년 지평에 올랐다. 곧 공조좌랑에 올랐고 장령이 되었다. 1421년(세종3) 지사간원사가 되고 우사간과 동부대언을 거쳐 지신사가 되었다. 1431년 대사헌에 올랐고 곧이어 형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낸 뒤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438년 중추원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못참았으며 총명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44. 허성許筬
1548년(명종8)~1612년(광해군4)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으로 양천인이다. 어릴 때 미암 문절공 유희춘을 사사했고 가정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 많았다. 천성이 충실하고 관후하며 곧고 방정하여 움직임은 반드시 예도로써 하였다. 학문은 육경을 근본으로 하였고 일을 만나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으면 비록 천만인이 다투어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여 사국(춘추관)에 들어가고 정언과 헌납을 역임한 뒤 이조의 낭관을 거쳐 응교. 사인, 집의를 거쳐 이조참의로 승진하고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으로 옮겼다가 곧 이조참판으로 발탁되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를 감사로서 안찰하였다. 예조판서를 맡고 드디어 병조판서를 장악하더
제2장 허씨 525
니 문득 이조판서를 배하였다. 그 사환한 것은 선조 때이며 학문과 도덕으로 사람이 촉망하는 바였고 임금의 홍화를 협찬 하여 소리와 소문이 크게 떨쳤는데 1612년(광해군4) 8월 초6일에 졸하니 향년65세이고 경기도 광주 토당리 진좌술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45. 허수겸許守謙
1563년(명종18)~?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이옥而玉, 백형伯亨이며 억부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자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1596년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적이 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아랫사람들이 군기를 적에게 실어다 주었다는 이유로 죄를 입었다. 또 강진현감이 되었으나 1602년 사헌부에서 징렴을 많이 하고 증망이 가볍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외임을 주로 하여 공주목사에 이르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46. 허순許純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 문신이다. 본관은 공암(양천)이며 호부상서 재의 아들이다. 1126년(인종4) 아버지가 이자겸 일당이었다고 하여 풍주방어사로 좌천되자 아울러 전주방어판관으로 쫓겨났다. 1135년(인종13)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제위보부사로 내시지후 정습명, 잡직서령 왕식과 더불어 서경의 서남해도에 가서 수군과 전함을 징발하여 순화현 남강에서 적의 배를 막았다. 1149년(의종3)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을 바쳤고, 1155년 시형부시랑으로 동북면병부사가 되었다.
47. 허숭許嵩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신이다. 본관은 공암(양천), 초명은 평評이며 첨의중찬 공의 아들이다. 1279년(충렬왕5) 김방경의 아들 흔 등 의관자제 25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뜰루게가 되어 대방공 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1286년 궁전배장군으로서 낭장 김심, 설지충, 왕유소 등 9명과 원나라에 갔다. 또 1291년 장군으로
526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서 상장군 유비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세자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1297년 부지밀직사사가 되고, 1307년에는 판밀직사로 승진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민조상서가 되었고 이후 동지밀직사사판봉상시동지자정원사를 거쳐 1310년(충선왕2) 양천군으로 봉해지고 이어 검교정승을 제수 받았다. 시호는 양숙良肅이다.
48. 허승許升
?~1180년(명종10). 고려시대 무인이다. 용력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중부와 아들 균의 횡포가 심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경대승을 만나 1179년(명종9) 견룡장으로서 경대승과 함께 정중부, 송유인을 제거하였다. 그 공으로 태자부지유별장이 되자 경대승을 믿고 방자하여 불량소년을 양성, 동궁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동궁의 뒷벽에 누워 가취로 밤을 세우며 횡포를 자행하다가 이듬해 경대승에게 참살되었다.
49. 허승소許昇所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화가이다. 본관은 양천, 호는 진관자眞觀子이다. 조선 후기 감식안으로 이름 있던 김광국이 소장하였던 화첩에 <괴석추화도>가 함께 꾸며져 있어 확인되었다. <괴석추화도>는 간일한 아취가 담긴 그림의 격을 갖춘 작품이다. 그밖에도 소담한 필치의 산수, 산수인물도 등이 세간에 전한다.
50. 허식許烒
1837년(헌종6)에 태어나 1906년(광무10)에 타계했다. 자는 사성士成이고 호는 강촌江村이다. 1867년(고종4)에 사마사시에 합격하였고 1886년(고종23)에 숭선전 제2대 참봉으로 부임하였다. 1896년(건양1)에 통훈대부로 영천군수를 지냈다. 또 1890(고종27) 신도비각을 수리할 때 신도비각수리기문을 지었으며 신도비각 수리를 완성하였다. 숭선전지 편찬할 때 실제로 작업을 주도했다.
제2장 허씨 527
51. 허실
1583년(선조16)~1625년(인조3).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종지宗之이다. 경상감사 엽의 손자로 홍문관전한 봉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39) 생원이 되고, 1608년 세자시강원설서, 병조정랑, 지제교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0년(광해군2) 정언을 거쳐 1615년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시의에 구애되어 이듬해 비로소 성환도찰방이 되었다. 1618년 옥사가 일어나 일문이 화를 당하고 사천에 안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귀양이 풀려 성주에 우거하며 어머니상을 마쳤다. 성균관박사에 제수되어 사은숙배만하고 돌아왔다. 이해 다시 경성판관에 제수, 이곳에서 굶주린 백성들을 잘 보살핀 공으로 승서되었다.
52. 허언심許彦深
1542년(중종37)~? 조선 중기 의병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압호정壓湖亭이다. 진주에 살던 부호로 곽재우의 맏누이가 그의 부인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도움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가담하지 않다가 곽재우가 그의 아들을 데리고 나오자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재물과 종들을 내놓고 자신도 의병에 가담하여 군량조달 책임을 맡았다. 의병에 대한 전공으로 후일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53. 허엽許曄
1517년(중종11)에 태어나 1580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대휘大暉. 호는 초당草堂이시다. 명종 임금 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감사, 부제학, 대하헌을 지내셨고 1568년(선조1) 대사간으로 향약을 설치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1580년(선조13)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상경 도중 상주에서 별세하였다.
7,8세 때부터 보기 드문 뛰어난 효성을 보였고 우애가 남달랐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정주程朱 이후에 학문이 밝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학문을 세운 것이 도리어 한나라 때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스스로 얻는 것(자득)과 듣고 보는 것(견문)의 차이 아니겠나” 하셨다. 공이 관찰사로 있을 때 능묘를 보수하고 상석과 섬돌을 갖추었다. 1592년(임진년)에 왜구가 능을 파헤치자 허경윤이 봉분을 쌓은 뒤 1646년 경상도 관찰사 허적이 능전에 비석을 세우고 크게 보수하였다. 이때 허목, 성현 찰
528 제4편 수로왕의 후손
방 허륜, 진사 허겸, 신령현감 허구 등이 이 일에 기여했음을 수로왕릉비음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54. 허오許吾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피리의 명인이다. 당시 풍류를 좋아하는 김류가 자리를 베풀어 허오의 피리는 물론 이마지의 거문고, 도선길의 당비파, 송전수의 향비파 등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55. 허옹許邕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우헌迂軒이다. 아버지는 의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헌납이 되고 1331년(충혜왕1)에 밀직제학 한종유, 우대언 이균해가 과시를 맡아보면서 감찰대부 최인도의 아들 경을 부정으로 합격시키자 정언 조렴, 정천유와 함께 이를 탄핵하여 과거시험의 재실시를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하옥될 뻔 하였다. 그러나 박련이 간관은 죄를 줄 수 없다고 하여 중지되었다. 1336년(충숙왕 복위6) 감찰장령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338년 낭사로서 앞서 급제한 최경의 첩장에 서명을 거부하여 왕을 난처하게 하였다. 뒤에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탁월하였으며 당시 이색과 교유, 만년의 은거생활을 산수와 어조로 낙을 삼았다.
