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현종 숙종으로 이어지는 소위"3宗의 혈맥"시대에 조선 왕실의 가문 혈통은 손이 귀하였다 그야말로 외아들에서 외아들로 이어져 내려왔다
임금이 후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왕조 국가에서는 정치적 불안 요소로 작용하였다 신하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 조선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후사 부재 기간동안의 영조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영조가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립해 소론을 포용하는 탕평책을 쓴 이유 중의 하나도 기실 이 세자의 부재라는 사실에 있었다 선왕 경종 때도 이러한 문제로 극심한 정쟁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던 그 정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던 그였다
영조는 첫 아들 효장세자를 재위4년에 사별하고 재위11년(1735) 42살에야 다시 원자를 보게 되는데 바로 훗날의 사도세자이다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고 한 영조 자신의 말처럼 새로 태어난 세자는 영특했고 조숙했다 세자가 3살 때 소학의 文王世子편을 배울 적에 王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켰고 世子자를 보고는 자신을 가리켰으며 천자문을 읽다가 侈(사치할 치)자가 나오자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에 구슬 꾸러미를 장식한 모자를 벗어 던지며 이것은 사치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 주나라 주공이 섭정을 할 때 밥을 먹는 동안에도 3차례나 입에 물고 있던 음식을 뱉어내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찾아온 관원들을 만난 고사가 소학에 기록되어 있는데 ,5살의 세자는 밥을 먹다가 영조가 부르자 입안의 음식을 뱉어 내어 대답하니 세자의 영특함과 조숙함을 보이는 대목들이 아닐 수 없다
삼종의 혈맥을 이어 갓 태어난 세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출생한 그 순간부터 세자를 자파로 만들려는 당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영조가 탕평책을 표방한 뒤라 당색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정파는 같은 뿌리인 서인들이었지만 숙종시절 남인에 대한 입장차이로 분열하였다 세자가 태어난 날 그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노론 영수 민진원은 경종의 전례를 들어 생모 영빈 이씨의 품안으로부터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아들로 입적시킬 것을 주장했다 정성왕후 서씨는 노론가의 여인이었다 장차 원자 정호를 위해서는 정비 품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인데 그 실례로 경종의 인현왕후 아들 입적 사례를 들었으나 경우가 맍지 않는 것이었다 영조는 어린 왕자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원자 정호를 서두르는 한편 이 요청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원자는 태어난지 백 일째 되는 날 보모의 손에 넘겨졌다 세자가 보모와 함께 생활하게 된 처소는 儲承殿(세자 자리를 잇는 집이라는 의미)이었다 저승전 자리에 남아있는 선대의 우울한 자취가 세자의 운명에 적잖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저승전 그 바로 전각을 매개로 숙종과 경종 그리고 영조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또한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원혼이 깃들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시동생 연잉군이 아니라 종친의 아이를 입양 입적시켜 후사를 잇게 하려다 실패한 어씨는 경종이 죽은 후에도 저승전에서 6년이나 더 살았다 눈물과 한 속에서 6년을 보낸 어씨가 세상을 뜬 후 이 곳에는 어씨의 3년상을 지내는 궁녀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이 곳 저승전에 들어감으로써 경종과 운명적으로 조우하였다
숙종이 15년 동안이나 바라마지 않던 원자를 남인 중인 가문의 서녀출신인 張玉貞(희빈 장씨)을 통하여 얻었을 때 서인들은 원자 정호를 결사 반대하였다 송시열이 사사(賜死)를 받은 것도 다름 아닌 그러한 이유때문이었으며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면서까지 세자 책봉(훗날의 경종)을 밀어부친 바 있었다
숙종은 그 5년 뒤 다시 희빈 장씨를 내쫒고 폐출시켰던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불러들인다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한지 7년 만에 사망하자 그 책임을 엉뚱하게도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돌려 사사시킨다 세자의 생모인 그녀의 비참한 죽음이 훗날 사도세자 비극의 한 원인이 된다
숙종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수리 출신 숙의 최씨로부터 낳은 훗날의 영조인 또 다른 왕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문제는 조정이 두 왕자를 놓고 당파가 갈릴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연산군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단순히 생모에 대한 복수의 피바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은 재위 43년(1717) 노론 이이명과 독대를 한다(정유독대) 이는 공개정치를 지향했던 조선에서는 엄격히 금지되던 일이었다 이 때 병석의 숙종은 이이명에게 세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않고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한다 노론은 이를 세자를 갈아치우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된다
독대 직후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노론 영수 이이명이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 균을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주청한 것이다 대리청정이라는 말 자체도 왕조국가에서는 신하가 입에 담믈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세자의 대리청정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는 숙종과 사전에 짜여진 각본이 있지 않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단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갈아치우려는 의도였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소론이 크게 반발하고 숙종도 이미 늙고 병들어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독대 3년 후 숙종은 죽고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경종이다
