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삼각산”이란 지명이 옳으냐/?북한산의 지명이 옳으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고 헷갈리기에 하는 우문인데 쉽게 잊어버리더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공개하자면 이렇다.
고려시대에는 “삼각산”이라 했고,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이라 하여 오늘 날까지 “갑론을박(甲論乙駁) ”이라,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북한산”이 옳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삼각산이 더 친근할 것이다.
먼저 삼각산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골문자의 의존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중국으로부터 한자(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고 신라경덕왕(156년) 전국의
지명을 신라식 이두문자(鄕札)화 하기 시작했다)가 들여오자 왕명에 의해 구술로 전해지던 모든 지명을 바꾸게 하였다.
여시서는 삼국시대를 거슬러 고려시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일단은 “삼각산”이라 정하고)삼각산의 순수한 우리말은
“쇠뿔산”이었다(소(牛)는 “쇠”로 발음된다.(소귀천은 우리말이고 우이령은 이두문으로 쇠뿔산에서 왔다)
이렇게 하여 쇠뿔산(牛角山)이라 했으면 좋으련만 고려가 망할 것을 예견했던지 쇠뿔산의 산신령께서 지명을
정리하던 사람을 현혹시켰는지 어땠는지는 몰라고 쇠뿔산을 세(三)뿔산으로 듣게 하였으니
그는 (뿔이 세(三)개인 산)으로 생각하고 “三角山”으로 표기하여 삼각산이 되었다.
개성에서 보는 삼각산은 인수봉이 쇠뿔의 모습이고 백운대는 쇠머리.염초봉이 몸통에 해당되고 원효봉이
꼬리로 보인다고 한다.(특히 석양에 비추는 인수봉의 백색암릉은 “쇠뿔(牛角)”과 같다고 하니
고려시대(농경사회에서는 소를 가장 중요시 하였다)에는 소(쇠)를 닮은 삼각산을 신성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이라 불렸다.(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려오고 있다)
어떤이 들은 일제의 조작이라 하지만 예매한 말이고...굳이 나더러 말하라면 이렇다.
한 시대를 지배하던 나라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면 예전에 사용하던 지명은 새롭게 바꾸게 되는데
(오늘날도 그렇다) 시대별 변천되어 온 이두문자(향찰)는 조선시대에도 예외 없이 이루어졌다.
삼각산이 북한산으로 바뀌게 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쉽게 생각 해 보면 중악이라 하여(조선시대에는 오악을 두어 산악을 숭배하였다.
1北岳:백두산.2西岳:묘향산.3東岳:금강산.4南岳:지리산.5中岳:북한산)나라의 중심에 두었으며
북한산의 정기를 이어 받은 북악산을 진산으로 하였다.(서악의 묘향산을 구월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서울에 궁궐터를 잡았던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의하여 서울을 외사산과 내사산으로
구분하여 궁궐터를 인왕산 아래에 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나,삼봉 정도전에 의해 현재의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으니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조선건국 200년 만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고 500년의 역사 만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무학은 외사산으로 1삼각산.2아차산(용마산).3덕양산. 4관악산을 삼았으며 내사산으로는
1북악산(백악산)2.낙산.3인왕산. 4남산(목멱산)으로 했는데 외사산의 대강수는 “한강”이고
내사산의 대강수는 “청계천”이다.
고려가 개성으로 궁궐터를 정할 때는 도선 국사가 있었고 조선이 궁궐을 정할 때는 무학 대사가 있었으나,
조선의 궁궐터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는 정도전이었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무학대사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세우고 관악산(호압산)의 화기는
해태 상을 세워 방어하자는 두 사람의 설전에 정도전의 손을 들어준 것을 이성계로 무학의 힘은 여기까지였으니....
무학이 주장하던 인왕산을 주산으로 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개념도
첫댓글 간만에 반가운 님들 만나고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산행에다 산행후 역사공부까지.많은것을 보고 배우는.. 역시 매력이 넘치는 산방입니다...^^
즐거운 산행,행복한 산행, 안전산행까지 그리고 삼각산 의상능선설명에, 모르고지나칠 수 있는 야생화 현호색, 생강나무,노랑제비꽃까지 더 바랄것이 없는 산행였습니다.
산새가 참대단합니다.. 너무멋진곳을 다녀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