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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묵상글 들 (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 용기를 내게 하는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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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용기를 내게 하는 믿음. 2022.01.05 05:23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가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다른 부부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여 좀 다릅니다.
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제 눈에는
냉골에서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사랑처럼 보여
늘 안쓰럽고 안타까워 하는 사랑으로 봐 왔는데
이번에는 형제가 암에 걸려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은 제게도 그의 어머니에게처럼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다 역풍을 만나 악전고투합니다.
그러나 역풍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어두움이고 두려움입니다.
어두움이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영성적 의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현재 좌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수단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이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이 알 수 없음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
누가 다가오면 구해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해치러 오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유령 또는 악령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란 것이 바로 이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믿음의 용기입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은 분명 계시다는 믿음이요,
계실 뿐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실 거라는 믿음이며,
보고만 계시지 않고 나를 구하러 오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인해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던 입이
이제는 용기를 내어 주님이신지 묻고 주님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어두운 밤, 두려움에 쌓일 때는 옆에 강아지만 있어도 덜 두렵지요.
그렇긴 하지만, 오늘 제자들처럼 공동체가 전체로 위험에 처하고
두려움에 쌓일 때, 그때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이 위안은 되겠지만
큰 힘이 되고, 큰 의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주님은 뭍에 계셨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계셨고,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셨지요.
우리가 오늘 복음을 공현 시기에 읽는 뜻은
주님께서 비록 아니 계시고, 아니 보시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우리의 고통과 애씀을 다 보고 계시다가
적절한 때에 엠마누엘 주님으로서 나타나시리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그러니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기 위함이겠지요.
다시 앞에 얘기한 부부를 하면 지금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제게 지금 이 과정은 마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여정이기도
하고 머리로 이해하고 분석하던 신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올 한해도 염치없지만 감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린다고 신년 인사를 보내왔는데, 같이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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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를 이중으로 드러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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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름다운 마무리
오래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8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에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룰라 대통령의 ‘포용의 정치와 아름다운 퇴장’의 모습이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올 것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뒷모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요한3,29)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연장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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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는 별빛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동방박사들은 점성술에 밝았던 고대의 천문학자 겸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지구를 도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해 오고 있었으며 큰 별이 새로이 나타나자 메시아 탄생을 알려주는 징표로 해석하고는 자기가 살던 고장을 떠나 베들레헴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형성된 별들은 저마다의 질량을 지니고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모이기도 해서 하늘의 별자리를 만들지만 저마다 자전도 하고 큰 별을 중심으로 공전도 합니다. 이 움직임은 태초부터 오랜 세월 동안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별들마다 그 움직임이 다르기 때문에 우주 속 한 별인 지구에서 관측하면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별들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저 상대적인 우주 천문 현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다스리심에 있어서 천문현상으로 그 징표를 알려주신다고 믿었기에 점성술이 발달했던 것이고, 그 결과로 역법을 찾아내고 농경에 필요한 기상 기후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천문에 대한 인류의 관심을 활용해서 메시아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큰 별이 나타나던 시점에 예수님을 세상에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이처럼 별과 이 별이 비추는 빛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었던 고리였고, 인생과 세상 그리고 운명과 역사를 사색시켜 주는 자연스러운 소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 같은 자연도 자유자재로 부리시면서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러 물 위를 걷는 기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가득 찼던 두려움은 예수님의 이 행동으로 말끔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별이시며 빛이시고 사랑이시며 진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신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사랑이신 예수님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쫓아내는 힘이 있다고도 증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서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되면 이 행동이 하나의 별이 되고 빛이 되어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별이 되고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별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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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한 입사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 시험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 시험에서는 95점을 맞은 사람이 일등이었고, 이등은 85점이었습니다. 다음 날, 두 번째 시험이 치러졌는데 글쎄 첫 번째 시험과 똑같은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결과는 어제 일등 했던 사람이 똑같은 점수인 95점으로 일등을 했고, 어제의 이등은 90점으로 이번에도 이등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첫 시험과 똑같은 문제가 나왔습니다. 일등을 했던 사람은 10분도 안 되어서 답을 제출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95점으로 전체 일 등이었습니다. 이등이었던 사람은 아깝게 94점을 맞아서 또 이등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누가를 채용했을까요?