노론은 연산군의 사례를 떠올리며 경종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치 않는 가운데 비상 대책을 강구했다 王世弟책봉을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의 동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꾀하고 나온 것이다
경종은 심신이 유약했다 어린 14살 나이에 직접 목도한 생모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종의 건강상태를 빌미로 노론은 왕세제 책봉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어지는 노론의 움직임을 보면 그들은 비밀회의 끝에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가 되는 왕자를 왕세제로 추대한 다음 적절한 시기를 틈타 대리청정케 하는 순서를 밟아 종국엔 경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연잉군을 새 임금으로 삼으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경종비 어씨는 경종의 후사를 낳지 못하자 양자를 들이려 하고 있었다 노론은 다급했고 무리수를 두기를 서슴치 않은 것이다
당시 연잉군은 27세였는데 노론의 밀사 서덕수와 김복택의 택군 제의를 받아들인다 노론의 제의가 사실상 역모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왕이 되고 싶은 욕망에 그를 수락한 것이다
"擇君 " 이는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주체가 되고 임금이 객체가 되는 본말전도의 현상으로서 조선이 말기적 상황에 돌입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경종의 태도에 있었다 대리청정의 주청을 선선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소론이 불가함을 읍소하자 다음날 자신의 명을 철회해버렸다 이로 인해 노론 영수 김창집이 사직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다다음날 다시 경종은 대리청정을 윤허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반전의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정국은 그 와중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론과 연잉군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연잉군이 대궐 뜰에서 정청하기를 3일 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노론은 눈치를 본 끝에 모양새는 갖춘 바 되었다 보고 노론 4대신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기를 대리청정을 다시 요청하고 나서 경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낸다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노론 4 대신을 역적으로 모는 소론의 역공이 시작되었고 이 때 비로소 경종은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키고 그 밖의 노론 인사 50여 명을 위리안치 유배 파직시켰다 그러나 경종은 부왕이 자신보다 더 사랑해 마지 않던 이복 동생 연잉군만은 목숨을 지켜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경종은 연잉군을 보면 반드시 웃었으며 왕세제가 있는 동궁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아우의 글 읽는 소리가 듣고 싶어 왔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죄인된 입장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연잉군이었다 이 때 소론 온건파가 소론 강경파와 대립을 무릎쓰면서까지 연잉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고립무원의 연잉군이 반대당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받은 것은 조선 당쟁사에 있어 아이러니한 일이었고 훗날 영조로 하여금 탕평책을 펴게 한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자당의 임금이 즉위하자 노론은 경종 때 당했던 정치 보복을 되갚으려 했다 소론이 경종 때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몰아 죽인 것처럼 이번에는 노론이 경종 때 왕세제 책봉과대리청정에 반대했던 유봉휘 이광좌 조태구조태억 최석항 등 소론 5대신을 5흉으로 몰아 죽이려고 나섰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광좌 조태구 최석항 등은 비록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은 반대했으나 일단 책봉된 이후에는 연잉군을 도운 인물들이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소론 온건파마저 공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론의 계속된 지나친 요구에 싫증을 느낀 영조는 재위 3년 만에 노론을 내쫒고 소론 온건파에게 정권을 내주었다(정미환국) 만약 이 환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영조는 그렇게 오랫동안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소론 강경파는 노론의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또 분개하기도 하였다 결국 영조를 내쫓기 위한 군사 정변을 계획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영조 재위 4년(1728;무신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노론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을 모아 선왕을 독살한 노론과 영조를 응징하기 위해 봉기한다는 명분을 걸고 거병 초기 청주성을 점령하고 대구 지역을 휩쓸었다
만약 소론 온건파가 계속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영조가 만약 정미환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이인좌의 난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소론이 분열된 가운데 소론 온건파가 나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자 노론은 다시 이를 소론을 제압할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영조는 현군의 자질을 발휘한다 "지금 역변이 당론에서 나왔으니 앞으로 당론을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고 한 것이다 영조 5년 기유년(1729)에 있은 기유 대처분이었다 사실상 탕평책의 시작이었다
