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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민중의 소리 | 윤보중 기자 bj7804@nate.com"> |
6.15 공동수업을 하루 앞둔 18일 밤.
"교사는 아이의 내면을 사랑해야 합니다." 1999년 11월, 김 선생이 관촌중학교에 부임했다. 김대중 정부가 시국사범 미발령자 구제 차원에서 진행한 정책의 결과였다. 김 선생은 교사의 꿈을 접은 지 오래였지만, 누군가 국가를 상대로 시국사범에 대한 명예회복과 권리회복을 주장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김 선생은 1978년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얼마 안 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군부 통치가 종식되는 것 같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축을 이룬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이 쿠테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민주화 투쟁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구속되면서 19년간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전라북도 민주화운동협의회, 범민련 활동을 하면서 구속되기도 했지만, 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할 당시에도 이적표현물 판매 혐의로 기소되는 등 공안당국은 그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단 한 번도 거둔 적이 없었다. 1999년 김 선생이 교사의 길로 접어들 당시에 떠오른 것은 20년 전, 교사의 꿈을 안고 시작한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재학 당시의 소망이었다. “열정이라는 것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세상 살다 보니까 그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게 턱 하고 제게 온 거예요. 정말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는 부임 직전, 대학시절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당시 군사독재 치하에서 암울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교사가 갖추어야할 소양 등에 관해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이었다. “마흔이 다 된 늦깎이 교사가 얼마나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옛날에 보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았죠. 예를 들어, 교사와 학생간의 갈등을 풀어가는 내용의 책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 '아, 나도 이런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는 감동을 주었던 책들이죠. 교사와 학생 간에 오해가 풀리고, 서로 인내하며 사랑하고 감동하는 이야기들이죠. 나이 마흔에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쑥쓰럽기는 하지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의욕이 넘쳤죠.” 부임을 앞둔 며칠 전, 김 선생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는 그런 생각이었어요. 아이들을 내면 깊숙이 사랑해야지. 정말 아이들과 잘 지내야지.”
관촌중학교의 페스탈로지, “아이들을 자율적이고 존엄있는 존재로...” 관촌중학교에 부임할 당시 학생 수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 합해 190명 정도였다. 학년마다 3개 반이 있었는데, 한 반에 20명 남짓했다. 도시와 농촌의 점이지대에 위치한 관촌중학교는 여러 면에서 생활 조건이나 학습 조건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거나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죠. 학업에 대한 의욕이 저조한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더욱이 업무 이외의 시간에는 교사와 학생 간에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죠. 저는 교육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도덕 교과를 담당했습니다. 도덕 교사로서 아이들이 자율적이고 존엄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그런 면들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2000년에 김 선생은 학습 조건과 아이들의 생활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직접 집을 찾아가거나 학생들을 설득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냈다. 특히 오후 4시 30분에 수업이 끝나면 거의 방치된 생활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에 함께 공부를 하는 등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3학년 학생 중에 장기결석한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집에 찾아갔죠. 낚시터에 가 있다는 말에 가보았더니 정말 낚시를 하고 있더군요. 아픈 할머니의 영양보충을 위해 낚시를 하는 중이였어요. 학교에는 전혀 재미를 붙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에게 어항을 하나 사오라고 그랬습니다. 한 1m 50cm 정도 되는 크기의 어항이었습니다. 아이는 그것이 흥미로웠던지 자신이 직접 잡은 고기를 어항에 채워 놓았죠. 저는 아이에게 고기에 밥을 주라고 한 뒤, 일체 고기에 밥을 안 주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결석을 시작하니까 결국 고기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녀석이 노발대발 하면서 난리였어요.” “결국 다시 학교에 나왔습니다. 고기에 밥만 주고 도망갈 때도 많았습니다만, 그래도 학업에 흥미를 붙이려고 노력도 하고, 또 도망간 날은 제가 쫓아가기도 하고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 마침내 졸업장을 따냈죠. 나중에 농업고등학교를 가게 됐는데 제가 ‘이 아이는 양어장을 잘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는 내용의 추천서를 직접 첨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연계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그랬는지, 결국 고등학교는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김 선생은 그 제자로부터“가끔 연락이 와서 소주 한 잔 사달랜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김 선생은 관촌중학교에서 부임 첫 해에 주로 가계가 어려운 아이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방면에서 열정적인 노력을 쏟았다. 