이등이 채용되었습니다. 감독관은 탈락한 일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점수는 뛰어나지만, 우리는 최고점을 받은 사람을 채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매번 답안이 똑같고 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회사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운영되면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계속 나아지는 사람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회개를 그토록 주님께서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변화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호수에게 큰 난관에 빠집니다. 맞바람이 불어서 노를 젓기가 힘든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상태인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하십니다. 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인데 말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도움이 요청하여 외치는 일에 더 익숙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의 많은 수가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배 위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떨까요? 스스로 낮추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을 배에 모셨을 때,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바람이 멎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때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셨을 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찰하는 계속된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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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는 믿음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고,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사라진다(조지 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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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희망.
죽음을 앞둔 자매님께서 병자성사를 청해 병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암이 이곳저곳에 전이되어 이제 나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자매님 본인도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고 병원을 가고 있는 제게 가족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계속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 시점에, 영적인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를 만나자마자 그런 준비가 별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야위어 있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저를 맞이해주셨습니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게 건강히 지내라는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위로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분과의 만남에 제가 더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기 모습으로 주변 사람에게 주님의 희망을 전할 수도 있음을 이 자매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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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안톤 채호프의 ‘어느 관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관리가 오페라를 관람하면서 심한 재채기가 생겼고, 참으려다 그만 앞에 있는 분의 머리에 침이 튀었습니다. 앞에 있는 분은 모시는 ‘장관님’이었습니다. 장관님에게 재치기가 심해서 그만 침이 튀었다고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잘 못들은 것 같아서 한 번 더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장관님은 ‘알았네, 괜찮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죄송한 나머지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관님은 ‘알았다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페라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고, 다음날 일찍 장관님께 가서 ‘어제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장관님은 웃으면서 ‘다 잊어버렸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심한 관리는 걱정과 한숨을 쉬면서 하루를 보냈고, 다음 날 아침에 그만 죽었습니다. 티베트의 속담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는 물론 아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상처가 덧나는 것은 상처에 손을 대기 때문입니다. 모기에 물리면 가렵습니다. 그러나 가렵다고 계속 긁으면 모기 물린 자리에서 피가 나기 마련입니다.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구덩이를 더 깊이 파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호수 위를 걸을 때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만 두려움에 빠졌고,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우시고, 호수 위를 거르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앞선 사람은 컵에 남은 반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컵에 남은 반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컵에 남은 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나의 생각에 따라서 그 물은 걱정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꽃이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본향으로 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걱정은 나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화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 사나운 동물, 독이 있는 벌레,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식물, 추위, 배고픔, 병, 폭력,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피하기 위해서 인간은 두려움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인간의 지혜와 협력으로 하나둘씩 해결되어 왔습니다. 지금,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초초’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 當歡己作悲(당환기작비)’ 근심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기쁜 마음이 벌써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이것은 뉴턴의 물리학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빛이 상황에 따라서 파동과 입자로 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차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차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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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기도, 사랑, 지혜, 용기" -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이루는 기도와 사랑, 지혜와 용기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보면 어제 복음의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 예수님의 기도가 그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마르6,46)