텅평이란 말은 원래 書經 洪範9疇의 無偏無黨하니 王道蕩蕩하며 無黨無偏하니 王道平平하다 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에서는 숙종 20년 朴世采가 처음으로 이를 제기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 당론의 소산임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다 당론을 조절하지 않고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뼈아픈 결론에 도달했고 이에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영조는 소론 영수 이광자에게 영의정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조정에 노론 소론 외에 탕평당이라는 새로운 당이 생겼다면서 비난하고 나섰으며 그만큼 탕평은 어려운 일이었다
동양의 정당론은 남송 구양수가 체계화한 眞朋 僞朋론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를 당적 활동의 근거로 삼았다 문제는 이 진붕 위붕의 구별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었다
무신난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 해 8월 제천 사람 이석효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기유 대처분을 통해 신원시킨바 있는 임인년에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중 이건명과 조태재를 복관시켰다 두 정파의 이해를 감안한 절충안이었다 영조 15년 나머지 두 노론 대신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시키게 되는데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한 임인옥사는 영조 자신과 무관한 일이 아니었는 바 영조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임인옥안에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올라 있었다 재위 17년엔 신유대훈을 발표하여 경종이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 것은 역모가 아니라 대비와 경종의 하교에 의한 합법적인 행위였음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모든 과거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과거를 얽매고 있던 모든 족쇄를 풀어버리고자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영조는 결국 노론 당인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조가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중 그 때까지 신원되지 못하고 있던 김창집과 이이명을 복관시켰는데,이것이 과거 노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나선 것이 되어 이에 힘입은 노론이 소론을 공격하고 나섬으로써 당쟁이 다시 격화되게 되었다 이에 영조는 자신이 당론을 調劑하지 못하였다고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양위 소동을 또 한차례 벌인다 이때 세자 나이 3살 5 살 때에 이어 6살 때 3번 째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르는 양위 소동을 통해 정치 현장에 나서야 하였다 이후 세자 나이 15살 그리고 19살 때 또 다시 영조의 양위 소동을 겪게 되는데 영조는 자신이 임금이 되기 위하여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에서 늘 자유롭지 못하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있었던 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일부의 의구심을 씻고자 하는 한 방편으로 전위를 들먹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속마음은 물러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다시 "즉위"하는 데 있었다 즉 임안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올라 있는 노론 임금 연잉군으로서가 아니라 노,소론을 막론한 조선의 임금으로 다시 즉위하고자 한 것이었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한 것은 두루 통하는 군주의 마음이었으나 임인옥안에 대해 끊임없이 반전을 시도한 것은 편벽된 소인의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영조가 주장한 탕평책은 사실상 노론의 자리에서 소론을 포용하는 부분적 탕평이었다 영조의 탕평책에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고 세자와의 부자관계마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영조 31년(1755년)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이다 흉서의 내용은 조정에 간신이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것이었는데,범인은 윤지라는 자이였으며 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겨져 30년 가까이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영조 4년 소론 강경파가 주도한 이인좌의 난이 27년 만에 재연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을 허위라고 여길 만큼 긴 세월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자 중의 하나인 나주 목사 이하징이 국문과정에서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몰고 왕세제 연잉군(영조)를 역적의 수괴로 몰았던 김일경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고,친국당하던 임국훈이 영조가 경종을 몰아냈다는 취지의 발언이 이어지자 영조는 분노하고 또 분노하였으며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하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능지처참의 현장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세자를 동석케 하기도 하였다 광기어린 영조의 분노어린 국청 앞에 기십명의 소론 인물들이 죽어갔다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효수되었으면 노론인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나서서 "지금은 군사를 일으키는 때가 아닌데 날마다 효시하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라고 중재할 정도였다 21살의 세자는 그러한 장면에 얼굴을 찌푸렸으며 이것은 아니다라는 심정이 절로 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 온 당론 조제를 사실상 포기해 버렸으며 노론 일당이 독주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는 또한 소론을 지지하던 세자에게 커다란 위기이기도 하였다