더러는 수업료를 대신 내주기도 했고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에 안 나오는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아예 학교 나오기를 꺼려하는 학생들을 찾아가 기꺼이 아이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는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도벽을 가진 아이, 원조교제를 하는 아이, 혹은 폭력을 일삼는 아이 등 반사회적 성향의 아이들과 힘겨운 씨름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아이들의 일탈 행위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환경에 의해 빚어진 것이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서, 망가져가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김 선생은 이제 가정집이 아닌 술집이나 다방 등을 쫓아 다녀야 될 판이었다. “아이들은 참 순수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도시화의 부작용이 빚어낸 농촌공동체의 붕괴는, 한편에서는 가족공동체의 붕괴도 수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저소득층 자녀들의 가정을 보면 부모가 모두 도회지로 돈을 벌러 가야하기 때문에 조부모와 기거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절망을 습득하게 하고, 좌절감을 심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자포자기 상태로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당시에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런 문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강조했습니다. '너 자신은 소중한 존재이며, 존중받아야 하며, 동시에 남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구요.” 학교 앞, 길가에서 버젓이 소변을 보고 있는 한 학생 옆에 김 선생이 나란히 섰다. 아무렇지 않은 듯 김 선생은 바지 춤을 내리고 그 학생과 나란히 소변을 보았다. “야, OO야, 이건 너무 쪽팔리는구나. 그렇지 않니? 길가에서 이렇게 소변보는 거, 난 다음부터 안 할란다. 너는 계속 할거니?” 김 선생의 신조는 아이들이 불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불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데려나온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절망과 분노 속에 일탈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이 존엄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글쎄요. 그 때 선생님 몇 분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다방에 찾아가 ‘저 아이가 내 제자요’ 하면 험악하게 생긴 청년들이 ‘아저씨 뭐냐’고 따지면서 오히려 몰아내고는 했죠. 그럴 때 고민이 되죠. 나는 교사이고 그 아이는 제자인데,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많은 이야기를 드리지는 못하겠군요. 저에게는 아이들이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때 아이들은 제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통일교육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선생님들은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페스탈로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입시 위주의 관점에서 보면, 관촌중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전주시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입학하느냐’는 문제였는데 당시 전주시로 입학하는 학생이 십 여명 남짓 했으니, 전반적으로 관촌중학교의 성적은 부진한 편이었다. 하지만, 김 선생과 이를 뒷받침해준 관촌중학교 교사들의 노력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신바람 같은 것이 작은 미동을 일으키며 소리없이 퍼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큰 바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의 관심과 노력은 아이들의 학업에 대한 욕구를 증진시켜 이후 졸업생의 80% 이상인 40여명이 전주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실력 향상의 근본이 됐다. 뿐만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존엄과 자율성,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2000년과 2001년, 그렇게 두해가 지난 2002년 여름이었다. 6월 13일 의정부에서 두 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월드컵에 가려 그냥 흐지부지 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내려 했고, 친구의 죽음 앞에 눈물을 삼키던 중학생들은 종이 비행기를 접어 미군기지로 몰려갔다. 분노와 슬픔을 담은 종이비행기가 미군 담장을 넘어갔다. 하지만, 미군은 실실 웃기만 한다. 한국의 경찰들이 아이들과 부모들을 막느라 진땀을 뺄 뿐이다. 효순이와 미선이. 두 소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리고 잘못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촛불이 일순간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87년 이후 처음으로 수만, 수십만 인파가 광화문 거리로 쏟아져 나와 '진실'을 요구했다.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이것이 매우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비록 선생님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관촌중학교에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공분이 높아가고 있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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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전북지역 기장 4개 노회에서 김형근 교사에 대한 공안탄압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다음카페 NO TOUCH WORLD |
△반전 버튼 190여개는 관촌중학교 전교생의 수와 동일하다 ⓒ다음카페 NO TOUCH WORLD | |
△학생들이 직접 도안한 반전 버튼. ⓒ다음카페 NO TOUCH WORLD | |
△섬진강 일대에서 자연을 만끽하는 관촌중학교 학생들과 섬진강 걷기 참가자들 ⓒ다음카페 NO TOUCH WORLD |
△관촌중학교 학생의 등교길 모습. ⓒ다음카페 NO TOUCH WOR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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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기사를 읽고 또 읽고 몇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참된 스승과 제자사이의 정을 들여다보면서 찡한 가슴을 웅크리며,이런 좋은 글을 읽게 해준 민중의소리 윤보중 기자님에게도 감사함을 느낍니다. 지방경찰청장상까지 받을 정도의 알찬 열매들이 막걸리국보법의 잣대로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어찌해야 할까요?......