예수님의 삶 한 복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요,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입증합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이었지만 삶의 중심에는 늘 홀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친교의 관상 기도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바로 여기 기도에서 샘솟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되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형제애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깊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일치도 더욱 깊어지고 하느님 중심의 삶도 확고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수록 아가페의 형제애도 깊어질 수 뿐이 없습니다. 어제 제1독서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10회 나왔는데 오늘은 12회 나옵니다. 과연 사랑의 사도 요한이요 사랑은 사도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랑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에 앞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이 전제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때 더욱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더불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이런 사랑은 참으로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초연한 사랑, 치유하고 위로하는 사랑,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아가페 사랑으로 정화되어야 할 오염되어 불순한 이기적 육적 탐욕의 우리 사랑임을 봅니다. 기도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지혜와 용기,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그대로 기도와 사랑의 열매이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후에 즉시 군중의 인기에 유혹되지 않고 즉시 이들을 떠나 산으로 홀로 물러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기도 시간과 공간을 마련함으로 자신을 추스립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전시키며 자신의 참모습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그러니 기도는 사랑과 지혜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기도의 힘, 사랑의 힘이 대단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바로 요한 사도의 깊은 하느님 체험을 반영하며 그 결정적 증거를 예수님에게서 보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깨닫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늘 기도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좋은 증거요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그대로 예수님의 기적, 하느님의 기적, 사랑의 기적입니다. 산에서 기도하던중 사랑의 영안靈眼이 활짝 열려 호수 한 복판에서 폭풍으로 곤경중에 있던 제자들을 보셨으며 즉시 개입하신 주님이십니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인생 항해 중 심한 격랑의 파도로 난파되거나 조난 중인 가정이나 인생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대로 오늘 복음의 호수 한 복판에서 폭풍으로 곤경중인 제자들의 배는 오늘날 세상 바다에서 인생 항해중인 교회 공동체나, 온갖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세상 바다에서 인생항해중 불안과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 기후위기와 코로나 및 내전상태를 방불케 하는 극심한 생존경쟁 중에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게 살아가는지요! 참으로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누구나의 내면 깊이에는 공포와 긴장, 불안과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내외적 참 평화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시는 사랑이신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I AM)’은 바로 탈출기에서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하느님 이름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천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된 예수님이기에 이런 사랑의 기적인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성서에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무려 365회 나온다니 일년 365일 매일 이 말씀을 상기하며 살라는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거의 언제나 한결같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두려움 역시 무지의 결과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두려움입니다. 무지의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사랑뿐임을 오늘 사도 요한이 답을 줍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셨기에 두려움 없이 폭풍 속 호수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 예수님이 오르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참 중요한 상징적 장면입니다. 우리 공동체 중심에,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때 비로소 두려움의 폭풍은 평화로운 미풍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은 아직도 우리 사랑의 부족을 알려주는 표지입니다. 사랑의 빛만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고 사랑의 힘만이 폭풍을 미풍으로 바꿉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사랑이신 주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복음의 마지막 묘사도 우리를 각성케 하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망각忘却과 마음의 완고頑固함, 이 또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참으로 늘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망각과 마음의 완고함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하도록 합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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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어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통하여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자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향합니다.
그런데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맞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제자들은 위험에 놓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모습과,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는 상황은 그분의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분께서는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지니신 능력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맞바람에 노를 젓느라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가시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위험에 놓인 제자들을 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험에서 구출하십니다.
‘새벽녘’은 바로 구원의 시간입니다(시편 46[45],6 참조).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멀리서도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보시고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비되는 제자들의 모습,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신앙 여정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요한 시간도 있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폭풍의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으로 노를 젓는다면, 우리의 배는 세찬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참하느님,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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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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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 51)
지나가는
풍랑의
시간이다.
풍랑 속에서도
길을 찾는
우리들이다.
파도처럼
부서지지
않고서는 진정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신앙이다.
풍랑,
그 한 가운데에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함께 계시기에
거센 풍랑도
은총이 된다.
흔들어놓기에
주님을 향하는
간절한
은총인 것이다.
간절함이
은총이다.
풍랑의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시간인 것이다.
숨길 수 없는
은총의
현주소이다.
풍랑도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운
풍랑 속에서도
용기를 내는
것이다.
목마를 시간이
없는 은총의
연속이다.
삶을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이듯
풍랑을 치유하는
것은 풍랑이다.
인생의 맛은
풍랑을 통해
깊어지는
믿음의 맛이다.
풍랑이 지나간
자리가 은총의
자리였다.
믿음이란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이곳이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다.
풍랑의 빵이
믿음의 빵이다.
풍랑의 빵을
먹으니
풍랑은 우리를
사람이 되게하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풍랑 속에서
열리는
믿음의
순간들이다.
사람다워지는
풍랑의
시간이다.