56. 허완許完
1569년(선조2)~1637년(인조15). 자는 자고子固이며 본관은 공암(양천)이다. 25세 무과에 발탁되어 남변을 지키러 가니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 번 보고 기재라 여겨 동렬의 무사와 달리 대우하며 허완은 장수가 될 재주가 있다 하였다. 수자리에서 돌아와 선전관에 배수되었는데 그 재주와 인망으로 비국랑(국가안보회의 같은 비변사의 낭관)에 선발되었다. 유성룡이 공을 천거하여 차서를 따지지 않고 남평현감을 제수케 했다.
4년 만에 모친상을 당해 떠나 왔다가 상을 마친 뒤 다시 비국랑이 되고 옮기기를 거듭하여 도총부 도사와 경력이 되고, 1604년에 단주군수가 되었다. 이때 오랑캐
제2장 허씨 529
가 변방을 침구하여 우리 장수를 죽였으므로 상께서 북도(함경도)에 명하여 절도사가 출병하여 격파하라 하였다. 공은 우후 성우길과 선봉이 되어 이미 깊이 적진으로 진입해 보니 후군이 오랑캐에 포위돼 있는 지라 급히 되돌아와 구원하고 공격해 적을 격파하고 전군이 돌아오게 하였다. 상께서 특별히 활과 갑옷과 투구를 하사하고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무산진첨절제사로 옮기게 하였다. 오랑캐와
대치한 지 3년만에 훈련원 중군이 되고, 1613년 호서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다시 훈련원 군사들이 공을 생각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므로 그 사실을 병조에서 상께 계문하니 돌아와 훈련원 중군을 배하였다. 1627년 오랑캐가 대거 침구해 들어와 서울 일대를 압박해 오자 상께서 나와 강도로 행차했는데 공을 다시 중군으로 삼으니 전군이 장수를 얻음을 기뻐하며 돌에 새겨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도적이 물러가자 군신에게 상을 내렸는데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공을 가선대부로 진급시켜 영남 우절도사 겸 진주목사를 삼았다.
1629년 회령도호부사로 옮겼고 1636년(인조14) 다시 영남 좌절도사로 옮겼는데, 이때 겨울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경성을 지킬수 없게 되자 상께서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0여 일 동안 포위되니 공이 보졸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에 죽음을 맹서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사졸들 마음을 분발시켰다. 이에 사졸 모두 사력을 다할 생각으로 경기도 광주 쌍령에 이르니 남한산성에서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공이 우영과 약속하기를 아침해가 뜨면 병사들을 먹이고 진군하여 남한 아래 이르기로 하였는데, 우영의 안부종사 도경유라는 자가 평소에 장병들한테 인심 잃은 것을 괘념하여 망녕되이 군사들을 독려해 아침이 밝기 전에 적을 공격했다. 공이 도경유에게 말하기를 “사졸들이 멀리서 왔고 혹한에 허기진데다 동상까지 심한데 지금 나가 싸울수 없소”라고 했으나 도경유가 말을 듣지 않고 우영 군관의 목을 베어 여러 병사들에게 겁을 주었다. 공은, “천운이로다. 대사가 물거품이로다!”하고는 마침내 진군했으나 오랑캐 복병에게 양영의 병사가 모두 패하여 죽고 말았다. 공은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므로 병사들이 다 죽기로 싸워 휘하 장수가 모두 다 전사했다. 적이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올리자 공은 적에게 능욕을 당하지 않고자 차고 있던 패도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으니 1637년(인조15) 정월 3월의 일이었다.
57. 허욱許煜
1827년(순조27)~1883년(고종20). 대원군 가인으로 임오군변의 주동 인물이다.
530 제4편 수로왕의 후손
경상도 순흥 출생이다. 아버지는 전이며 어머니는 주소사이다. 1882년(고종19) 6월5일 선혜청 도봉소에서 일어난 군료분쟁사건을 계기로 6월9일 구훈련도감 소속 군병들이 중심이 되어 군변이 일어났다. 봉기한 군병과 이에 가세한 백성들이 선혜청당상 민겸호 집을 습격하여 파괴한 다음 운현궁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김장손, 유춘만 등 군변 주동자에게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내리는 한편 허욱으로 하여금 군복을 입고 환도를 소지시킨 다음 군병 200명을 지휘하도록 하여 군변을 확대시켰다고 한다. 그가 군변주동자로 체포되어 추국을 당하게 된 것은 다음해 6월 7일과 8일 이틀 간이다. 의정부에서 추국을 당할 때 김태희, 조종순, 이경문, 고윤영, 지봉식 등 입궐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접촉했음을 들어 자신이 군병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무초임을 주장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3년 6월 9일 모반대역부도로 결안되어 다음날 종루가상에서 능지처사되었다.
58. 허욱許頊
1548년(명종3)~1618년(광해군10). 공의 자는 공신公愼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1591년(선조24)에 공주목사가 되고 1596년 다시 강계도호부사로 나가 관리와 백성들 마음을 얻으니 감사가 그 치적을 조정에 올려 말하기를 “자기 행실로써 청렴하고 너그러움으로써 백성에게 임한다”고 하였다. 잠시만에 한성부 판윤으로 승진하고 호조판서로 바뀌어서 1606년(선조39)에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상에 배수되고 좌상으로 승진했는데 오랑캐 추장 노아합적 홀자를 격파하고 우리 북쪽 변방을 혼란시키며 소동을 일으키자 공을 병마체찰사로 삼아 파견하여 오랑캐에 대비케 했다.
1608년 선조께서 승하하자 삼사에서 임해군이 모반한다고 고하니 이때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유영경의 죄상을 논하므로 유영경이 병으로 사직하고 감히 나오지 않았다. 공이 세자 광해군을 받들어 행궁에서 즉일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영경을 경흥으로 유배하여 안치시키자 공이 병으로 사양하면서 면직시켜 주기를 빌었다. 삼사에서 논하기를 “욱이 유영경과 같은 삼공의 당여로서 정사를 몹시 어지럽혔습니다”하니 광해군이 가로되, “좌상이 허욱이 중후하고도 근신하는 인품인데 어찌 이같은 일이 있겠는가” 하였으나 삼사가 연달아 계를 올려 공을 재상 자리에서 파직시키고는 비로소 그쳤다.
