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53)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32) – 히브리서 강론(12)
히브리서 강론(12) - 10장 19-39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죄인들을 가려주는 피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피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인해 아무것도 숨김없이(팔레시아)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깨끗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려준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인해 우리의 죄가 깨끗해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바꾸는 피다. 우리가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길은 그리스도의 살이 찢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봉헌된 새로운 길이요 생명을 주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언약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눈에 띄면 죽이실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던 지성소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마주쳤을 때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기 시작하게 만드는 살과 피다.(요6: 47-58)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관장하시는 위대한 제사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딱 맞는 돌로 다듬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관장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인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거나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우리는 마음에 예수의 피가 뿌려져서 악한 신념에서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말씀)로 깨끗이 씻겨진 사람들이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심으로 우리는 흔들림 없이 그 소망의 고백을 굳게 간직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초점은 계속 새로운 창조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악한 신념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존재의 이유가 교체된 것을 의미한다.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신념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소망과 확고한 신념으로 교체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지만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신 분이므로 우리는 불안해 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곤고한 자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한 행실을 서로 자극하기 위해 서로를 돌아본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서로를 자극하기 위해 서로 돌아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과 선한 행실을 하면서 살도록 자극하기 위해 각자의 사랑과 선한 행실로 본이 되어주고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해 판단하는 것이다. 본을 보이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섬김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어떤 이들 같이 우리의 모임을 포기하지 말고 서로를 가까이 하며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인간은 방해받지 않으려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됨의 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브리스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의 깊은 지식을 받고도 고의로 죄를 지으면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더는 없고,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단죄와 반역하는 자들을 삼키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모세 율법을 무시한 어떤 이들도 두 세 증인이 있으면 동정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나님의 아들을 경멸하고 세상과 분리시키는 언약의 피를 보통의 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심한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번 비췸을 받고도 돌아서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히6:4-6)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 심판을 받은 영들을 예수님이 찾아가셨다는 말씀도 있고, 값 없이 생명수를 주신다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한다. 이 말씀은 새 언약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며, 진리의 깊은 지식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선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그 선이 우리에게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판단할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 바빠서, 그리고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데 바빠서 하나님의 영역에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직 푯대를 바라보며 회개와 간구하며 진보하기에도 바쁜 우리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말씀과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여기까지 우리가 왔는데 하나님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 말씀을 어린 자들에게 들이대면 안 된다. 어느 선 이상 성장시키신 자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걸려드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받은 빛 안에서 많은 고난의 투쟁을 참고 견디었으며, 비난과 핍박으로 인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가 된 자들의 동료가 되어 결박당한 그들과 고통을 함께 했고, 또한 그대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더 귀하고 영원한 재산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쁘게 받아들인 자들이므로 그대들의 감출 것 없는 태도를 내던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누구든지 큰 보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감출 것 없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함으로 그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그대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싸르크스가 살아 있어서 흔들린다는 전제로 쓴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도 지난 날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실천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잠시 후면 오실 분이 이르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시리라. 나의 의인은 신실함(그의 에무나, 나의 피스티스) 으로부터 비롯되어 살리라. 만약 그가 움츠리면 나의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리라.”(합2:4)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위축되어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어 오직 신실함으로 목숨을 얻어 보존할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포 때문에 그리고 신뢰함이 흔들렸기 때문에 위축되는 것이다. 자기 유불리에 다시 휘말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말하는 죄사함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죄사함의 차이 (카톡)
우리가 팔레시아를 가지고(숨김 없이, 감출 것 없는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두 가지 이유
1. 그리스도의 살(싸르크스, flesh)이 찢기면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
2. 그리스도의 피(아이마, blood)가 우리에게 뿌려졌기 때문
여기서 심각한 신학적 문제는 제2항에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성서의 구원론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거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죄 사함(구속, 대속)에 초점을 맞추어왔습니다
1) 우리가 지은 죄들을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2) 우리의 죄인 된 실체를 가려주는 그리스도의 피
그래서 서구 기독교는 팔레시아를 "담대함" 또는 그런 뉘앙스를 가진 단어들로 번역했던 것이지요. 용서 받은 죄인들이 되었으니 우리는 각자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히 10:22 우리는 확고한 신뢰(피스티스)를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마음에 (예수의 피가) 뿌려져서 악한 신념에서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깨끗이 씻겨진 사람들이며 10:23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므로(피스토스) 우리는 흔들림 없이 그 소망의 고백을 굳게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1) 우리에게는 의인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고(시작되었고),
2) 우리가 앞으로 완전한 의인으로까지 성장케 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3) 우리의 죄악된 행실들이 모두 용서된다는 것 또한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4)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는 태도를 가지고,
5) 찢어진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죄악된 행실은 시간상으로 두 영역의 죄악된 행실로 나뉩니다
1)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 전의 죄악된 행실
2) 새로운 창조로 불완전한 의인이 된 후의 죄악된 행실
이 두 가지 죄악된 행실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고 내용상으로도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증언애서 확인됩니다
롬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 안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윤리도덕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 극히 중요한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 전의 삶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것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서 생긴 변화는 과연 어떤 변화였을까요? 세상 원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를 위한 삶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포함된 형제자매 공동체를 위한 삶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고후 12:15 내가 그대들의 목숨(프쉬케)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내가 그대들을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구원은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