풍랑보다
더 센
사랑이시다.
뒤집어지고
엎어지며
삶을 배우는
우리들은
풍랑의
자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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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마르 6,45-47).”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군중은 그 기적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했습니다.
<‘빵의 기적’의 참 뜻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입니다(요한 6,27).>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해 주는 지도자가 되라고 강요한 것입니다.)
<그런 군중의 모습에서, “그래도 그때가 살기 좋았다.” 라고 말하면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반민주적인 독재 정치와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는 잊어버리고(생각하지 않고)
경제 상황이 좋았다는 것만 기억하면서,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그저 배불리 먹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먼저 가게 하신 것은,
제자들과 군중을 따로 떼어놓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군중의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산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은, 어리석은 인간들 때문에
답답해진 심정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8-52).”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사실 ‘빵의 기적’은, 엘리야 예언자와 엘리사 예언자도
행했던 기적입니다(1열왕 17장; 2열왕 4,42-44).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은
구약시대 예언자들도 했던 일이고,
사도들도 했던 일입니다(마르 6,13; 마태 10,8).
그러나 물 위를 걷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 9,8).
따라서 예수님이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체험했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의도 없이, 상황이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일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데, 보통 그 바람과 파도를, 인생살이의 고난과 시련들로,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자들의 신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험으로 해석됩니다.
육신의 배부름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중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탈피’ 과정 같은 것.
그런 과정 없이 저절로 신앙이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해서
겁에 질린 일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낮은 단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한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 시간에 그렇게 유령처럼 다가오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령처럼 다가오니까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 아닌데,
그렇게 ‘유령 따위’를 무서워한 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습니다.)
귀신이나 유령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귀신이든 유령이든 사탄이든 그 무엇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특히 사탄은(마귀는) 공포심을 자신들의 무기로 사용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을(마귀를) 무서워하면 할수록 그것의 억압과 지배를 더 크게 받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과 용기가 부족한 것을 꾸짖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꾸짖지 않아도 제자들 자신들이 스스로 믿음과 용기 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에 완전히 압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크게 놀랐는데, 그 일은 그들 안에서 하나의 씨가 되어서
나중에 완전한 믿음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들 자신들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빵의 기적을 체험했으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기만 했을 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런 고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확실하게 믿는다.” 라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사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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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감수성의 회복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
현대를 감성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일찌기 바오로 6세 교종은 '현대인의 가장 큰 죄는 무감각'이라고 갈파하셨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한 영적 감수성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다(6,45). 왜 그토록 서둘러 제자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그분을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정치적 해방자로서 왕으로 떠받들려 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제자들이 말리게 되면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소요에 휩싸이지 않도록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예수께서 홀로 남아 군중을 헤쳐 보내신 것이다.
제자들을 세상 한가운데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시어 ‘우리가 찾기도 전에’, ‘구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6,46).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6,47)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저녁' 곧 예수님과 무관하게 욕망과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바로 곁에서 눈여겨 보신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제자들은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6,48)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느님 밖에서'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하여 풍랑을 헤쳐가려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셨다(6,48).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6,48).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할 여백을 주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6,49). 빵의 기적을 보며 늘어난 빵의 양에 놀랐던 그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감각이 없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50) 하고 격려하시고 두려움의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신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6,51). 이를 본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제자들이 넋을 잃은 것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알아뵙는 영적 감수성을 회복함에서 온 '사랑의 경탄'이었으리라.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 까닭은 ‘마음이 무디어서’였다. 포로우(πορὀω)란 말은 ‘무디어서’라는 뜻 외에도 ‘느낌이 없어서’, ‘이해할 힘을 잃어버려서’란 뜻이 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영적인 느낌이 없어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힘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파견되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미 그분이 주신 ‘은총의 배’를 타고 있다. 우리네 삶은 세상적인 힘겨루기가 아니며 어떤 일도 결코 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 손안의 연장’일 뿐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일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영적 감수성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던 것은 순전히 외적으로 늘리는 빵의 수와 일처리만을 보았지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감수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제자들의 눈을 가려버렸던 것이다. ‘완고함’이란 어떤 일을 통하여 사건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할 능력을 스스로 상실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를 ‘은총의 배’에 태워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느낌을 회복하도록 하자. 완고함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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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부재시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
사도단 일행이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맞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파도가 얼마나 거세던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배는 항상 그 자리였습니다.
