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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30일 주일
[(녹) 연중 제22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 말씀에 충실한 참제자로서 주님 마음에 드는 것만을 찾읍시다.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릅시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꾐에 넘어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을 받는다며,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예고를 반박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수난과 박해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거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걱정하고 경외하는 마음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나면 그분께 모든 것을 걸었던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살아 계셔야 그분의 제자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텐데 더 이상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일’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였기에, ‘그리스도’라는 호칭도 베드로에게는 반쪽짜리 호칭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우리도 미사나 기도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관계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인간적 바람을 이루어 달라는 목적으로만 ‘그리스도’를 부르기보다, ‘그리스도’를 부를 때마다 구원의 희망이 가까이 있음을 체험하면 좋겠습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순식간에 천상에서 나락으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름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께서 공개석상에서 스승님으로부터 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로서 자부심이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도 한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수제자로서의 우쭐함, 기고만장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 기를 쓰고 높이 올라가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보란 듯이 깊은 바닥 체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치욕적인 곤두박질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참 교육은 그 강도가 아주 강렬했습니다. 애지중지하는 사랑하는 제자들, 그 제자들 가운데서도 으뜸 제자인 수제자 베드로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꽤 지나친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주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그런 극단적 용어까지 사용하시면서 경고를 주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종종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 그리도 굳건히 서 있었는데, 오늘 속절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제 살아있는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오늘은 영락없는 마귀로 둔갑해있습니다. 어제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소리, 결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베드로! 최고야, 에이스야, 넘버원이야!‘ 라는 소리 간절히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열망과는 달리 스승님으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사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에서 사탄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서 하느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일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영적인 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 더 큰 가치, 공동선을 위한 일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저 삼시 세끼 먹고 즐기는 일만 남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밖의 현실과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자기 한몸 챙기기에 빠쁘게 될 때, 우리 역시 사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봉사자들이 본래 종의 모습을 망각하고 사심으로 가득한 형국으로, ‘내가 원장이야, 내가 시설장이야’라고 외칠 때, 우리는 영락없는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내 얼굴만, 내 이름만, 내 명함만 크게 드러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 포도주이신 주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 새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 유연성과 탄력성을 거부한 채, 경직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고수하려는 모습, 어쩌면 이 시대 또 다른 사탄의 모습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일주일은 알래스카에서 지냈고, 남은 일정은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알래스카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았습니다. 알래스카에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옥외 광고판이 없다고 합니다. 광고판을 설치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시민들은 그 이익을 포기하였습니다. 알래스카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광고판 대신 산과 바다와 숲,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더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사람의 일에 머물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다음 세대와 나누려는 마음은 하느님의 일과 닿아 있습니다.
최근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 지역에서는 거대한 빙하가 무너지면서 참혹한 홍수가 발생하였습니다. 초기 조사에 따르면 높은 산에 있던 거대한 얼음과 바위가 약 1.2킬로미터 아래로 떨어졌고, 강물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물과 진흙과 바위가 마을을 덮쳤다고 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지구의 기온 상승으로 빙하가 녹고 동토층이 약해지면서 고산 지대가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알래스카의 광고판 없는 길과 네팔·티베트의 빙하 홍수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선물로 돌보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있는가?”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만이 발전은 아닙니다. 때로는 멈추고, 절제하고, 포기하고, 지켜 주는 것이 더 큰 발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창조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이며, 우리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한국에 가면 제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비봉 추모관입니다. 타국에서 지내다가 돌아왔으니,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연도를 바치고 형님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마음이 따뜻한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숙소를 예약해 주고 운전해 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30일 피정을 함께했던 신부님들도 만났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부님들은 신학교와 교구청에서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따뜻하게 맞아 주는 ME 봉사자들도 만났습니다. 뉴욕에서 함께 코로나의 거센 파도를 넘었던 신부님들도 만났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뎠기에 그 만남은 더욱 반가웠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마음, 오래된 우정을 지켜 가는 충실함, 아픈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는 감사 안에 하느님의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까지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조롱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고 더 이상 예언자의 길을 걷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과 뼛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머리로 알고 있는 교리나 필요할 때 찾는 위로에 머문다면 세상의 바람이 불 때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른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고 더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으며, 세상의 기준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돌보는 일도, 이웃의 아픔에 함께하는 일도,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도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스승이 고통받고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아는 고통을 피하고 힘으로 승리하며 영광을 차지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은 손해를 피하고 나에게 편하고 유리한 것을 먼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아파할 때 외면하지 않고 곁에 머무는 것이며, 상처가 있어도 용서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을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마십시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익보다 사랑을, 경쟁보다 나눔을, 성공보다 충실함을, 편안함보다 진실함을 선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면 좋겠습니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사람의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창조된 세상과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충실히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느님께서
몸소 기꺼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어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나뉠 수 있겠냐마는
어쩌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갈라져 다투는가
서로 사랑함이
하느님의 일이니
서로 사랑함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사랑할 이 미워할 이
제멋대로 갈라놓고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정성껏 품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정성껏 품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좋으면 품고
싫으면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오롯한 섬김이
하느님의 일이니
오롯한 섬김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섬기지 못할망정
섬김 받음에 게걸들려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아낌없이 내어줌이
하느님의 일이니
아낌없이 내어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어주기는커녕
빼앗지 못해 안달 나서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더불어 삶이
하느님의 일이니
더불어 삶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 편 살리고
네 편 죽여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살리기 위한 죽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살리기 위한 죽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살리기 위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그러니 사람아 우리
하느님의 일이어야 할 사람의 일을
사람의 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신명나게 해보지 않으려나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유간(Jane Jugan)
신분 : 설립자
활동연도 : 1792-1879년
같은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주강, 쥬강,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브티트 크로와에서 1792년 10월 25일 태어난 성녀 요안나 유간(Joanna Jugan, 잔 주강)은 어린 나이에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가 실종된 후 다른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일찍 가난과 고된 노동을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저택의 부엌일을 돕는 하녀로 시작하여 생-세르방의 로제 병원에서 간호사로, 가정부로 때로는 간병인으로 일을 하였다. 한 젊은 어부의 구혼을 받았을 때 그녀는 “하느님께서 저를 원하십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어떤 사업, 알려지지 않은 그 사업을 위해 저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며 그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 후 그녀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 특히 가장 불쌍하고 헐벗은 이들을 섬기고자 결심하였다. 그래서 25세에 탄복하올 어머니 3회에 입회하였다.
