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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맹인 바디매오의 믿음
마가복음 10 : 46 - 52
미국에 나이아가라 폭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을 통해서 많이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웅장한 폭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한 번 가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쪽은 미국이고 건너편은 카나다로 약 1km 이상의 넓이와, 50m 높이에서 쏟아지는 폭포는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TV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줄타기 기능 보유자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외줄을 타고 무사히 건너는 장면을 전 세계적으로 보도 한 바가 있습니다.
쏟아지는 물 소리도 장관이지만 밑에는 휘도는 물을 쳐다만 보아도 어지러울 정도인데 그 위에 줄 하나를 매어 놓고 중심 잡는 긴 장대 하나를 들고 건넌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끗하면 폭포수와 함께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카메라맨들과 TV 기자들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건넜습니다. 마침 그날에 물안개가 끼어 더욱 운치를 더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해서 보는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건넜을 때 박수로 축하를 했습니다.
이제 자전거를 타고 건너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또 신기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역시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건넜을 때 또 박수를 쳤습니다. 이제 수레를 끌고 건너겠다고 하며 수레를 가지고 줄 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관중들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수레를 끌고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관중들은 모두 ‘물론이죠, 건너가고말고요. 우리는 당신이 얼마든지 건너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이 수레를 타고 건너갈 사람이 있으면 올라와 이 수레에 타십시요.’라고 했더니 아무도 그 수레에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려고 올라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52). 맹인이요 거지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맹인의 믿음은 기적을 낳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맹인은 거지로 한 평생을 천대만 받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맹인에게 이런 믿음이 어떻게 생겼을까?
그에 대한 답은 47절에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들어야 생깁니다. 로마서 10:17절 말씀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특별히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귀를 기우려 열심히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스쳐가는 바람소리처럼 들으면 믿음은 생기기 않습니다. 설교 말씀을 재미있게 열심히 듣고 받아야 믿음이 생깁니다. 설교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뜬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회당에도 다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았습니까?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말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누구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예수를 지식으로 알았고,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에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예수님으로 압니까?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성경을 배운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네 믿음’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배워 잘 압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해서 생긴 믿음도 아닙니다. 맹인의 믿음은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존재는 믿음에 있습니다.
맹인은 잘 듣습니다. 맹인들은 청각이 매우 발달되어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사리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가려쳐 주지도 않았습니다. 길가에 앉아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기 때문에 길가는 행인들의 이야기꺼리가 되었든가 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습니다(46). 무리들 가운데 묻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감을 잡고 사람들에게 ‘이 무슨 일이냐’(눅18:36)고 물었느냐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무리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맹인은 다른 날 보다 좀 다른 감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맹인의 특징입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이상하면 감을 잡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러나 오늘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나가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시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맹인은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소리쳤다는 것은 맹인의 신앙고백입니다. ‘당신은 메시야,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란 신앙고백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자신을 구원하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로 말해 준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 예수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고 병든 사람을 고쳤지만 사람들 중에 특별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데스나 공자나 맹자와 같은 존경 받는 분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거지 맹인의 믿음이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가 아닌 메시야로,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맹인의 믿음은 행하는 믿음이였습니다. 믿음대로 행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약2:17). 지나가시는 분이 예수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 지금 내 앞을 지나가시는구나’라고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고, 평생을 맹인으로 구걸하며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시란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바디매오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예수님께 구한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믿었다면 그분에게 소원을 구해야 합니다. 당신만이 나를 고쳐 주실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정말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소원을 청해야지요. 소원을 들어 주실 분으로 믿고 기도를 해야지요.
이렇게 소리쳐도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라도 ‘예수님, 저 소경이 저렇게 소리를 치니 안수라도 하시든지 아니면 뭐라고 한 마디 해 주시죠’라고 말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꾸짖고 잠잠하라고 해도 기죽지 않고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확신입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을 때 확신이 없다면 ‘내가 실수했구나, 앞도 보지 못하고 얻어먹는 주체에 실수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더욱 큰 소리를 쳤습니다. 조금도 의심 없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좀 하려고 하다가도 누가 뭐라고 하면 쑥 들어 가 버립니다.
맹인의 확신있는 믿음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습니다(50). 우리는 이 말씀을 좀 재미있게 생각해 봅시다. ‘겉옷’은 거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까운입니다. 거지가 입은 겉옷은 구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까운입니다. 다른 옷을 입고 구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보리밥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는데 옆방에는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도 않고 특별히 돈을 벌지도 않는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그때는 5일 만에 한 번씩 시장이 열리면 만담하는 약장수가 인기가 있어 구경을 하고 쌀 전을 한 바퀴 돌면서 살 한줌씩을 쥐고 먹으면 허기를 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름한 옷을 입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 덥수룩한 모자를 쓰고 구걸하는 사람이 안면이 있어 자세히 보니까 바로 옆방에 사는 사람이였습니다. 모른 체하고 뒤를 밟아 보았습니다. 해가 질렵 쯤 파장이 되니까 어디론가 가더니 옷을 바꿔 입고 다리도 절지 않고 나오는 것입니다.
거지에게 겉옷은 구걸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구걸할 때 그 옷을 입어야 한 푼이라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하니까 겉옷을 내버렸습니다. 겉옷을 내버렸다는 것은 다시 거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더 이상 거지로 구걸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구걸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겉옷을 버리지 않고 한쪽에 챙겨두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시 와서 걸치고 구걸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바디매오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겉옷을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큰일이 생깁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구걸하지 않아도 될 일이 생길 것을 믿었습니다.
다음으로 맹인은 일어나 예수님께로 뛰어 나아갔습니다. 이 역시 맹인의 믿음의 행함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일어나 뛰어가는 그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맹인이 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무리들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향하여 뛰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보고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살짝 몰래 다니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51). 그때 맹인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51). 맹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맹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전능자로, 창조자로 고백한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전능자만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보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고백입니다. 지금까지 길가에 앉아 한 푼의 돈을 구했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만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람에게 구할 수 없는 오직 전능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 구해야 합니다.
거지요 맹인인 바디매오의 믿음은 합격이였습니다. 기적을 일어나게 하는 믿음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시 맹인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이지만 누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외워싸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이러한 믿음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거지요 맹인인 바디매오에게 기적을 낳게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원하는 것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바디매오는 거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밝은 눈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 나사렛 예수로 믿는 믿음입니까? 말씀을 듣고 나의 구원자신 다윗의 자손 예수로 믿는 믿음입니까?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며 죄사함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소원도 이루시고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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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귀한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