기진맥진 탈진해져 제정신이 아닌 제자들 앞으로 예수님께서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스승이요 주님, 구원자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상황을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해봤습니다. ‘정말이지 웃기는 짬뽕들이로구나. 해도 해도 너무한 녀석들이다. 스승인 나를 보고 유령이라니. 쯧쯧!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의 모습이 엄청 웃겼을 것입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제자들을 진정시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보고 사색이 되어 유령이라고 외쳤던 사도들, 그러나 막상 확인해보니 스승님이셨습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주님 부재시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 위로 승선하실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여객선 상층부 갑판 위로 올라가보면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라고 안전장치인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가 기우뚱할때면 만사제쳐놓고 난간을 꼭 붙드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라는 배 안에도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 수 있는 영원한 안전 장치가 있습니다. 든든한 선장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관계로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크게 요동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계시는 복원력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여기저기 교회 안에 설치되어 있는 안전장치를 꼭 붙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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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앙생활을 해도 사자가 아니라 하이에나가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그들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냥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배에 태우지 않고 어려움만 극복하게 해달라고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바람을 멎게 해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에 물에 샌다던가, 동료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등의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그분의 도움이 아닌 그분 자신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말년에 당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주님은 다 데려가시고 당신만 외롭게 남은 것에 하느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기도만 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분은 마치 자신을 외롭지 않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는 왠지 ‘지금은 섭섭하지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신다면 사랑할게요!’ 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그분이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자 바람이 멎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람을 멎게 하시고 배에 타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그분께 감사하여 그분을 우리 배 안에 맞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 모든 어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하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집을 떠나 몇 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러저러한 산에 가면 그 꼭대기에 현자가 살고 있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 현자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우여곡절 끝에 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현자를 만나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현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숲에 하니에나 한 마리가 살고 있었소. 하지만 그 하이에나는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았소.
그런데 하이에나의 특징이 뭔지 압니까? 하이에나는 먹잇감을 발견하면, 떼로 공격한다는 거요.
그러다가 그 가운데 한 마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놔두고 떠납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단지 공격할 때만 함께하지요.
그것이 일반적인 동물의 생리지요.
그래서 그 다친 하이에나가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 순간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소.
사자는 죽어가는 하이에나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하이에나를 자기 굴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보살폈소.
그리고 하이에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현자가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현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안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래, 집에 가야겠다. 가서 사자 앞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게 가족과 함께 살다 보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는 현자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정말 그는 행복해졌습니다.
가족들은 겸손해져서 돌아온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귀향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가 사랑을 얻고 가족의 돌봄으로 편안하게 되자, 마침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 듯했습니다.
‘현자의 말이 옳았어. 그동안 나는 인생을 헛살았던 거야. 가족과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가족들은 각자 삶에 바빠 그에게 관심을 덜 쏟게 되었고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하는 그를 지겨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외로워졌고 인생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현자가 틀렸는지 몰라. 다시 찾아가 봐야겠어.’
그는 현자가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현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랑이 곁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이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현자님의 말씀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움만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도움을 주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듣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치유의 순간’, 안토니오 사지, 바오로딸]
예수님께 도움만 청하는 사람은 그분의 도움을 어설프게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기분의 도움이 아니라 그분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이에나처럼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닌 사자처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 정말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불완전한 신앙에서 그분 자신을 사랑하는 참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주교가 된 지 몇 년 후에,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13년 9개월 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신자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투안, 너는 나를 선택했느냐? 내 일을 선택했느냐?”
투안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배에 예수님은 태우려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며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한 것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시려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분이 도움을 주시면 사랑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내 안에 모시는 것만이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하이에나의 삶에서 사자의 삶으로 바뀝니다.
