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1요한 2,3-11; 루카 2,22-35;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2022.12.29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서(탈출 13,2)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먼저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거니와, 더욱이 예수 아기는 성령께서 잉태시켜 주신 이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봉헌하고자 했던 지향은 이 아기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듣기 위한 침묵으로 이어졌습니다.
Giovanni Bellini. Infant Christ and Simeon.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Lugano-Castagnola, Switzerland.
특히 성모 마리아에게서 이 침묵의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부터 마리아께서는 이 전갈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루카 1,29). 짐승들의 우리 동굴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에 목동들이 찾아와 경배하며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루카 2,19). 목동들이 전해준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루카 2,10-13)이라는 것이었고, 이어서 갑자기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하고 찬미하였다는 말까지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저 멀리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박사 세 사람이 귀한 예물을 바치러 아기에게 경배하러 왔을 때에는 더욱 놀라웠기에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아기로 인해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담긴 뜻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마태 2,1-12).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었을 때,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관습에 따라 처음으로 소년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가 잃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사흘만에야 겨우 찾아냈는데, 그때 소년 예수님께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대꾸하였는데, 이때 성모님께서는 어린 아들이 보이는 이 당돌한 반응에 대해 당황하시면서도 이 뜻밖의 반응에 대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습니다(루카 2,51).
분명히 부부지간에 공유되었을 이러한 성모님의 태도는 그나마 복음서의 기록에 나타나 있기라도 하지만, 요셉의 경우에는 복음서마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혼 직후 느닷없이 일어난 성령 잉태 사건 당시에 요셉이 보인 태도로 미루어보면, 하느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는 징표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도 그 징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느라고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을 것입니다.
이 ‘침묵의 성모’ 성화는 2010년 경에 이집트의 그라피토(graffito: 건축물에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글씨나 그림)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 이후, 이탈리아 오르타 줄리오에 거주하는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준 이러한 침묵에 대해, “침묵은 영혼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입니다. 이를 중대시하는 마음이 소란스러움으로 포위당해 있는 우리들 안에서 재생되었으면 합니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보여준 이 나자렛의 침묵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들에게도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묵상, 그리고 내적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 부모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자녀들을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 자녀들을 기르는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개입하시고 이끄시려는 말씀을 침묵 속에서 귀담아 들어야 마땅합니다. 자녀들을 마치 자신들의 사랑으로 인한 결실이라고만 여긴다든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자신들의 못 다한 꿈을 실현해 보려는 도구로 여기는 태도야말로 전형적인 무신론 가정의 모습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기른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녀를 길러야 하고(1요한 2,4), 그분의 계명을 실천해야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기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아보고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대화에서 알아들은 대로 자녀를 존엄한 존재로 기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될 것입니다(1요한 2,5).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하느님의 빛 속에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자녀를 대한다면, 그 가정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1요한 2,11).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6세 교황이 강조하는 대로, 나자렛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배울 수 있는 복음의 학교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지극히 소박하고 겸손하며 아름다우신 가정생활의 계시, 그렇게도 심오하고 은밀한 그 계시가 지니고 있는 귀한 의미를 보고 듣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얻어진 영적 감수성은 한평생 그 자녀들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내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장성하여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에 부모가 투자한 침묵과 기도에 비례하여 달라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가정 축일을 하루 앞두고 가정의 성화를 위한 지혜에 대하여 특히 침묵의 지혜에 관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 묵상하여 전해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