공이 서호에 산 것이 10년인데 스스로 촌옹야로와 같이 통달해서 시사에 미치는
제2장 허씨 531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호를 부원(따뜻한 햇빛을 등에 쪼이고 앉았다는 뜻)이라 했는데 신경희라는 자가 있어 무고로 대옥을 일으키자 공이 공사에 연루되어 원주에 부처되어서 졸하니 연세 70세였고 고향으로 귀장되었다. 6년 뒤 인조 때 공의 관작이 추복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59. 허원許原
생몰년 미상. 태봉의 문신이다. 918년(정개5) 태봉의 수도인 개성에 괴이한 용모를 가진 노인이 나타나 상인 왕창근에게 고경을 팔았다. 그런데 왕창근이 고경을 벽위에 걸어두자 햇빛을 받아 글자가 보였으므로, 궁예에게 알렸다. 이에 허원은 송함홍, 백탁 등과 함께 궁예의 명을 받아 고경에 쓰인 글자를 풀이하였다. 그러나 그 문구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알리는 참언이었으므로 사실대로 고하면 화를 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적당히 꾸며서 거짓으로 궁예에게 알렸다.
60. 허원許源
1671년(헌종12)~1729년(영조5). 조선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청보淸甫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완의 후손이며, 중승지 호의 아들이다. 이세필의 문인이다. 1689년(숙종15) 19세 나이로 “쌍령에서 순절한 사람의 후손을 서용하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순릉참봉이 되었고 금부도사를 거친 뒤 1695년 예안현감이 되었다. 1728년(영조4) 천안군수로 재임 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반군이 병사를 죽이고 서울로 향하고 있을 때 인근 고을 수령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징발하여 적에 대비하는 한편, 척후를 보내 적정을 염탐하여 보고하였고 도순문사 오명항으로부터 운량사에 임명되어 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이듬해 청주목사로 승진되었다가 곧 사소한 일에 연좌되어 파면당한 뒤 죽었다. 1731년 논공행상에서 분무원종공신으로 책봉되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61. 허원식許元栻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문신 학자이다.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880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첫 번째 상소에서는 우선 국가재정의 위기
532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와 민심의 이반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이서배의 혹심한 중간수탈과 세납곡물을 운반하는 조선의 선주가 저지르는 각종 부정행위에서 찾았다. 이러한 해결 대안으로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했다. 근래 사치풍조가 심해지는 까닭으로 부상들이 외국상인과 결탁하여 곡물을 밀무역하고 외국에서 사치품을 들여오는 것으로 보고 이를 엄금할 것을 주장하며 개항에 따른 폐해를 지적했다.
두 번째 상소에서도 지방관과 이서배들의 수탈로 민생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개탄하고, 인천항 개항에 극력 반대하였다. 인천에서 외국의 사치품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쌀, 포, 물고기, 소금 등이 유출되면 서울의 10만 가구가 굶주릴 것이며 개항을 통한 통상무역의 불필요와 함께 자급자족하는 검약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책략> 내용 가운데 멀리 떨어진 미국이 러시아가 침입할 때 우리나라를 구원하여 준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며, 러시아가 우리를 침략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문호를 닫고 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위정척사계열의 전형적인 내수외양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62. 허월許越
생몰년 미상. 고려 초의 승려이다. 나말여초의 명주(강릉) 지역호족인 김순식의 아버지다. 가계는 신라 진골 가문으로서 신라 하대 명주 일원의 세력가로 대대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후삼국 격변기 속에 승려가 되어 고려의 수도 개경의 내원에 거처하였다. 이때 고려 태조로부터 아들인 명주장군 순식이 귀부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922년(태조5)에 순식으로 하여금 고려에 귀부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강원도 지역 깊숙히 세력을 미칠 수 있었고 군사력 또한 한층 증강되었다.
63. 허위許葦
자는 계형季馨. 호는 왕산旺山. 1855년(철종6) 4월2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아버지 조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네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807년 증조부 불고헌 때 임은리로 옮겼으며, 조부 태초당은 서예로서 명성을 날렸다.
제2장 허씨 533
1894년 청송군 진보로 이사 가셨으며 1896년 나라 주권을 빼앗기자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3월 10일 김천 장날에 장정 수백명을 모아 김천 무기고를 접수하고 충북 진천까지 올라갔으나 왕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였다.
1899년 2월 고종이 공의 경륜과 포부를 듣고 환구단 참봉으로 입시케 하고 같은 해 4월에는 영희전참봉, 성균관 박사 등을 제수하였다. 1903년에는 승훈랑이 되시고 윤이병 등과 함께 매국단체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라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4년4월3일 통훈대부, 중추원의관이 되셨다. 같은 해 5월11일에는 정3품 통훈대부, 5월28일에는 평리원 수반 판사를 잇달아 제수 받으셨다. 공은 한일의정서를 반대하는 배일창의(일본을 배격하고 의를 드높이는) 격문을 온 나라에 뿌리고 백성이 총궐기하여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1904년8월10일 의정부참찬, 칙임관2등이 되셨다. 8월27일에는 이정소의정관이 되어 중요한 국정을 결정짓는 기관에 참여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10가지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같은 해 9월7일에는 고종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 받고, 12월24일에는 정우회를 조직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타도하고자 하였다.
51세 되던 1905년3월3일 비서원승이 되셨으나 일본군이 조선의 공적사적 재산권을 침해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실을 알리는 격문을 온 나라에 배포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 간 옥고를 치르셨다. 출옥한 뒤 ‘정치 부패로 나라가 자멸과 자망에 이르니 황제와 권신 등은 각성 분발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7년 간에 걸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물러났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자 경상, 전라, 충청 삼남지방의 경계인 경북 지례군 삼도봉 아래에서 각도 의병과 지사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고종은 ‘거의擧義’라는 제목의 밀지를 내려 공의 뜻에 지지를 보내고 적극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격려했다.
1907년10월 이완용이 “의병을 해산시키고 돌아오면 내부대신 자리를 주겠다”며 회유하였으나 결연히 물리치고 12월에는 8도 의병을 한곳에 모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고 공은 군사장이 되셨다. 공은 적의 심장인 통감부를 뒤엎고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하에 거느린 병사 300을 이끌고 동대문 밖까지 진격하였으나 후속부대와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 시간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후퇴하고 말았다.
1908년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 공이 전국 의병을
534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총관하여 지휘하여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수비군 사령관 오카사키 중장이 이끄는 51연대 병력으로 응전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공은 그해 파주에 5천여 명의 의병을 집결시키고 이강년, 유인석 등 전국13도 의병장들에게 병력을 일으킬 것을 통보하는 한 편 부하 박노천, 이기하를 통해 통감부에 태황제 복위·외교권 환수·통감부 철거 등 30여개 조 요구사항을 전하는 활동을 펼쳤으나 5월24일 경기도 연천군 반석동에서 철원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헌병사령관 아키시(明石元二郞)이 심문했다.
“의병을 일으킨 자는 누구며, 의병대장은 누구냐?”
“의병을 일으킨 자는 이등박문이고, 의병대장은 바로 나다.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던들 의병이 일어날 리 있었느냐?”
유명한 답변이다.