진정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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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묵상과 기도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류를 위한 자애와 사랑입니다. 주님 공현은 하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 아기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예수 아기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그분 사랑이 완성된다. 그분께서 당신의 영을 주셨기에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 우리안에 머무는 것을 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시고 곧바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시고, 그리고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배 위의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두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1-18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마르 6,45-52
실천
예수님은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일에서 '빵의 주님'이었습니다. 빵을 먹이는 목자였습니다. 뿐 만 아니라 그들에게 빵을 먹이고서는 다시금 기도하러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려는 아버지와의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하느님 나라의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나라의 일이 늘 새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당신의 권능을 기도와 함께 이루어진 일입니다. 기도와 함께 이루어진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믿음과 용기를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 그 제자의 길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은사와 능력을 거룩하게 하시고 쇄신하십니다. 기도와 함께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기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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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4,11-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좇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8) 여기서 '두려움'으로 번역된 '포보스'(phobos)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큰 기적과 기적적인 일앞에 사람들이 보인 두려움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마르4,1; 루카2,9; 요한7,13). 또한 가까운 미래에 닥칠 고난과 환난으로 인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묵시18,10). 요한 1서 4장 18절은 후자의 의미로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두려움을 나타낸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하느님의 임재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진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영적 담대함을 가진 자는 심판 때 죄인들이 갖게 되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완전한'으로 번역된 '텔레이아'(telleia)의 원형 '텔레이오스'(telleios)는 '온전한','성숙한'이라는 뜻이다(1코린14,20; 콜로4,12; 야고3,2).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목표로 삼고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속에 실현하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의 두려움조차 쫓아낸다. 한편 '쫓아냅니다'로 번역된 '엑소 발레이'(ekso ballei)는 '밖으로 내던지다'라는 뜻이다. 먼저 '내어'로 번역된 '엑소'(ekso)는 장소적 이동을 뜻하는 전치사로 '안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며, '좇아'로 번역된 '발레이'(ballei)의 원형 '발로'(ballo)는 '던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엑소 발레이'는 내부에 있는 어떤 것들을 밖으로 던져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완전한 사랑이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생각과 마음 밖으로 던져 제거한다는 뜻이다. 참된 사랑안에 머무는 자에게는 궁극적인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 지배하는 자에게 두려움은 설 자리가 없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두려움은 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형벌이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지는 그분께 대한 합당한 존경의 감정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죄인들이 갖는 감정으로서 그곳에서는 반드시 합당한 형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형벌을 인식함으로 인하여 더욱 더 두려워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형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벌'로 번역된 '콜라신'(kollasin)의 원형 '콜라시스'(kollasis)는 신약에서 본절과 마태오 복음 25장 46절에 단 2회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이 단어를 최후의 심판의 날, 죄인들이 받게 될 영원한 벌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 여기서도 '콜라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죄인들에게 내려질 영원한 지옥벌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서 사랑과 두려움을 대조하며 공존할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면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큰 장애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나의 의로움, 사랑이 구원의 가치없는 ‘헛것’임을 인정하는 그 자기부인(죽음)으로 하늘의 대속, 그 완전한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어 용서로 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가시적 사랑도 나오지 않게 된다. 곧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차별적(위선적)인 사랑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 하면서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6,45-52) 45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앞 절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율법, 육(죽음)의 빵을 예수님께서 받아 품으시고(대신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하늘의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으로 바꿔 주셨는데~ 모든 사람이 그 생명, 영의 양식이 아닌 육의 양식으로 먹었던 자리, 그 육의 신앙에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떠나보내신 것이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빵을 육의 빵으로 먹었을 때 일어날 고난의 일들을 경험하게, 그리고 가르치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과 방법으로 하시려고 기도 하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 제자들이 겪을 시련을 아셨을 텐데 혼자 뭍에 머무르셨다.