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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3월7일 (녹)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수도회] 참된 단식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이사 58. 1 - 9ㄴ
† 복음 : 마태 9, 14 - 15
★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님의 목소리를 백성에게
전해 준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며, 굶주린
이들과 양식을 나누고, 헐벗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러할 때 의로움이 드러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지켜 줄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요한의 제자들이
묻자, 당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손님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교회가 권고하는 단식의 의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를 습관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오늘 들은 독서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단식의 진정한
뜻을 생각해 본다면 이 사순 시기를 충실히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서는 단식을, 이웃을 위하여 투신하는 의로움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계명으로서의 단식이 향하는
목적지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단식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에 물들어
가고 그 의로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하늘은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남겼습니다. 무릇
신앙인이라면 하늘을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상의 순례 여정에서
그 하늘을 자신의 마음에 감히 담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며, 그들이 담고자 하는
하늘은 다름 아닌 의로움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단식은 그 의로움이 자신의 마음에 자리하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식은 의로움을 가리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절제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며,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몫을 내어놓는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단식은 작은 발걸음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그 길을 모른 채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 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진심과 이웃을 염려하는 애덕에서 우러나온 단식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기꺼워하고 즐길 수 있도록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자리에서 단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에 맛 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순시기에는 내가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출 수 있도록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감기 환자들이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주위의 감기 환자들을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을 전하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지요. 이렇게 진실한 위로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지난달에 이번 감기로 엄청나게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감기로 인해 3일 정도는 정말로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고, 또 계속된 감기 증세로
한 달 넘게 고생했었지요. 온 뼈마디가 다 쑤시는 몸살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그리고 일상생활을 힘들게 하는 콧물 등 심하게 감기로 고생을 하다 보니 감기
걸린 사람들의 아픔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에 제가 감기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만 말했겠지요.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약 먹으나
안 먹으나 똑같다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기를 직접 체험하다보니,
“감기 걸렸어요? 요즘 감기 정말로 힘들어요. 얼른 병원가세요.”라는 말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가 체험해야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생각으로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나만 잘 되면 모든 것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남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을
굳이 경험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지요.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행동과 마음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을 강조하셨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기 사랑만 강조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단식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먹보요 술꾼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조상들의
전통인 단식을 실천하지 않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에서 실망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근본적인 의미를 지적하십니다. 단식이 단순히 자기
자신이 의롭고 열심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보다는 주님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한 수단,
또한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었을 때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하지만
주님이 기준이 되었을 때에는 나뿐이 아닌 이웃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이번 사순시기에는 내가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출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했으면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나 의지나 행운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즐거움이다(이유정).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 잘 지내도록 합시다.
이해와 사랑의 말을 합시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들을 향해 엄마가 꾸중을 합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제발 공부 좀 해라!”
그러자 아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합니다.
“엄마!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또 에디슨 보세요. 에디슨은 공부는
잘 못했지만, 훌륭한 발명가가 되었어요. 저도 제가 잘 하는 것을 할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아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그래. 너 말 잘 했다. 네가 도대체 잘 하는 것이 뭔데? 에디슨은 영어라도
잘했어.”
에디슨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으니 당연히 영어를 잘했겠지요.
말도 안 되는 이유, 사실 우리 주위에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주로 자기중심의 사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서로간의 소통을 가로 막는 단절의 말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을 주님께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기도를 하면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 남과 비교해서 왜 나만 미워하냐는 불평불만들,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달라는 갖은 욕심들. 주님과의 소통을 가로 막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단절의 말이 아닌,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해와 사랑의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하나 되어 참 행복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으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재의 수요일 다음 금요일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비만’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살이 찌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살이 찌는 체질이라고 합니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먹는 것들이 운동으로 소비되지 않기 때문에 살이 찔 것입니다. 운동은
하지만 워낙 과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운동을 하더라도 살이
찔 것입니다. 비만은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당뇨, 심장질환, 허리
디스크’ 등의 원인이 된다고도 합니다. ‘비만’인 분들에게 ‘다이어트’는 꼭 필요한
처방입니다. 가끔씩 다이어트를 통해서 엄청난 감량을 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영적으로 비만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식, 자선, 희생, 봉사를 통해서 영혼을
날씬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욕심, 시기, 질투, 미움,
분노로 넘치게 되면 영적인 비만이 됩니다. 영적인 비만이 계속되면 영혼 또한
병들게 됩니다. 영적인 비만은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영적인
비만은 세상을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게 만듭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영적인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見月望指”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 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의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차지할 자리에
대해서 서로 다툴 때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설명
하시면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비유의
말씀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참된 단식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참된 단식 -수행의 잣대는 사랑과 겸손-
오늘은 참된 단식을 통해 참된 수행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정확히 32년 전, 아빠스에게 들은 헛된 단식의 정곡을 찌른 촌철살인의
유머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아이스 크림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단식하며 먹는 형제들을 판단하고 스스로의 수행에 자만한다면 그런 단식은
주님 보기에 역겹고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단식하며 판단의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제가 수도공동생활하면서 원장으로 있는 동안 공적으로 함께 하는 단식
외에는 거의 한 적이 없습니다. 형제들에게 들어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공동체적으로, 또 주변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들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 하여 사순시기 특별 수행을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아빠스의 기도와 동의를 얻도록 합니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이 바치고자 하는 것을 자기 아빠스에게 알려서 그의
기도와 동의를 얻어 실행할 것이니, 영적 아버지의 허락 없이 하는 일은
주제넘은 짓이고 헛된 영광이라 여겨지며 아무런 공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규49,8-9).