1908년(융희2) 10월 공이 사형을 선고 받자 대한매일신보가 ‘하늘이 빛을 잃었다’는 ‘천일무광天日無光’이란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니 온 나라가 백성들이 목놓아 울었다. 1908년10월21일 교수형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유언이 있으면 남기라는 검사 말에 “나라 일을 하며 죽는 데 유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죽은 뒤 시체를 무엇 때문에 걱정하랴. 이곳에서 썩어도 좋다”는 말과 함께 “어버이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나라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도 효도 하지 못한 몸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공을 심문한 헌병사령관 아카시는 왕산의 인품과 애국심에 반해 통감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며, 여순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안중근 의사는 “2천만 동포한테 허위 선생같은 충성심과 용맹한 기상이 있다면 오늘날 이 같은 치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1962년 3월1일 정부에서는 최익현 안중근 김구 등 18위 선열에게 주는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서훈하고 10월24일에는 대구 달성공원에 왕산의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1966년11월29일 서울시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왕산이 진두지휘하여 혈전을 벌인 전적지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거리를 왕산로라고 이름 지었다.
64. 허유許猷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공암이다. 첨의중찬을 지낸 공의 손자로,
제2장 허씨 535
충숙왕 때 선부전서를 지낸 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하노씨 영수의 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에 강릉대군 기를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가서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통례문판관으로 서북면찰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다음해 감찰장령에 재직 중 앞서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3등공신이 되었으며 뒤에 판합문사에 이르렀다.
이후 홍건적이 침입하자 병마사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때 사감으로 장군 최복량을 죽인 일로 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홍건적 격퇴 후 정승 김용에 의하여 섬에 유배되어 봉졸로 충군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얼마 후 밀직부사가 되었다. 홍건적 침입 때 서울을 수복하고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양천군의 전횡을 비방하였다가 그의 미움을 사 청주로 유배되었다.
65. 허유례許惟禮
호조참판을 지낸 숭도崇道의 네 아들 가운데 셋째이다. 공은 너그럽고 어질되 지조가 확고하여 소시부터 어버이에게 효도함이 도타우면서 의열로서 자허하였다. 세조 때 이시애가 본주(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차 서울을 범하려하면서 그 성세가 팽창되니 여러 고을이 줄줄이 함락되어 감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어유소 등을 파견하여 장병으로서 방어케 하였으나 적이 험한 지형을 업고 견고히 지키므로 감히 그 머리를 벨 수 없었다.
이때 공이 바야흐로 사옹원 별좌로 있으면서 부친 참판공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금의 탑전에 몸을 던지듯 나가 종군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그 충용이 장하다 하여 허락하자 공은 말을 달려 적진으로 가서는 방책으로 적을 속이면서 경성의 운위원에 이르렀다. 거기서 기발한 계책을 써 이시애가 취해 잠든 틈을 타 목을 베어 죽이니 남은 무리는 짐승처럼 흩어졌다. 승첩을 주달하니 상께서 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정충적개공신의 호를 내리고 동지중추부사로 그 직질을 올려 주면서 길성군吉城君에 봉했다.
66. 허윤許玧
1645년(인조23)~1729년(영조5). 자는 윤옥允玉이며 소시부터 총명하고 영오하였다. 1672년(헌종13) 사마양시에 다 적중하고 1683년(숙종9)에 문과에 장원하
536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였는데 전후의 과거를 한 해가 찬성공(6대조 굉)과 간지가 딱 맞으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했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으로 옮기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 으로 탁배되었다. 오래 영예의 길이 막혀 범용한 산직과 형조 낭관, 직강 등을 역임했다. 이천부사가 되었다가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오래 뒤 통례와 예빈시정을 배했다가 다시 풍기군수가 되고 문과 중시에 등제한 뒤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안주목사를 지내고 돌아와 판결사를 배하고 은대(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 1718년(숙종44)에 동궁의 가례가 이루어지자 방을 담당하는 승지로서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한성부 우윤을 배했다. 이듬해 숙종이 기로사에 들어가자 ‘조정신하로서 나이 70세인 자는 승자 시키라’는 명이 있어, 당시 75세였던 공은 가의대부로 올라 병조참판이 되었다.
1725년(영조1)에 예조참판을 특배하였는데 잠시만에 대신이 임금께 진주하여 말하기를 “아무개 윤은 나이가 이미 대질(80세 이상)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하니 드디어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하여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우유히 지내며 한가히 정양하다가 4년 뒤인 1729년(영조5)에 졸하니 5월 4일이었다. 경기도 광주 심곡리 을향(동동남을 향한 자리) 언덕에 장사하고 정부인 남양 홍씨도 부장하였다.
67. 허응許應
고려 공양왕 때 낭사 벼슬에 있을 때 가뭄이 심한 원인이 허망한 불교에 있다면서 배불론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좌상시에 보직되어 이성계와 협력, 전제개혁을 주장하고 시폐혁신론時弊革新論을 제출하셨다. 태종 때는 대사헌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을 적극 펼쳐 김해 구암사에 소속되었던 노비 수천명을 풀어주고 공안부사 박자안을 파직시켰다. 양천인이시며 교의 아들이다.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68. 허응상許應祥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이며 선산출신이다. 양민의 신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 민영의 막
제2장 허씨 537
하로 종군하여 척후장이 되어 싸웠다. 경기도 광주 쌍령의 경안교에서 청나라 병사를 만나 7,8명을 죽이고 이튿날 적의 대규모 공격에 대항하여 군사를 이끌고 싸워 격퇴시켜 그 용명을 떨쳐 허장군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러한 군공으로 훈련원첨정을 지내고 남해현령이 되었다.
69. 허임許任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명의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악공 억복의 아들이다. 상민 출신으로 침구술에 뛰어나 선조 때 임금을 치료한 공로로 동반의 위계를 받았다. 1612년(광해군4) 8월에 광해군이 해주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남으로 내려올 때까지 시종하였으므로 3등공신과 의관록에 기록되었다. 1616년 영평현령에 이어 양주목사, 부평부사를 지냈으며 1622년 수 년 동안 입시수침한 공으로 남양부사에 특제되었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과 <동의문견방>이 있다.
