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그날 》
살후 1:10~12
〈 ‘그날’ 묵상 〉
‘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조용필이 부른 ‘허공’의 가사입니다.
저는 빼박 7080세대입니다. 저는 또 대중가요를 좋아하고 즐겨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하면, 먼저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이 가사가 떠오르네요.
인터넷으로 ‘그날’을 검색하니 KBS에서 방영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이 뜹니다.
공교롭게도 그 프로그램이 지난 2월에 마감했다고 합니다.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프로그램도 이제는 과거 속으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날”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따 왔습니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0절을 읽으면서 ‘그날’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번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여러분은 ‘그날’ 하면 어떤 생각,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앞서 말씀드리기를 저는, 개인적으로 조용필의 ‘허공’ 가사가 떠오릅니다.
인터넷은 ‘역사저널 그날’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이 ‘그날’ 하면, 추억을 들춰냅니다.
결혼 기념임, 첫 자녀를 얻은 날, 부모님의 회갑 잔치날, 부모님 돌아가신 날…
‘그날’이라는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그날’이 가지는 첫 번째 공통점이 보입니다.
어떤 공통점입니까? ~ 과거 속에서 ‘그날’을 찾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날’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과거 속 어느 한 날을 먼저 연상합니다.
☞ ‘그날’ 하면 과거로 돌아가 어느 한 날을 찾습니다.
☞ 예수님의 과거 속에도 그날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 예수님의 그날들 〉
지금부터 2천 년 전 “그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리웠습니다.
예수님의 3번의 “그날” 십자가 – 부활 – 승천으로 제자들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3번의 “그날”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 이를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선포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그날”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을 기념하여 모였습니다.
그 날이 바로 주의 날, 주일입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을 누가 이끌어줍니까? ~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할렐루야~
여하튼 “그날들” 이후 기독교는 봄날 논두렁을 태우는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온 세상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노래가 퍼졌습니다.
그날 그 사건은 그때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파하여 이를 믿는 자들은 다시 외치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 기독교의 특색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한 마디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증인이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증거하는 증인이 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본디 증인이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 “예수는 그리스도!” 이를 증거하는 증인은 신비롭습니다.
☞ 현장을 본 일이 없지만,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 이 신비로움이 2천 년을 이어옵니다. 예수님의 “그날들”이 가지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 우리의 그날 〉
우리에게도 당연히 있는 과거 속의 “그날” “그날들”은 매우 소중합니다.
이미 흘러갔다고 물거품이 되었거나 허공 속으로 묻힌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 속 “그날”이 하나하나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신 “그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자라면서 숱한 “그날” “그날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하여 과거를 하찮게 여깁니다.
물이 꼭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과거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자 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 이 풍조 역시 사탄의 궤계입니다. 우리는 그 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 오늘날 교회도 그렇습니다.
현재의 교회, 지금의 교회 상황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오늘 주일, 지금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만큼, 지난 주 예배도 중요합니다.
과거 한 번, 한 번의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우리가 망각하면 안 됩니다.
숱하게 예배를 하면서 나를 뜨겁게 감동시킨 예배였습니다. “그날의 예배”입니다.
성도마다 각기 나름대로 “그날의 예배”를 품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예배, 하나하나가 다같이 소중합니다.
흘러간 과거 속 ‘그날’ 중에는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영접한 날이 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그날”이 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날입니까?
어쩌면 “그날”이 내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지금 오늘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난날 행적 “그날”은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상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됩니다.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날”은 하나님이 자녀로 살아 온 은혜의 “그날들”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사상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그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으로 심판하시는 근거가 되는 “그날들”입니다.
〈 미래에 있을 ‘그날’ 〉
사람들이 “그날” 하면 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과거의 “그날” 추억 속의 “그날”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그날”이 소중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 부활하신 “그날” 승천하신 “그날”
우리에게도 과거에 있었던 소중하고 귀한 “그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겼던 “그날”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그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결코 허공 속에 묻혀버리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짧아서 망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잊혀졌다고 “그날”이 없었던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나갔다고 “그날”이 허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일이 되면 오늘도 이미 과거가 됩니다.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똑같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 후서 1장 10절은 미래에 있을 “그날”을 말씀합니다.
☞ 과거 현재에 있는 “그날”만큼 미래에 있을 “그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미래에 있을 “그날” 중에서 어떤 “그날”을 상상하십니까?
미래에 있을 “그날” 어떤 “그날”이 여러분의 심중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을 “그날”로 정한 뜻은 우리에게 미래에 있을 어느 날, “그날” 때문입니다.
미래에 있을 어느 날, “그날”은 우리를 이끌어주는 날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바라보는 장차의 그날은 우리 삶,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나침반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지금 내가 향하는 그날, 목표로 설정된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나침반이고 목표인 미래의 “그날”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데 언제 그런 무지개 같은 그날을 꿈꾸며 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분명한 미래에 누려야 할 “그날”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라야 합니다!
〈 나를 견인하는 미래의 그날 〉
우리가 어떤 미래의 “그날”을 바라봐야 하는지 오늘 본문이 밝혀줍니다.
(10절)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본문에서 “그날”은 다가올 미래에 있는 “그날”입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강림하십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의 재림, 심판의 날, 파루시아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스펙타클 파루시아”입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성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성자 예수님조차 알지 못하는 “그날”입니다.
우리가 미래 어느날에 있을 “그날”은 바로 주님 재림의 날, “그날”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 그날이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 나침반이며 목표이며 최종목적지인 “그날”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기쁨이 차올라야 합니다.
믿음이 굳건하고 탄탄한 사람일수록 그날에 대한 설레임이 큽니다.
믿음이 약한 이에게 그날은 아직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날”에 대해 가슴 설렘이 없다? ~ 이거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
어떤 믿음 주시기를 바라냐면요, “그날”을 생각할수록 가슴 벅차오르는 믿음을 주옵소서!
이 믿음이 나를 견인하게 하시고, 이 믿음으로 오늘을 살게 하시옵소서!
이 믿음으로만, 오직 이 믿음으로만 살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설교 들으면서 가슴이 설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의 감격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질문합니다. “살아생전에 주님이 재림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마치고 소천하는 날, 그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그날이 그날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날,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천국시민이 되는 날!
언젠가 주님이 이 땅에 구름 타고 내려오시는 그날이 파루시아,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육신의 호흡을 마치고 소천하는 그날은 개인에게 파루시아입니다.
☞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나 천국에 입성한 믿음의 선진들, 조상을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 ‘그날’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
사람들은 “그날”을 과거에서 찾습니다.
미래에 있을 “그날”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실 인간이 미래를 기약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이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학문, 철학, 종교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류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인생에게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소망을 주십니다.
☞ “미래에 주님이 재림하는 ‘그날’이 있으니 ‘그날’을 마음껏 기대하고 소망을 가져라!”
(11절)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만이 미래의 “그날”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아니한 자, 예수 믿지 않은 자, 불신자!
그들은 결코 미래의 “그날”을 알지도 못하고 소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믿고 구원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만이 미래의 “그날”을 알며,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그날을 알고 그날을 누리는 것은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특권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안 믿은 사람들에게 고합니다.
당신들에게 미래의 “그날”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속히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미래의 “그날”을 알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고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시민으로 인치십니다.
지금부터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날”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믿음이요, 천국 소망의 환희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