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 문학동네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다.
어릴 적에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맴돈다. 할머니의 쭈즐쭈글한 손등의 피부를 가지고 요리조리 모양을 만들었던 기억이 겹친다. 나는 너무 어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소설은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증조할머니, "삼천"으로부터 39년생 딸 "영옥", 59년생 손녀 "미선" 그리고 증손녀 "지연"까지 이야기인데, 이름 외에 성을 특별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나에게 기억나는 남자의 이름 하나는 길xx 뿐이다,
해방 전부터 2018년 정도까지로 추정되는 기간동안 우리 역사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다. 굴곡이 심하면 심할 수록 사회적 약자는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희생을 강요받을 뿐만 아니라 약탈의 대상이 된다.
소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한 고발 뿐만 아니라, 계급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의 한계, 해방 이전 비교적 순수했던 시대에서도 존재했던 표리부동한 면도 들추어 낸다. 이야기의 시작인 증조 할머니는 백정의 딸이었고 원하지 않는 그녀를 구하려 나타난 백마의 기사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었다. 기독교의 선교의 논리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새비 아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히로시마의 참람함을 목격하고 이름 모를 병을 얻어 돌아온다. 그리고 죽어가면서도 천주님의 사과를 듣고 싶다며 종부성사를 거절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167
이야기는 2017년 1월에 이혼하고 희령 천문대에 직장을 구해 이사하는 서른 두 살의 지연과 1959년 9월에 태어난 그녀의 어머니 미선과의 갈등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그 갈등에 미선과 미선의 어머니, 즉 지연의 외할머니인 1939년생 영옥과의 갈등이 겹쳐 진행된다. 이 갈등과 함께 지연의 증조 외조모,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 영옥과 희자 그리고 미선과 지우간의 우정이 평행하게 전개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해주는 증표인 듯 하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258
이 여인들을 가장 힘들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유부남임을 숨기고 중혼을 하는 등 잘못이 드러나도 그 원인은 늘 아내에게 돌아오고, 심지어는 친 아버지, 어머니도 사위를 두둔하고 딸에게 핀잔을 하는 상황, 그것은 한 세대를 넘어 내림으로 물려받는 것, 그것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배려하는 남자, 아내와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지 않는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성상하지 못했다. 220
"저도 사과받지 못했어요" 229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하는 삶
좋은 것을 좋다고 행복하다 말할 수 없는 두려움
보고 자란 것에 대한 익숙한 사랑받지 못한 여인들의 이야기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에 대하여 척을 지는 것은 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살고자하는 것은 의식주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존심의 문제이기도하고 자신을 스스로의 실망에서 지켜내고자하는 보호본능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해해야하는 인간의 한 면임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 수록 자신의 세계는 줄어들고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어떤 것으로부터 극복해야만 한다. 스스로 가능한 일일까?
병상의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딸의 마음, 죽은 딸를 가슴에 담고 지내는 어머니. 제 삼자에게도 어느 하나 간단한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은 늘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230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47.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134
... 알면 엄마는 무슨 말을 할까. 그것이 어떤 말이든 내게는 상처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59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 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16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299
인간 관계에서 늘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대화이다. 대화로서 문제가 갈등이 풀리기도 하지만 더 얽히기도 하고 더 많은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솔직하면 된다고 하지만 솔직/정직이라는 것이 늘 만능은 아니다. 돌아서면 남남인 관계는 어쩌면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가족 관계 특히 모녀간의 문제는 그렇지 못한 듯하다. 시대가 환경이 다 그렇다. [밝은 밤]은 그런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