70. 허임극許任克
?~1796년(정조20). 조선 후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인수仁叟이며 수군절도사 정의 손자이자 성의 아들이다. 조현명의 추천으로 선전관에 오른 뒤 1770년(영조46) 영종진방어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여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로부터 그 청덕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환곡미를 남김없이 지급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776년 다시 기용되어 정주목사로 있을 때 흉년을 당하였는데 “내가 차라리 조정에 죄를 지을지언정 차마 죽어가는 백성들을 볼 수 없다”며 환곡을 모조리 풀어 구제한 까닭에 다시 파직당하였다. 그뒤 김해부사, 장단부사, 나주토포사, 전라좌수사, 내금위장 등을 역임한 뒤 1789년(정조13) 신설된 장진부를 맡아 개척사업에 공을 세웠다. 이후 회령부사, 함경도남병사를 지낸 다음 1795년 금위중군,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있다가 이듬해 병사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백성을 애호함이 두텁고 죄인을 다룸에 있어서 함부로 하는 예가 없어 주민들로부터 허불이라 불렸으며, 40여 년 관직에 있었지만 재물에 뜻이 없어 죽은 뒤 상을 치루기 어려울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538 제4편 수로왕의 후손
71. 허자許磁
1496년(연산근2)~1551년(명종6). 자는 남중南仲며 본은 공암이다. 1516년(중종11) 김만균 방하(김만균이 장원급제한 방목 아래)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519년 현량과가 설치되자 공이 재주와 행의로 선발되었는데 이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1523년(중종18) 봄에 알성문과 신영 방하에 병과고 급제하여 옥당(홍문관)에 선입되고 사가를 받아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이때 지은 <동호시권>이 있다. 사명을 받들어 두 차례 영남으로 나갔는데 한 번은 암행어사로서 군읍을 염문하는 것이었고 한 번은 안핵사로서 전답의 재해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김안로가 권신으로 국사를 보게되자 공은 이조정랑에서 양근군수로 출보되고 뒤에 통정대부로 올라 다시 활주로 출보되어 나갔다. 소윤과 대윤의 간극이 벌어져 조정이 은근히 근심하고 있을 때 중종 임금이 공을 예조참판에 임명했다가 판서로 특배하였다.
1645년 인종의 병이 위독할 때 윤임이 대신과 더불어 몰래 어진 이를 내세워 왕제인 경원대군 명종을 제치고 왕위를 잇게 할 모의를 하다 실패하여 관련된 자들에게 사약을 내리고 옥사가 크게 일어난 일이 있었다. 공은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윤임이 오래도록 행해온 형적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논공행상을 함에 이르러서는 내가 심히 부끄럽다”하고 죄인의 처자식을 모두 노비로 삼아 공신들에게 나누어 하사한 것을 공은 모두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한 번도 스스로를 공신으로 자처하지 않으면서 언제든지 직간하는 일이 잦으니 상께서 자못 불쾌히 여겨 판중추부사의 한직을 주고서 4년이 지나자 다시는 임용치 않았다.
민제인이 일찍이 을사사화로 원통하게 굽혀진 일을 힘써 바로잡고자 하다가 역적으로 지목되어 공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우 제영이 이조판서인 공의 인사행정으로 당진군수로 가게 되었다. 이를 본 이기李芑는 심히 노하여 공이 죄인 민제인, 송순과 더불어 사악한 의논을 하여 역모의 죄를 저질렀다고 하고, 민제영을 당진으로 보낸 일까지 끌어다가 죄안을 만들어 공을 함경도 홍원에 부처하였다.
1550년 이기는 수상이 된지 15일에 재상을 유배하고 쫓아내니 공과 이준경, 민제인, 송순, 이윤경, 구수담 같이 당시 사람들로부터 중망 받던 이들이 모두 이기로부터 축출 당했다. 구수담이 사약을 받고 죽으니 공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차에, 하루는 이기가 이른 아침 조당에서 폭사하고 말았다. 그 옷소매 안에 참서
제2장 허씨 539
가 들어 있는지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의 재앙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3월 14일 공이 홍원에서 졸하니 1551년이요 춘추 56세이다. 곧 연상(한강 위쪽)으로 모셔와 안장하였다. 그해 겨울에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공이 죄 없음을 말하자 상께서 감오하여 삭탁했던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평소 깊게 사귀던 김현경으로 하여금 내릴 제문을 짓게 하였다.
72. 허잠許潛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경량景亮, 호는 한천寒泉이다. 품행이 바르고 어질어 천거에 의하여 관직에 나가기 시작하여 1587년(선조20) 선공감봉사가 되고 1595년 성주목사를 거쳐 1597년에는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 다시 외직으로 나가 중화부사, 성천부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생활이 검소하고 처사가 공정하여 모두가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1605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73. 허장생許長生
?~1645년(인조23). 자는 수백壽伯이고 양천인이다. 정사가 혼미한 때를 난나 김효성 등과 함께 상소하여 모후(광해군 계모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것이 부당하다 항거하고 죄를 청하니 사악한 의론을 창도하는 죄로 좌죄되었다. 이로써 낙척되니 공 또한 세상에 뜻이 없었다. 1623년에 반정에 이르러 식자들이 입을 번갈아 드날려가며 추천하니 광릉참봉을 배수받고 1628년(인조6)에 빙고별제를 개배 하였으나 공은 이미 풍질에 걸려 관직을 맡지 못했다. 그렇게 18년을 쌓다가 1645년(인조23) 7월에 졸하였다.
74. 허재許載
1062년에 태어나 1144년에 돌아가셨다. 고려 인종 때 중신이다. 말단관리로 출발하여 청주방어관으로 공을 쌓으셨고 청렴결백키로 유명하였다. 예종4년 구성전에서 종군록사로서 길주성을 수개월간 지켜냈다. 그 뒤 감찰어사가 되시고 예종12년에는 상서예부시랑으로 동북면병마부사가 되신 것을 비롯해 오랫동안 병마
540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사로서 여진족 실태를 파악하고 수비대책을 왕에게 상주하는 일을 해왔다.
75. 허쟁許崝
1573년에 태어나 1662년에 돌아가셨다. 인조 임금 때 무장으로 양천이이다. 말타기에 능하셨고 조방장 첨주를 지내셨다. 정묘호란 때 인조임금을 강화도에 모시고 가셨으며 1634년 인동도호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내승 겸 선전관으로 인조임금을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셨다. 그 공으로 이듬해 동추가 되셨다. 1641년 모친상을 당해 3년간 묘를 지킨 뒤 시골에서 정양하시다가 80세에 자헌대부, 90세에 정헌대부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76. 허저許羝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의관이다. 내의원 주부, 판관 등을 역임했고 궁내에서 진료와 방역에 공로가 많았다. 1493년(성종24) 내의원 주부로 <의방요록> 3권을 찬진, 내의원에서 이를 교정하고 간행했다.
77. 허적許樀
1563년(명종18)~1641년(인조19).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이며 참봉 방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9년 북청판관으로 있다가 형장을 남용한 죄로 사헌부 탄핵을 받아 체직되고, 1602년 예조좌랑에 제직되었다. 1605년 경기좌도경차관을 지냈으나 답험의 부정으로 다시 체직되었다가 곧 영천군수를 제수 받고,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6) 호조좌랑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복직되었다. 1626년(인조4) 성균관사예로 재직 중 조정의 예의를 지키지 한고 제례를 그릇되게 시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1628년 유효립의 모반사건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에 녹훈 되고 양릉군에 봉해졌다. 이후 판서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수색집> 8권 4책이 있다.
제2장 허씨 541
78. 허적許積
1610년(광해군2)에 태어났으며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黙齋이고 양천인이다. 1637년(인조15) 문과에 급제했고 경상도와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668년(헌종8) 우의정이 되었다. 숙종 때는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공은 허목과 더불어 남인의 영수로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1680년(숙종6) 서자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파직당하고 결국 사사되고 말았다. 공은 경상도 관찰하로 있을 때 수로왕릉비음기를 짓고 왕릉을 크게 보수 하였다.