자기도취의 허영과 교만에 바탕을 둔 수행을 경계한 말입니다.
사실 단식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일 뿐입니다.
굶주리고 허약한 자에게 단식은 무의미하며 먹어야 합니다.
하루 육체노동으로 일하여 먹고 사는 자에게 단식은 사치이며 비현실적입니다.
정작 단식이 필요한 자는 생각과 몸이 비만한 부요한 자들이며 이들은 단식의
비움을 통해 배고픈 형제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뿐 아니라 침묵도 가난도 마찬가지 상대적 가치입니다.
절대적 가치는 사랑 하나뿐입니다. 고독과 외로움 중에 살아가는 말이 굶주린
독거노인들은 말을 많이 할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이분들에게 침묵은 사치이며
비현실적입니다. 또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복지를 향상시켜 최소한의 인간 품위를 유지하며 살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예언자들은 고행의 금욕가도 수행자나 수도자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통해 참된 수행을, 참된 단식을 배웁니다.
사실 ‘예수님은 단식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셨으며 그렇다 하여
단식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예언자들처럼 그 의미의 상실을
나무라실 뿐이셨다. 단식은 본디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이다.’ (주석 성경; 신약 편61-62쪽).
단식은 예수님께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의 호전적 질문의 예봉을 지혜롭게
피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구원과 전혀 무관한 단식이요, 단식의 때가 오면 그때 단식할 것이며
지금은 제자들과 함께 축제의 삶을 즐기겠다는 현실주의자 예수님이십니다.
삶은 침울한 고행이 아니라 기쁨의 축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어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의 친구'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들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원하시는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
통쾌하고 명쾌하게 밝혀주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 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바로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단식입니다. 주님은
단식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랑의 실천이 빠진 허영과 교만의
헛된 단식을 비판하십니다. 이렇게 참된 단식의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빛은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우리의 상처는 곧바로 아물게 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우리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뒤를 지켜줍니다.
그때 우리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우리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십니다.’(이사58,8-9)..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된 단식의 정신을 일깨워
주시어 당신 앞에서 사랑과 겸손의 참된 수행자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복음의 단식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2014년 3월 7일) : 복음의 단식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 땅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힘들고 어렵고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단식도 복음의
단식입니다. 그냥 굶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고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 단식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밥을 굶은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미리 예언했습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굶더라도, 우리가 손해보더라도, 우리가 죽더라도, 복음의 정신과 사명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고통을 용감히 감내하는 것이 참다운 단식, 복음의 단식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를 주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 신뢰, 희망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단식의 목적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후 금요일
<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복음 : 마태오 9,14-15
< 단식의 목적 >
아씨시에 가면 ‘포르치운콜라’라고 하는 프란치스코가 움막을 짓고 살았던
자리에 있는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프란치스코가 욕정이
오를 때마다 뒹굴었다는 장미 밭이 있습니다. 그 장미 밭에서는 아직도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도 뒹굴어서 가시가 다 빠졌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보고 싶었던 여인은 걸어서 30분 거리의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글라라였는지도 모릅니다. 글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보고 싶었을
텐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자들에게, “여기에서 거기까지 길에
꽃이 피지 않으면 나는 그 곳에 가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정말 길 양옆에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글라라를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극기만을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디까지 절제해야 하는가?’라는 혼란이 올 때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워낙
극기의 삶을 사신 분이라 그분의 제자들은 당연히 육체를 절제하는 삶의
이로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가장
빠른 영적 진보의 방법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친
철사와 천 등을 감고 다니며 온갖 고행을 했습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된다고 예수님도 그러시고 바오로도 그렇게 말합니다.