영조는 세자가 이러한 자신의 판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그것이 세자의 효도이자 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세자는 경종 시절 노론의 왕세제 첵봉과 대리청정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분명 신하가 임금을 택한 택군이었으며 당시 그러한 행위는 역적으로 공격받을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니 수십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복수할 만큼 정당성이 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간 당론조제가 임금의 역할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훈계하던 부왕의 정치적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옥사는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연일 죽이고 국문하자는 노론의 상소 주청 등에 대하여 세자는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분명히 거부했다 세자가 보기에 영조는 당론조제라는 원칙을 잃어 버리고 노론에 끌려다니고 있었으며 세자는 이에 대하여 정치 보복의 광기에 휩싸인 조정에서 살육을 막아 보려고 애쓴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세자의 태도는 매우 위험한 처신이었다
노론에게 이런 세자는 그저 소론의 당인으로만 보일 뿐이게 되었다 이러한 세자의 즉위는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이제 세자는 노론에게 제거해야 할 정적이었다
나주 벽서 사건 관련자 중 한 사람은 갑진년(영조가 즉위한 해)부터 우리에겐 임금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들에게 영조는 노론의 임금이자 나아가 경종을 살해한 역적일 뿐이었다 또한 영조의 계모 인원왕후 김씨도 경종과 함께 경종에게 의가에서 꺼리는 게장과 생감을 함꼐 진어함으로써 경종을 살해한 역적의 공모자일 뿐이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배제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때문에 탕평책에서 배제된 이들은 현실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불만이 이런 반발로 나타난 것이다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영조 31년 (1755)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30년 동안 고심하던 일이 이제야 성과를 보게 되었다"라고 입을 열었다 이는 영조가 겉으로는 탕평을 주장해 왔지만 속으로는 노론의 당인이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조에게 나주 벽서 사건은 과거에 자신을 역모로 몰았으나 그래도 탕평을 하면서 포용해 왔던 소론을 더 이상은 끌어안을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본격화한 탕평책을 ,나주 벽서 사건과 討逆慶科사건을 계기로 실질적으로 폐기했다 노론은 쾌재를 불렀다 노론의 공세는 이미 죽은 지 수십년이 지난 소론 온건파 영수들에게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역률을 추시하고 관작을 추탈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
"범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이는구나 "
이는 사도세자가 14살 때 지은 시의 내용이다 14살 소년의 시치고는 대단한 기상이 깃들인 시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에게는 이렇게 무인적 기질이 있었다 세자의 이런 무인적 기질은 노론과 영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영조와 세자의 갈등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평화 관계가 정착되자 북벌의 기상은 사라지고 현실과 동떨어진 소중화 사상이 팽배하였으며 정치 사상도 예론으로 기울어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武는 일개 병사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멸시하였다
세자는 실로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이성계와 효종을 잇는 무왕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효묘를 빼닮았다고 말한 풍원군 조현명은 과연 선견지명이 있었다 세자는 확실히 문보다는 무가 적성에 맞았다 저승전에 있는 청룡도나 쇠몽둥이는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워 할만큼 무게가 나갔는데 세자는 15살 때부터 이것들을 들어서 썻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또한 유년 시절부터 군사 방면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가 하면 영조 33년 武技新式이라는 책을 반포하여 당시 조선의 將臣들이 주로 참조한 중국의 척계광의 무술저서에 소개된 기예란 것이 6가지 뿐이었늗데 12가지 무예를 새로이 추가하여 무예에 관한 새로운 방법을 고찰하였다 세자는 무관들이 무예에 익숙치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무술서의 잘못에 있다고 본 것이었다 세자는 당시 무예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접하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지만 여기를 건너면 곧 옛날의 중원이다"
"효묘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 데다가 북쪽 동산의 한 자 되는 壇을 생각하면(명나라 황제 신종의 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병자호란 이후 단순한 사대의 표현이 아니라 북벌의 의지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였다)자다가도 탄식하게 된다"
영조대에는 빈말로라도 북벌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오직 세자만이 북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북벌을 꿈꾼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다
세자의 이런 진취성은 노론세력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북벌이란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의 현상유지를 타파하는 위험한 이념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그 모든 것을 경계하고 단호히 대처코자 하였다