79. 허전許佺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이다. 1361년(공민왕10) 성균관대사성으로 국자감시를 주관하였으며 1365년 전법판서가 되었다. 이후 황상의 애첩과 사통하여 풍기를 문란하게 하여 이수산을 비롯한 당대 제신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80. 허전許傳
자는 이노而老. 호는 성재性齋. 1797년(정조21) 서울 출신으로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셨다. 관향은 양천이고 정언을 지낸 허형의 아들이다. 1875년(헌종1) 별시에 급제한 뒤 전적, 지평, 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함평현감, 홍문관 교리, 수찬을 지냈으며 고종1년 김해부사가 되었다. 고종15년 이조판서로 계실 때 납릉에 능감을 두고 전을 짓게 하고 전호를 내려줄 것을 상소하여 숭선전호崇善殿號를 사액받게 하였다. 90세인 1886년(고종23) 숭록대부에 올라 판돈녕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돌아가셨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81. 허정許珽
1621년(광해군13)~? 조선 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중옥仲玉, 호는 송호松湖이며 예조참판 계의 아들이다. 참봉으로 1651년(효종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현종 때 성천부사를 거쳐 승지와 부윤을 역임하였다.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창군 정과 복평군 연의 궁녀와 관계되는 옥사가 있었을 때, 그 사건의 전말을
542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청풍부원군 김우명에게 알려주어 김우명으로 하여금 차자를 올려서 복창군과 복평군의 죄를 논핵하게 한 협객이기도 하다. 시조작품 약간이 전해지며, 특히 창곡에 뛰어났다.
82. 허조許稠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庵. 본은 하양. 권근에게 수학하여 공부하셨다. 고려 공양왕 경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셨고 조선에서는 봉상시승이 되었다. 태종이 임금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공의 언사가 임금 뜻에 거슬려 중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언론이 명백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는 태도에 왕이 갸륵히 여겼다. 태종이 세자들한테 조는 나라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신하인, 주석지신柱石之臣이라고 하였다. 공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죄인에게 연좌법을 적용하는 제도롤 없애도록 주청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나이 70이 넘어 병석에 누워계셨을 때 태종이 친히 의원을 보내서 병을 치료케 했으나 이를 반대하며 “내가 태평한 세월에 나고, 또 태평한 세월에 자라 나이 칠순에 수상이 되어 지성껏 나랏일을 보다가 이렇게 태평한 세월에 죽은 들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하셨다. 세상이 조선시대 현명한 재상으로 황희와 더불어 공을 꼽았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83. 허종許棕
?~1345년(충목왕1). 고려 말기 의관이다. 본관은 양천, 검교정승 평의 아들이다. 충렬왕에 의하여 궁중에서 자라 충선왕 딸 수춘옹주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부귀한 곳에서 자랐으므로 예를 잘 지키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충렬왕 때 수사공을 지내고 왕명으로 3년 간 원나라에 가 있었다. 충선왕 때 수사도로 정안군에 봉해지고 뒤에 다시 원나라로 갔다가 어버이가 서거하자 돌아와 이때부터 은거하며 의술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를 입조하게 하니, 이때에 충선왕이 연도에서 돌아와 정안부원군에 봉해졌고 또 충혜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5년 동안 머물다가 충목왕1년에 옹주가 죽으니 슬픔이 지나쳐 병들어 운명하였다.
제2장 허씨 543
84. 허종許琮
양천인이며 키가 11척 5촌이나 되고 비범한 풍채에 활쏘기에 뛰어나셨다. 문무를 고루 갖추어 장수와 재상을 겸임한 명신이다. 성종 신해년 도원수로 야인들을 정벌하셨고 세조 때는 이시애의 난을 길주에서 평정하셨고 예종 때는 장영기의 난을 다스렸다. 벼슬이 병조, 호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양천부원군에 봉해지셨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묘는 장단에 있다.
김정국이 지은 <사재무언>을 보면 충정공 허종은 어릴 때부터 기이하고 헌칠한 게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12,3세가 되었을 때 여러 아이들과 절에 가서 글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 옷과 신을 모조리 훔쳐갔다. 이튿날 다른 아이들은 두려워 모두 흩어졌는데 허종 홀로 꿈쩍도 않은 채 베개를 높이 돋우고 붓으로 벽에 글을 썼다. “이미 내 옷을 훔쳤거든 내 신은 훔치지 말았어야 했거늘 신마저 훔쳤으니 도 선생을 위해 몹시 안된 일이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공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85. 허주許周
1359년(공민왕8)~1440년(세종22).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다. 본관은 하양. 자는 백방伯方, 백공伯公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누천하여 전법정랑이 되고, 1385년(우왕11)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1388년 지안성군사와 장령을 거쳐 1390년 공부총랑이 되어 경기우도 염문퇴계정사가 되어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에 참가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재부경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인척들이 조선 건국기에 고위관을 점유함으로써 조선 거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6) 사헌중승을 겸직하고, 이해에 노비변정도감도청사가 되어 노비 소유에 대한 소송사건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1399년(정종1) 노비변정도감이 폐지되자 판사수감사, 지형조사를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1) 판전농시사로서 경상도안렴출척사가 되었으나 새로 개간된 토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이듬해 양주에 유배되었다.
1405년 형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호조좌참의 판홍주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1409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참지의정부사, 한성부윤,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6년 개성유후사유후가 되고, 1418년(세종
544 제4편 수로왕의 후손
1) 판한성부사로 재직 중 병으로 사퇴하였다. 시호는 간숙簡肅이다.
86. 허주許宙
?~1621년(광해군13). 본관은 공암(양천)이요 자는 원경遠卿이다. 증조부 초당공 엽을 좇아 배우니 초당공이 더욱 사랑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최복(거친 삼베 상복)과 예도를 다하니 사람들이 그 복상을 잘했다고 일컬었다. 사마시에 입격하여 태학(성균관)에 들어가고 금오랑(의금부 도사)에 보임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장흥고직장으로 옮겼는데 이때 두 조사(중국 황제의 사신)가 앞뒤로 이어오는 일을 만나 공급하고 살피는 일이 매우 번다했으나 공이 능히 가르고 베어내듯 가닥과 실마리를 여일하게 풀어서 처리했다.
명성과 공적이 잘 알려져 전중감찰(사헌부 감찰)로 승진하고 이어서 문의현령으로 나갔다. 이때 문의는 고을이 자갈투성이 척박한 땅으로 잠시 개간했다가는 도로 쑥대밭이 되기를 거듭하여 공사 간에 모든 곳간이 바닥 나 있었다. 공이 이르자 곧 거친 풀밭으로 묵은 전토를 개벽하여 깨끗이 하고 백성들 고통을 밝게 일소하면서 간명하고 인자하게 용서함으로 직임을 다하였다. 마침 방백(관찰사)이 순렴하는 길이라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길을 막고 공을 칭송하고 예찬하였다. 이 일을 조정에 계문하게 되자 품계가 승진되는 임금의 특지가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 최복을 불사하고 예제를 다하느라 날로 수척해지더니 1621년에 여막에서 세상을 버리니 향년 59세였다.
87. 허준許浚
태어난 해는 분명치 않고 1615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청원淸源이며 양천인이다. 선조 때 내의원 의관으로서 의술에 정통하셨다. 임진왜란 때 어의로서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녹훈되시고 양평군에 봉해졌다. 숭록대부에 까지 오르셨으나 대간들이 반대하여 숭록대부 벼슬은 취소되었다.