김형근 모범교사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기사군요..경의를 표합니다..글고 조갑제, 박근혜, 김용갑, 정형근, 전여옥 등에게 배운 불쌍한 보수 아저씨들이 이 기사를 읽으면 김형근 교사를 간첩으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요..
아마도 기사내용에서 '천황폐하 만세'나 '부시각하 만세'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민중의소리 기사에 달린 댓글] 관촌중의 기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군요... 사미숙 06-25 23:50:03 임실 관촌중 소식만 들었지 항상 궁금해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니 교사의 참교육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군요... 이런 교사를 못살게 구는 넘들은 정말 악의 세력들입니다. 대한민국의 사표로 될 선생님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구속시키려 한다니.... 우리 모두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줍시다.
도대체 올바른 것이 무엇이며 우리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떡하라구 엄청난 일을 꾸며 왜곡시키려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어디 까지가 진실인지 교과서에도 쓰여진 것을 왜도 하지말도록 정치화 하지맙시다!
여러 님들께서 보내주시는 뜨거운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통일세상, 인간세상으로 나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는 괴물, 국가보안법과 물러섬 없이 싸워서 반드시 승리로 보답하겠습니다.
보안법이 통일을 가로막는 역행을 한다는것은 한반도에 역사를 느추는 결과물이라고 하는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남한(반쪽)에 허리케인 의 이상한 반협동에 여러분들이 힘들어 합니다.국민이 원하고 지도자가 힘들어 할때 반대방향의로 분열하지말고 다같이 잘살아갈수 있는 한국사회가 절실합니다.
김형근선생님께 많은 응원과여러분의 관심이 절실할때입니다..조사도 거의 마무리되어지면서 구속영장이 발부되니 안되니하고있습니다 가까운 주변부터 어느좌석이나 먼저이야기해봅시다 국.보 .철폐의 절실함을...
김형근 선생님의 교육적 열정 잘 보았습니다. 학교에서의 통일운동도 전국의 교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것 같습니다. 8차 소환조사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요? 선생님을 더 큰 나무로 만들기 위한 시련이라고 애써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진실한 신념과 통일교육이 학생들에게 깊은 감동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입니다. 교육이 힘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선생님과 갈꽃님과 자제분께 큰 위로와 용기를 보냅니다. 용기를 내시고 얼굴에 미소를 절대로 지우지 않는 님을 그려 봅니다.
지금 엄청난 아시아에 바람이 세계를 부름니다.남한에서 북한에서 그리고 대륙으로 나아가는 시점에 어이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감싸주고 안아주지는 못할망정 동족끼리 모함은 하지않도록 노력합시다.
김형근 선생님 우리 아이들도 고3 인데 같은 고장이면 당신에게 우리 아이들을 맞기고 싶습니다..누가 뭐라고해도 당신은 휼륭한 선생님이십니다 힘내십시요^^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