이런 노론과 세자가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이후 노론과 세자는 정적으로 대립하였고 노론은 당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하여 세자에게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한 각종 공작을 본격화하였다
세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조와 달리 극히 과묵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누가 무엄한 일을 해도 분노하지 않았다 영조 32년 무려 세번에 걸친 常參(상참;임금 세자와 신하들이 만나는 의례의 하나)의 명에도 불구하고 양사의 대간들이 참여를 거부하자,우의정 신만이 그들의 귀양 파직을 청했을 때도 이미 처분했다는 말로 대신하였다 이렇게 엎드린 채 죽은 듯 처신하고 있는 세자가 그들은 두려웠다
세자는 궁궐내에서도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극진히 모셔마지 않던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등졌으며 영조가 정성왕후 서씨와 이어 인원왕후 김씨의 죽음을 맞이한 직후 66살의 나이에 14살의 신부로 맞아들인 정순왕후가 세자와의 권력투쟁에 돌입하였으며 처남 문성국 등의 외척들 그리고 노론 중진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였고 세자빈 홍씨만저도 아버지를 따라 노론세력의 편에 서 있었고 세자를 거꾸러트리려는 정순왕후 부친인 국구 김한구家와 결탁하였던 바 세자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노론이 세자를 모함하면서부터 세자에 대한 영조의 신뢰도 무너져 갔다 당쟁이 치열한 시기에 정견이 다른 인물은 곧 정적이었다 세자와 영조사이가 그러한 관계로 되어 가고 있었다 양자 사이의 갈등을 영조는 노론 대신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더욱 사태의 심각성을 더해갔다
3정승과 재상들 심지어 장인 홍봉한까지 어느 누구도 영조와 세자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갈등을 더욱 부추김으로써 상호 정적으로 삼게 하는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 경종의 왕위를 빼았으려 했던 그 마음으로 세자를 의심하며 바라보았으며 끊임없이 세자를 견제 시위하면서 병을 핑계하거나 자신을 진현하는 일을 게을리 하였다 하여 세자의 충성심을 시험 확인하려 했다 영조는 세자를 상대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세자는 영조를 알현한 후 물러나오는 자리에서 궁중 뜰에서 까무라쳐서 일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세자를 관대히 대할 것을 진언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파직시켜버린 일도 있었을 정도다 영의정 이천보가 60번 이상이나 사직 단자를 올렸으나 물리쳤던 일이 바로 1년 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태도는 안 그래도 세자를 마땅찮아해온 노론 신하들이 다른 생각을 품을 여지를 만들게 하였다 /
영조 36년 세자는 濕瘡 곧 종기를 치료코자 온양 온궁행을 영조로부터 허락받게 되었다 세자는 온궁 행차 도중 백성들이 행차를 에워싸서 소란스러워지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농촌의 질고에 대해 묻고 지방관을 불러 직폐를 폐할 것을 하명하곤 하였다 온양 행차 중 보여준 세자의 모습은 백성을 고통 속에 빠트리는 부역을 감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혜경궁 홍씨의 정신병자 주장과는 다른 성군의 자질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세자의 온궁 행차는 그간 노론 세력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작되어 유포된 세자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소문 즉 세자가 포악하다 정신병이 있다는 등의 헛된 소문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온궁 행차 과정에서 백성들은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던 바 세자의 위의가 오히려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노론 세력이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를 둘러싸고 가장 큰 미스터리로 남는 관서행을 둘러싸고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견해는 세자의 죽음이 이 관서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부왕 몰래 세자가 평안도 지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비행을 저질러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자의 관서 미행을 세자의 정신병 탓으로 돌리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의 기록은 세자에 대한 온갖 정보를 노론의 세도가 집안인 친정에 흘려준 첩자의 변명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미스터리는 세자가 온궁 행차 이후 무려 8개월간이나 영조를 진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성균관과 승정원 등에서 차자를 올려 진현을 권하면 세자는 약방의 입진 외에는 모든 청대를 거부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간단히 답변하는 문서를 내려보냄에 그쳤다 아프다는 것을 이유로 세자는 사실상 정사에서 의도적으로 손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온궁 행차 동안 자신에게 쏠린 백성들의 찬사어린 시선이 부담이 되었던 터였던 것이다 그만큼 부왕과 노론의 경계도 강화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세자가 정사에서 손을 때고 있음을 보고만 있는 가운데 묵인하다시피 한 영조의 행위는 세자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었다 세자의 정사 방기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영조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그만큼 세자는 안밖으로 견제를 받고 있는 가운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세자는 자신을 죄어 오는 음모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영조의 총애는 세자가 아니라 세손에게로 쏠려 있었다 세자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타개책을 찾기 위한 관서 미행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나 다름없었다 우의정을 역임한 소론 영수 조재호를 사전에 찾아가 도움을 청한 바 그는 형수 