병신년에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쓸 수 있는 의서를 편찬하게 되니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례 등이 함께 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모두 흩어지고 오로지 공만이 홀로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다. 1610년(광해군2)에 완성하고 1613년(광해군5)에 간행한 <동의보감>은 총25권 25책
제2장 허씨 545
으로 금속활자로 발행하였다. 총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잡병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과 목록 2편으로 구성되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서적이다.
88. 허진許晉
1536년(중종31)~? 조선 중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경소景所, 호는 서교西橋 침의 4대손으로 현의 아들이다.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66년(명종21)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었으나 병으로 물러나 여주목사로 나갔다. 그러나 동래부사시에 사정이 있었다 하여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4년 동지사로 중국에 들어가서 왜적의 동태를 알리고 아울러 군수품의 무역을 바라는 정문을 올려 귀국 시에 많은 무기를 교역하고 돌아왔다. 1604년(선조37) 한성부좌윤을 거쳐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8) 81세로 품계가 자헌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이해 기로소에 들어갔다.
89. 허징
1614년(광해군6)~? 조선시대 화가이다. 자는 자수子秀이고, 호는 은사隱士이며 양천이 본관이다. 전한 봉의 손자이다. 1639년(인조17)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현령에서 그쳤다. 화가 매창 조지운과 동시대 인물로 서로 친분이 두터웠으며 매화와 난초를 잘 그려 이름을 날렸다.
90. 허친
1583년(선조16)~1625년(인조3). 자는 종지宗之며 본관은 양천이다. 부친 봉은 홍문관 전한이고, 모친 종실 이씨는 창수 우반의 딸인데 1583년 12월 26일에 공이 태어났다. 1606년(선조39) 가을 방에 생원을 하고 1615년(광해군7)에 알성문과 제4인으로 급제했으나 시의에 거슬러 벼슬을 못하고 이듬해에 이르러서야 성환도찰방을 초수하였는데 1618년(무오)에 옥사가 일어나 일문이 화를 입게 되어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사천은 남해 궁벽진 곳이라 서울서 천리나 떨어져있는데도 모부인 연세가 높아 차
546 제4편 수로왕의 후손
마 떨어질 수 없어 적소를 같이 따라가서는 4년 만에 몰했다. 2년 뒤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여러 죄수를 풀어줌에 따라 마침내 공도 석방되어 성주에서 객지살이를 하게 되었다. 공은 모친 복상을 마치자 성균관 박사로 제수되었는데 이때 공은 질환이 심하여 명에 배사하고 곧 돌아왔다. 그 해에 다시 북도병마평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으니 1625년 정월 19일이며 나이는 43세였다.
91. 허침許琛
1444년(세종26)~1505년(연산군11). 조선 전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頤軒이다. 1462년(세조8)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5년(성종6)에 참봉으로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감찰이 되었다. 1476년 채수 등과 함께 사가독서문신에 뽑혀 장의사 등에서 독서를 하였으며 이후 전적, 부수찬,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478년 지평이 되고 이후 병조정랑,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482년 진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필선이 되어 세자의 그릇됨을 깨우치기에 노력하였다. 1488년 보덕이 되었다가 곧 홍문관직제학 겸 예문관응교로 옮겼고 이듬해 <삼강행실>을 산정하였다. 1490년 동부승지로 초수되었으며 같은 해 좌부승지, 우승지를 거쳤다. 이듬해 좌승지가 되고 14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93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곧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고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98년(연산군4)까지 병조참판, 경연특진관, 실록청당상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김일손의 사초사건에 연루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경상도관찰사, 1499년 동지중추부사로서 동지춘관사가 되어 영춘추관사 신승선 등과 함께 <성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500년 호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다. 1502년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참찬으로 옮겼다. 1504년 우의정에 발탁되고 그해 연산군 생모 윤비폐출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처벌되었지만 공은 당시 할머니 상으로 불참하였기에 화를 면하고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별세했다. 성종 조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92. 허필許佖
1709년(숙종35)~1761년(영조37). 조선 후기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본관은 양
제2장 허씨 547
천. 자는 여정汝正, 호는 연객煙客, 초선草禪, 구도舊濤이며 지평 열의 증손이다. 1735년(영조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에 전념하여 당시에 삼절로 불리었다. 이용휴가 쓴 허필의 지명에는 청빈하고 소탈한 성격과 문학과 고예술품을 사랑하는 태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서체에 능통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산수와 영모 등의 그림을 그렸으며 산수화는 명대 심주의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몇 폭의 그림들은 명대 오파 또는 미가 산수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남종화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선사창수록>과 <연객유고>가 있다.
93. 허한許澣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서화가로 자는 호부浩夫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1528년(중종23)에 사마시를 하여 진사가 되었고 벼슬은 봉사에 그쳤다. 그림과 시에 둘 다 능했는데 그림은 특히 호랑이 그림이 뛰어나고 시는 당나라 시의 운격에 잘 맞았다.
94. 허항許恒
1568년(선조1)~?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이며 별좌 사익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상서원직장으로 인목대비의 폐출을 겪었다. 1620년 사서를 거쳐 문학이 되고,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옥천군수로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한때 등극사 권반의 서장관이 되었고 이듬해 가례도감의 상례를 지내고 벼슬이 올라 좌승지가 되었다. 직언으로 왕의 비위를 거슬러 청송부사로 좌천되었다.
95. 허항許沆
?~1812년(순조12). 조선 후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원숙元叔이며 첨사 수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담용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말달리기와 칼쓰기를 좋아했다. 27세에 무과에 응시하였는데 과규에는 합격하였으나 방에는 누락되어 방을 알리던 날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궁중에 뛰어들갔다
548 제4편 수로왕의 후손
가 위사에게 붙잡혀 전옥에 갇혔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큰소리로 억울함을 합외에서 호소하니 그 소리가 왕이 거처하는 대내까지 들려 왕이 그에게 까닭을 묻고는 그 기백이 장하다하여 급제를 내리고 중장장을 제수하였다. 1811년(순조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거우 중임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나 토벌에 앞장섰다. 이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우림장에 임명되었으나 전사하였다. 전공으로 통제사에 추증되었으며 정려되고 정주 표절사에 배향되었다.
96. 허항許沆
?~1537년(중종32).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청중淸仲이다. 부사 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수조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524년(중종19) 별시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였다. 1531년 정언이 되고 그 뒤 부교리, 지평, 사인, 부응교, 전한, 부제학, 동부승지를 거쳐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김안로가 재집권하자 채무택과 함께 김안로를 도와 반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농단하였다. 성품이 간활하고 음흉하여 간신 김안로 일당이 되어 옥사를 함부로 일으키고 무고한 사림을
반역죄로 몰아 죽였으므로 사람들이 김안로,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이라 불렀다. 김안로가 물러나자 사사되었다.