1839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된 수족을 못 쓰는 반신불수의 장님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보살핀 것이 계기가 되어, 1843년 그녀를 중심으로 세 명의 젊은 동반자와 합세하여 40여명의 노인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 젊은이들은 수도회의 기틀이 잡혀가는 이 작은 모임의 원장으로 잔 주강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녀는 부당하게 원장 자리에서 밀러났지만, 오로지 침묵과 온순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그녀는 잊혀졌고, 그녀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녀가 수도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수녀는 거의 없었다. 1879년 8월 29일 그녀가 사망한 후, 1902년에 이르러 그 동안 잊혀졌던 잔 주강 십자가의 마리아 수녀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경로 수녀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1982년 10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보노니오 (Bononius)
활동년도 : +1026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루체디오(Locedio)
같은 이름 : 보노니우스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향에서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승이 된 성 보노니우스(또는 보노니오)는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6월 1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에 복음을 선포한 후에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루체디오에서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성 피아크리오(Fiacrius)
활동년도 : +670년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지역 : 아일랜드(Ireland)
같은 이름 : 피아끄리오, 피아끄리우스, 피아커, 피아크라, 피아크르, 피아크리우스
성 피아크리우스(또는 피아크리오)는 7세기 학문의 보고였던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지식과 성덕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그가 찾은 거룩한 은둔의 삶을 깨뜨렸다. 그래서 프랑스로 피신한 그는 모(Meaux)의 주교 성 파로(Faro, 10월 28일)가 제공한 땅의 어느 샘물 근처 동굴에 은둔처를 세웠다.
성 피아크리우스는 주교에게 음식과 약초를 재배할 정원을 위한 땅을 요청했고, 성 파로 주교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땅을 제공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성 피아크리우스는 자신이 원하는 땅의 둘레를 돌면서 가래질을 했다.
그의 가래가 닿는 곳마다 나무들이 쓰러지고 수풀이 뿌리 채 뽑히고 땅이 다져졌다.
그 지방의 한 여인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주교는 그것을 기적으로 보았다.
이렇게 성 피아크리우스의 정원은 기적적으로 만들어졌고, 수세기 동안 치유를 얻고자 하는 이들의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정원사들의 수호성인이며, 그의 유해는 유럽의 여러 성당에 나눠져 모셔졌다.
그는 피아커(Fiacre, Fiaker) 또는 피아크라(Fiachra)로도 불린다.
성 펠릭스 (Felix)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펠리체
성 펠릭스와 성 아다욱투스(Adauct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후 오스티아(Ostia) 가도의 콤모디야(Commodilla)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855년경에 쓰여진 "아도 순교록"(Matryrologium Adonis)에 의하면, 로마의 사제인 성 펠릭스는 이교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들 받고 신전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가 기도를 하자 우상들의 신상이 떨어져 부서져 버렸고, 그로 인해 그는 곧장 처형장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압송될 때, 길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한 사람이 합류했는데 그 사람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에게 신자들은 '추가된 인물'이라는 의미의 '아다욱투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복녀 브로니슬라바 (Bronislava)
활동년도 : +1259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
크라쿠프(Krakow)의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8월 17일)의 사촌인 브로니슬라바는 사촌이 운명하는 날 성모님이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크라쿠프의 노르베르투스 수녀원에서 조용히 수도생활에 전념하였으나 관상생활과 독수생활에 대한 큰 열망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수녀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 수 있는 허가를 받고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하였다. 폴란드 전 주민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브로니슬라바에 대한 공경은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