효장세자빈의 오빠이기도 하였는데 장래의 일을 논의할 만한 인물로서 평안감사 정휘량을 그가 소개 연결시켜 주었는데 정휘량은 세자와 사돈지간(세자의 매제의 숙부)이기도 하였는 바 조재호가 그와 손잡을 것을 권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의 군사력을 의지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조 사망시 노론의 반대를 봉쇄하고 즉위를 감행하는 방도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만약의 경우 군사력을 동원하는 내용도 포함되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휘량은 소론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세에 민감한 인물로서 세자의 관서 미행 동안의 행적을 홍봉한에게 그대로 전해 올렸다 노론 세력은 관서 미행을 통하여 세자가 소론과 결탁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으며 노론은 조직적으로 세자의 관서행에 대하여 여러 뒷말을 만들어 냈으며 세자의 짐작되는 자구책 내용을 가지고 역모로 몰아 가려 하고 있었다
홍봉한은 홍계희와 함께 치밀한 사전 각본하에 대책을 마련하였다 홍봉한은 세자의 처외삼촌인 형조참의 이해중과 함께 주역을 맡았다 중인 나경언으로 하여금 세자가 장차 불궤한 모의를 한다는 내용의 고변을 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법에 따르자면 당시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지 13년이 넘은 때였는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자면 먼저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인 바 형조 참의 이해중은 자신의 상관인 형조 참판이나 형조 판서에게 먼저 보고하는 것이 순서일 것인데 이해중은 자신의 매형인 영의정 홍봉한을 먼저 찾아 아뢰었다는 것은 사전에 상호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은 세자를 제쳐놓고 직접 영조에게 보고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개 서민에 불과한 나경언으로 하여금 구중 궁궐속의 영조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보고를 받는 영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자세보다는 나경언의 고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급급하였으며 후에 나경언이 진실을 고백하여 무고죄임이 드러난 이후에도 영조는 나경언의 배후를 조사하자는 청에 벌꺽 화를 내기까지 하였다 나경언의 고변을 받은 날 영조는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케 하고 하궐(세자궁)으로 통하는 문을 막게 했다 세자가 군사를 동원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옥당 김종정 등이 연명으로 나경언을 노적의 율로 처리하기를 청했을 때 영조는 격노하며 이 차자를 받아들인 승지를 파면하고 유배시켰다 이 때 전교를 내리기를"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父黨 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라고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말에서 세자에 대한 그의 인식이 확연히 드런난다 영조는 세자를 자신의 정적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역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사형에 처한 이후에도 세자를 용서치 않았다 나경언이 고변한 이후 9일 째까지 세자는 시민당 뜰에 나아와 대죄(대명)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명 중에 영조는 세자의 문안조차 받지 않다가 자결을 명하였고 결국 나경언이 고변을 한지 20여 일 후 세자를 뒤주 속에 갇어 죽게 만든다
당시 영조는 69세의 노령이었던 데다가 실제로 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론이 나경언을 사주해 고변케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즉 영조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세자가 즉위하게 되면 소론 남인 등과 손을 잡고 자신들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댈 것을 두려워하여 세자를 제거키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세자 역시 영조가 죽는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영조가 죽으면 노론이 세자를 죽일 경우를 대비하여 대명 중에도 땅을 파 3칸짜리 땅 속 집을 짓고 그 사이에 장지문을 해 닫아서 마치 壙中같이 만들고 드나드는 문을 위로 내고 널판지 뚜껑을 하고 판자 위에 띠를 덮은 가운데 그 안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춘천에 있던 조재호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케 하였고 동궁에 무기고를 만들어 두는 등 최후의 자구책을 마련하여 두려 하였다 이것이 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결정적인 원인일 것이다
세자는 영조 38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무려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갇혀 있었다 장인 홍봉한은 이 와중에 울부짖으며 세자를 구하려하지 않는 대신들을 꾸짖은 윤숙을 엄히 처벌할 것을 영조에게 간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비 홍봉한이 세자의 죽음과 무관함을 변명하기 위해 한중록에 쓰기를 "그 때 부친은 재상으로 첫 15일 엄중한 교지를 받자와 파직되고 동교에 달포간 나가 계셨다"하였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좌의정으로서 현장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다음날 자신을 꾸짖은 윤숙의 처벌을 요청까지 하였던 것인 바 혜경궁 홍씨의 그러한 진술은 거짓 기록에 불과하다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있은 지 5일째 되는 날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로부터 세자와 결탁한 인물이 조재호임을 알아내고 영조로 하여금 위리안치토록 하명하여 줄 것을 청하여 수락을 받아냈다 조재호는 반드시 당이 세상에 없어진 후에야 조정에 나아가겠다고 하였을 만큼 관직에 초연하였던 바 유신들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또한 탕평의 인물이기도 했다 세자가 죽은 지 약 한달 만에 그도 집요한 노론의 획책에 의하여 결국 사사되고 말았다 후환의 근원이 될 것이라 우려한 것이다