97. 허협許悏
1630년(인조8)~1680년(숙종6).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유중惟仲 사헌부 감찰을 지낸 제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3년) 생원하여(이 부분 이후 원문에 이상이 있는 듯함)피례한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을 쏟았다. 1668년(현종9)에 문과에 올라 괴원(승문원)에 선입되었다. 1669년에 도원찰방을 배하고 1672년(현종12) 의금부 도사로 승진했다가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로 전직하였다. 1672년에 예조좌랑으로 춘추관 직임을 겸했다가 당진현감으로 나갔다.
1675년(현종15)에 파직되어 돌아와서는 오랫동안 조용되지 못하더니 문겸(문관으로서 무관직인 선전관이 되는 것)에 제수되었다. 그 뒤 종묘서령으로 옮겼다가 다시 나가 신령현감이 되었다. 벼슬을 1랑 올려 정랑으로서 장차 대간의 직임을 맡을 지 의논되고 있을 때 질환을 얻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신령과 당진 양 고을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재무를 내어 조문했다. 공은 1680년(숙종6) 10월 26일에 졸하니 춘추 51세였다.
제2장 허씨 549
98. 허형손許亨孫
1427년(세종9)~1477년(성종8). 조선 초기 무신이다. 본관은 양천이고 시호는 양안襄安이다. 1453년(단종1)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사가 되었으며 1455년(세조1) 오위행사정으로서 원종공신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무과중시에 급제하고 지훈련원사 겸 선전관이 되고, 1459년 첨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같은 해 지병조사를 겸대하고 1460년 신숙주를 도원수로 하여 모련위 야인을 정벌할 때 위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463년 의주목사 재직 중에 의금부 상계로 평안도 창성군에 충군되었다가 1466년 사면되고 같은 해 무과 등준시에 급제하였다. 1467년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친정이 논의되면서 사자위장에 임명되고 다음해 전라도병마절도사로 파견되었다. 1472년(성종3)에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행첨지중추부사, 1475년경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서거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고 세조의 신임을 받으면서 병정에 기여하였다.
99. 허홍인許弘仁
?~1613년(광해군5). 조선 중기 강변칠우의 한 사람이다. 당대 고관의 서자로서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으나, 신분 상 제약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현실을 비판하고 1600년(광해군1) 같은 서자 출신인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박치의, 박종인, 유인발 등과 함께 여주 북한강 가에서 살면서 강변칠우라 자처하였다.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고 생활이 사치스러워 행적을 의심받던 중 1613년 문경새재에서 행상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 범인으로 다른 일당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대북파 사주를 받고 박응서가 김제남과 밀통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조달 목적으로 도적질을 하였다고 허위 자백하여 계축옥사를 불러온다. 그 결과 김제남은 바로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유배당하였으며 이들도 모두 처형당했다.
100. 허홍재許洪材
?~1170년(의종24). 고려시대 문신이다. 1134년(인종12) 5월에 참지정사 임원
550 제4편 수로왕의 후손
애가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 의종 초에는 좌정언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1164년 좌승선으로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 좌간의대부가 되었으며 1169년에는 증서시랑평장사판상서이부사로 승진되고 다음해에 지문하성사가 되었다. 문장을 잘하여 한뢰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얻어 연회 때마다 왕을 배행하여 무인들의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1170년 무신난 때 살해되었다.
101. 허후許詡
하양인이며 영의정 조의 아들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좌찬성 대제학에 이르렀다.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셨고 세조의 계유정란을 반대하여 김종서, 황보인의 무죄를 주장하여 거제도에 유배되고 교살당하셨다. 사약을 받아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으며 세조는 공을 사육신에 합쳐서 사칠신死七臣이라 하였다. 영조 때 원통함을 풀고 복직되셨다.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102. 허후許厚
1588년(선조21)~1661년(현종2). 선생의 자는 중경重卿이며 본관은 공암(양천)이다. 1633년 사도시 주부를 거쳐 지평현감이 되었는데 지평에는 내노(궁중의 노비)가 있어 기세를 부리면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이 10년이 넘었어도 군현의 말단으로서 꾸짖을 길조차 없었다. 선생이 그 금법을 어긴 것 10여 가지를 하나하나 들어 법으로 처단하니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고 논죄되어 계옥된 채 겨울을 지냈는데 이듬해 여름에 고을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 궐문 앞을 지키며 원통함을 송소하고 마침 천기가 가물어 원옥이 풀림에 따라 석방되었다.
1637년(인조15)에 태묘령(종묘서령)이 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잠시 후 의성현령을 배하였다. 의성은 큰 고을인데다가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호가 났는데 고사를 물어 폐정을 닦고 조약을 엄히 하여 호강한 자들을 금압함으로써 그 어김이 굳세어서 영을 좇지 않는 무리를 통솔하니 우족(문벌 귀족)이 많이 즐거워않더니 4년만에 파직되어 거창에 우거하며 편히 지냈다.
1643년(인조21) 동궁익위가 되어 세자를 북행해 보내고 세자가 환국하자 위솔이
제2장 허씨 551
되었다가 뒤에 형조와 호조 좌랑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51년(효종2)에 형조정랑이 되어 인조의 담사를 당해낸 뒤 돌아가 사직하고 곧 돌아왔다가 겨울에 원주 관설에 돌아가서 지냈는데 나중에 관설을 호로 삼았다.
1654년(효종5)에 공작소정(선공감부정)이 되었다가 곧 사헌부지평을 특배하니 상소를 올려 사퇴하자 상께서 가로되, “굳세고 모나며 정직하다는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조정이 쓰지 않았는지라 내가 특히 써서...”라고 한 바 있었다. 1658년 상례를 배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회양도호부사를 배하고 취임치 않았으며 여름에 다시 장령이 되었으나 용사자가 꺼리는 바 되어 파직되었다. 겨울에 안동대호부사를 배했으나 또 부임치 않고 이듬해 상방정(상의정)이 되어도 나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1) 12월에 선생이 질환으로 누웠는데 다음 달에 종제가 죽자 병석에 극진히 애통하며 곡하더니 질환이 더욱 위독해져 2월10일 선생이 몰하니 나이 74세였다.
103. 허훈許薰
1836년(헌종2)~1907년. 조선말기 학자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으로 경북 선산군 임은(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참찬 조이다. 29세에 허전의 집지문인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안정복-황덕길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의병 군수인 허위가 아우인데 허위의 손자들은 모스크바에 진, 타시겐트에 선산 등이 거주하고 있다. 허훈의 성리설에 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심설>과 <사칠관견>이며 실학과 유관한 것은 <염설><포설><차설><패수설><해조설> 등이 있다. 그는 <사칠관견>과 <심설>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이황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하였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하고 계승하였다.
104. 허휘許徽
자는 위지衛之. 양천인이다. 병자년에 광주목사가 되셨다. 그때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조정에서 물리치고 거리의 소년들까지 기와와 돌을 던지며 이 사신을 쫓아냈다. 공이 깊이 걱정하시며 “저쪽은 강하고 우리는 약한데 우리가 화를 부르는구나! 1년이 되지 않아 반드시 청국이 쳐들어 올 것이다. 남한南漢이 왕성을 가리는 앞가림이로다” 하시며 식량을 비축하고 허물어진 성을 증축하시어 뒷날을 준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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