육체가 배부르면 성령의 힘은 그만큼 숨이 막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신학생 때 유학 가서는 잠을 4시간 정도 자고 밥도 하루에 한 끼
먹고 고기도 안 먹고 물도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삼일 가까이 음식은 물론 물도
한 방울 안 마셔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는 20킬로가 덜 나갔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 자연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함께 놀아달라는 친구들도
조금은 귀찮아졌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도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힘이 드니 수업시간엔
졸려서 잠들기 일쑤였고 그래서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자신의 육체와 싸우는 사람이다.’라는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이기지 못하여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이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논문 지도교수와 다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아마도 오늘 복음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사실 단식의 좋은 점은 작고 겸손해지는 데 있습니다. 나의 나약함과 보잘 것
없음을 알고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느껴질 때 단식을 하고 겸손해
졌고 다시 감사하는 삶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때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아니 내 주위 모두가 나보다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식하여 겸손해지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을
키우는 단식을 했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기차를 탄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항상
행선지를 확인하고 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식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함께 있을 때 단식하는 것보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듯 극기의 목적은 겸손해짐과
더 깊고 넓은 친교가 우선 되어야지 극기 자체가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기도만 하는 수녀를 자꾸 성당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더 깊은 친교를
위함인데 기도만이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기도나 극기를 하면서 남을 판단하거나 혹은 사람이 귀찮아진다면 그것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타볼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함이 행복했지만
이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는 것은 에너지 낭비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면 항상 무엇을 지향하고 이 행위를 하는지를 잘 살펴야합니다.
겸손과 사랑과 친교의 목적이 아닌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의식보다 하느님을 아빠로 진실하게
2014년 가해 3월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 9,14-15
의식보다 하느님을 아빠로 진실하게
친구관계도 빈말, 장담, 약속하는 말보다 당장 우정실천이 있어야합니다.
간혹 남녀가 사랑하며 신경 써 이벤트를 벌리고 사랑한다고 야단들 합니다.
그래도 봐야지요. 얼마 못가서 또 삐끗해 지는 허약한 사람 많더군요.
효도로 부모님 잘 모시겠다고 남들에게 떠들기보다 지금 잘 모셔야 되지요.
하느님께 습관적 단식 같은 예절보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됩니다.
의식보다 하느님을 아빠로 진실하게 믿고 잘 모시며 사는 게 나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9,1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공감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복음적 공감이 만든 감정이라면, 그 감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3월7일 금요일 복음묵상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오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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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문화권의 나라들은 삶을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나누어서 표현했습니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입니다. 모두가 필요한 마음의 움직임들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만을 가지고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분노와 슬픔만을 가지고 살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우리네의 삶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세상, 혹은 분노와 슬픔만 있는 세상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네 가지의 감정을 갖고 살다가 갈 것입니다.
기호에 맞는 감정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외국 스님의 ‘화’라는 책이 몇 년 전에 여러 나라에서 읽혀져 화제가
된 것을 기억합니다. 화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와 방법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쓴 글을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결국 세상의 아픔과 부조리에는 거리를 두고
홀로 득도라도 하라는 소승적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노할 것에는 분명히 분노해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적인 것의 특징들 중의 하나는 공감입니다.
이 공감 안에서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해야만 합니다.
물론 여기서의 공감은 옳은 공감이어야만 합니다.
이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답다는 말을 듣습니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고,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느끼며, 즐거워해야 할 때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면, 이리도 당연한 일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감의 세계보다는 이질감의 세계에서 사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네 가지의 감정 안에서 삶을 사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기쁨을 표현하셨고, 성전을 장사 소굴로 만든
이들에게 분노를 보이셨으며,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순수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기쁨을 표현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서 곡을 한다면,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병든 가슴을 가진
사람입니다. 초상집에서 기뻐 춤을 춘다면,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병든 가슴을
가진 사람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의 위치는 희로애락의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이유로 그 자리에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느낌을 존중하는 것이 옳습니다.
옳은 이유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희망합니다.
(20130215)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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