뒤주에 같힌 지 8일째 되던 날 드디어 세자가 죽자 영조는 바로 그 날 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思悼世子라는 시호는 이 날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 세자가 뒤주 속에서 영조가 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영조는 세자의 목숨이 아니라 세자의 호만 살려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세자를 정말로 죽일 작정을 하고 뒤주 사건을 이끈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지 두 번째 아침을 맞는 날 세자의 대리청정을 폐하는 반교문을 반포하였다
세자의 장례는 두 달 뒤 양주 배봉산을 장지로 하여 치러졌다 이 날 경기 고을 백성들이 떼를 지어 배봉산에 몰려들어 곡을 했는데 세자가 단 한 번의 온양행에서 백성들에게 남긴 인상은 이렇게 깊은 것이었다 영조는 이들을 내쫒아버렸다
영조는 스스로를 말하기를 등잔으로 달려드는 부나비도 손으로 저어 내쫒기만 하였고 개미도 밟지 않고 건너서 갔다고 할 정도로 남달리 정과 눈물이 많은 임금이었지만 정녕 권력은 눈물도 정도 부자지간의 관계도 뛰어넘어갔다
세자를 제거한 홍봉한과 그의 동생 홍인한의 권력은 점점 강성해 갔다 온 나라가 사실상 그들 형제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시중에 떠도는 동요 하나의 내용이 이러할 정도였다"亡國洞에 亡政丞이산다네"홍봉한이 사는 안국동의 이름을 바꾸어 풍자한 내용이다
혜경궁 홍씨에 관하여 말하자면 생부를 위한다는 세손의 칼날에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풍산 홍씨 가문이 피해가지 못함으로써 그녀의 업보를 짊어지게 되었다 다만 홍봉한은 어머니의 부친이었던 관계로 정조는 어머니와의 사이를 염려하여 그를 살려두었다 헤경궁 홍씨는 친정이 공격을 당하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을 때도 하지 않던 단식까지 해 가며 정조에게 시위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게 된 이유는 첫번째로는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을 옹호하기 위함이었으며 두 번째로는 정조가 재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에게 자신의 친정 가문의 신원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세상의 시각은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로 의심했다 아마도 자신의 친정이 몰락당하는 일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혜경궁 홍씨는 조선 왕가의 여인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린 인물이었지만 그 눈물은 진정 애통해야 할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가해자를 위해 흘린 것이었기에 동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14년 동안이나 모시던 세자가 무려 여드레 동안이나 뒤주 속에서 신음하며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남아 있던 조정 신하 그 어느 누구도 세자를 풀어달라고 주청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으니 당시 11살의 세손이 왕위에 오른 훗날에도 그를 제대로 보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정조의 죽음앞에 우리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냉혹한 당시 조정의 현실앞에서 말이다
82살의 영조는 24살의 세손(훗날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였다 이에 그 뜻을 담은 전교를 승지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하였는데 홍인한은 승지 앞을 가로막고 앉아 전교를 받아 쓰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하교를 들을 수 없게 방해하였다 승지가 전교를 다 썼을 것으로 여긴 영조가 써 놓은 전교를 읽어 보라고 명령하자 홍인한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신하된 자로서 어떻게 읽겠습니까?하고 반문하였다 대신들은 물러나가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명백히 영조와 세손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들이었다 세손은 영조 곁에서 이러한 모습들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세손은 신중했다 아버지 세도세자처럼 감정 표현이 극히 절제되었으며 절대로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도 않았다 또한 할아버지 영조의 뜻에 거슬리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고 극진한 효성을 다 바쳤다 영조는 그러한 세손을 만족스러워 했다
홍인한과 노론은 세손마저 제거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제거하기위하여 행하였던 방법들을 다시 그대로 답습했다 세손이 몰래 미행한다든가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셔댔다는 등의 거짓된 소문을 퍼뜨려 영조의 미움을 사게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자 산을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세손으로 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산을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로 여겼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 위해 분주했다. 영조가 나이가 들어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영조는 산을 제왕수업을 시켰고, 마침내 1775년 대리청정을 시키게 된다.
하지만 노론은 "三不可知論"을 주장하며, 세손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필요 없고, 이조나 병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세손을 몰아내고자 했다. 성인이 다 된 24살의 세손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노론 당인들의 권력욕에서 나온 무례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서명선이라는 당시 젊은 관리가 앞장서 세손이 대리청정하는데 가장 반대하는 홍봉한, 홍인한 형제를 탄핵하면서 세손은 영조로부터 순감군이라는 군대를 얻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위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영조는 54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왕위를 지키다가 세상을 등지고, 세손인 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여태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짐을 벗어던졌다.