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 호수(바다)는 삶의 시련, 고뇌의 풍랑이 이는 세상을 뜻한다. 그 삶에서 구하시려 하늘의 희망, 생명의 빵을 주셨던 것이다. 그 육, 세상의 풍랑을 예수님께서 밟으시고, 누르시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가시려고 하신다. 물론 의미가 있다. 하느님을 보신 것이다. (탈출12,23) 23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지나시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은 거르고 지나가시고 파괴자가 너희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 어린양의 피,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다. 그분의 죽음으로 파괴자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탈출34,6) 6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공동번역성서) =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사랑과 진실(진리)이 그 풍랑의 바다를 밟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풍랑의 삶을 누르신다는 것이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 성경 말씀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피로 모든 죄를 씻어주신 자비와 은총의 그 십자가의 사랑,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들의 계명으로 받으면, 하느님은 유령 같은 무섭고 두려운 신이 되어 버린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탈출3,14)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있는 나’- ‘야훼’ 같은 의미다. 구원의 약속, 사랑, 자비, 의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물 위를 걸으실 때는 왜 멎지 않았을까?~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같은 뜻, 같은 의미라는 말씀이다. 빵의 기적에서 율법, 그 육(죽음)의 빵을 받아 드시고(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빵으로 그들을 살리셨듯이, 예수님께서 그들 대신 죽으시고 그들을 살리셨다는 말씀이신데, 예수님께서 그 당신의 구원의 표징을 요나의 표징으로 말씀 하셨었는데--- (요나1,11-12.15 2,1)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 풍랑으로 곧 죽어야 힐 배 안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졌던, 그리고 그 죽음의 물에 사흘 낮과 밤을 있었던 요나,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죽어야 할 니네베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어 살렸던 그 요나가 구원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땅속에 사흘 낮과 밤을 지내신 그 예수님의 사흗날의 죽음과 부활, 그 구원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교회)에 오르시자 풍랑이 멎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루가11,32)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요나보다 더 큰 이, 요나가 한 일의 실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그분의 대속의 사랑을, 구원의 진리로 믿고 간직하는 것, 그 진리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 그래서 너와 내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1요한4,10-11. 16-17)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하는 것, 사랑의 완성이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 인간의 사랑은 심판을 거르는 그 완성을 이룰 수가 없다. 하느님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심판을 이기는 완성된 사랑이며 예수님 처럼 사는 것이다. 본문 사랑 앞에 ‘그’를 붙여 그 사랑,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 하지 않고 그냥 사랑으로만 받는다면 자칫 인간의 사랑으로 받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義, 善)과 상관없는 구원이 없는 세상, 율법과 같아질 위험이 있다. (마태5,20)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인간의 그 자기 의로움, 그 사랑으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인간의 사랑, 의로움- 중요하지만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 계명을 둘로 주신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그 중에 하늘의 것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신명30,19)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천주의 성령님! 닫혀있는 저희 모두의 눈과 귀를 여시어 살게 하소서. 의탁합니다.~아멘!!!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복음 (마르6,45-52)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1)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 11장 28~31절에 나오는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하고, 자신도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는 순간 두려움으로 결국 물에 빠진 사건을 생략하고,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기사만을 묘사하더라도, 제자들의 불신앙과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적인 능력을 부각시키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르시니'에 해당하는 '아네베'(anebe; he climbed into; he went up)와 '멎었다'에 해당하는 '에코파센'(ekopasen; ceased; died down) 두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접속사 '카이'(kai; and)에 의해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동사를 연결하고 있는 접속사 '카이'(kai)는 여기서 거의 동시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바로 바람이 멎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아드님 되심과 초자연적인 능력이 잘 드러나는 실례로서, 당신이 자연을 초월하며 주관하는 '자연의 주'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놀라'에 해당하는 '엑시스탄토'(eksistanto; they were completely amazed)의 기본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두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 어원적 의미는 '어떤 물건을 밖에 두다'이다. 이 동사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정신을 잃다'는 의미가 되며, 성경에서는 '정신이 나가다','미치다'(2코린5,13), '놀라다'(사도8,13)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이 동사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정신이 나가 어안이 벙벙해하는 제자들의 상태가 어느 정도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6장 50절의 '겁에 질렸던 것이다'는 표현과 6장 52절의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사건을 믿음과 신뢰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제자들의 성숙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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