정조는 이듬해 영조의 승하와 함께 즉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일성은 이러했으니 노론 세력들이 경악할만 하였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써 왕위를 이은 것인데, 이를 부정하고, 노론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인 노론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 세력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정조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14년 전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노론은 뒤주 속의 원한이 분노로 되살아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의 숙청에 위기감을 느끼었고 최후의 수단으로써 정조 초년에 정조 살해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다 힘이 천하 장사인 전흥문을 자객으로 고용,임금이 머무르고 있던 경희궁 존현각 지붕위에까지 침투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하였다
이 국왕 암살 기도 사건은 왕조 국가인 조선의 정치 질서가 말 그대로 갈 데까지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 때 임금을 골랐던 "택군"의 단계를 넘어 임금을 살해하는 막바지 단계까지 이르른 것이었다 정치적 명분도 대안 제시도 없었다 그나마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큰 줄기인 명분 자체도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전 현직 벼슬아치 환관과 궁녀 그리고 임금을 보호해야 할 호위 군관까지 관련되어 정조를 죽이려 드는 판이었다 국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립되어 있었다 홍국영이 宿衛所를 설치하여 정조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만큼 비상 조치가 요구되었던 상황이었다
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으로 소론이 몰락한 이후 노론에 맞설 세력은 아무데도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왕조 국가 조선의 파탄으로 보았으며 노론 세력에 의한 국왕 시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그는 노론 일당 전제하의 정치 구조하에서는 어떠한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노론을 대체할 정치세력을 만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 즉위에 가장 큰 기대를 건 세력은 영남의 남인들이었다 당시 남인들은 80년 동안이나 숙종 20년 (1694) 갑술환국 이후 한번도 집권하지 못한채 재야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지역의 남인이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영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이 지역 출신 사대부들은 출세길이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정조의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발탁함을 계기로 남인들은 고무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신원을 자신들의 신원과 동일시한 그들은 자신들이 정권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도세자 문제를 현안화하는 길뿐이라고 믿었다
채제공이 우의정이 된 지 반 년이 지난 후 영남 유생들이 戊申倡義錄을 영조에게 우여곡절꿑에 올렸다 책자의 내용은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사람들도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포상은 커녕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혀 조정에서 소외된 것이 억울하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상소자들을 친히 접견하면서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개탄하였다 이는 정조의 뜻이 남인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기에 조정과 영남 사대부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재위 16년(1792) 정조는 또한 영남 남인들을 정국의 한 축으로 키우고자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영남 유생들을 대상으로 별시를 치렀으며 정조는 친히 직접 답안을 채점하기 까지 하였다 이 날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들의 수는 7천명을 넘었고 구경꾼까지 합한다면 일만 명이 넘는 대인파가 운집해 영남 사대부들의 잔치의 장소가 되었다
정조 16년 4월에는 1만명이 넘는 영남 유생들이 연명한 영남만인소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 문제를 직접 정면으로 거론하면서 사도세자를 위해 무함을 변명하였고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노적의 율로 주토하여 줄 것을 주청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남은 정조의 확고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 기슭에 묻혀 있던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 용복면의 화산으로 이장시킨 후 능행을 무려 재위기간동안 2년마다 한번씩 12번이나 행한것은 단지 효심의 발로에서만은 아니었다 능행 자체가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좋은 수단의 하나이기도 했다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동원된 말만도 1천 4백여 필이었고 어가를 따르는 인원도 6천이 넘었다 아무리 이 나라 곳곳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이라도 국왕의 이런 위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정조는 노론에게 이를 시위하기 위해서도 자주 능행을 실시하였다
정조 24년 세자빈을 간탁하던 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 입장을 취했던 시파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취하였다 노론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간택한 것은 정조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수가 되었다 김조순은 정조 사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 해 6월 14일 정조는 "지금 중천에 태양이 뜬 것처럼 모든 의리가 완전히 밝혀졌는데도 지금껏 한 명도 스스로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경들은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그 이름을 지적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으니 한탄스럽기가 더하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조만간에 결말이 나고 말 것이다 종기가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림과 같이 하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어쩔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 발언이 나온 12일 이후 정조는 종기의 증세가 심해져 세상을 뜬다 일련의 그러한 발언들이 노론의 결심을 재촉하게 만든 정조의 실수가 아니였을까?
정조가 죽는 자리에 오직 한 사람만이 자리를 지켰으니 그가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 그녀가 누구인가 ?! 김씨는 영조 35년 정성왕후의 뒤를 이어 영조의 계비가 된 이후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의 제거에 앞장섰던 여인이다 정조는 정순왕후의 오라비였던 김귀주를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귀향 위리안치시킨 바 있었다 그녀는 정조의 법적인 할머니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정조의 원수였던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정조의 병세에 훈수를 두고 정조의 마지막 길을 혼자 지켜 보았던 것이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니 너무 어린 나이 탓에 그때까지 살아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일당 노론의 시대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조선 왕조의 파탄의 징조였고 그 씨앗을 잉태한 사건이었다 출처-사도세자의 고백 저자 이덕일 / 이덕일 박사의 기타 저서로는 경종과 소현세자 등의 억울한 죽음을 담은 "누가 왕을 죽였는가"와 수양대군에게 죽은 김종서의 평전인 "거칠 것이 없어라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성학십도-동국십팔선정"와 이건창의 "黨議通略"번역서 등이 있다 |
가야금 연주 - 아무르강의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