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7.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
빌 2:5~8
〈 마음을 품지 않으면 〉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후드티를 입고 지나갑니다.
갑자기 ‘나도 후드티를 입고 젊은이처럼 걷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입어봐야지’ 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마음을 품었습니다!”
마음을 품고 쇼핑에 나섰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다가 상설할인매장에서 한 벌 골랐습니다.
입고 집에 왔더니, 아내가 탐을 냅니다. 아내도 “후드티 입고 싶다”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것으로 한 벌을 더 샀습니다. 커플룩으로 입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 2:5)
제가 ‘후드티를 입고싶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생전처음으로 후드티를 사서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후드티를 입고싶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마음을 품는 일’로 어떤 것을 시작합니다.
‘마음을 품는다’ 이것은 오직 사람만이 하는 특권입니다.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 어떤 개가 사람을 물었습니다.
그 개가 ‘내가 저 사람을 물어 뜯겠다’는 마음을 품고 그리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은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행동합니다.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본능적으로 공격합니다.
좌고우면하거나, 할까말까 망설임도 없습니다. 본능적으로 행동에 옮깁니다.
“마음을 품으라!” 이는 사람만이 가진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품을까, 저 마음을 품을까, 생각하고, 망설이기도 하다가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마음을 품지 않고,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행동하는 이가 있습니다.
멍하니 아무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다보면, 동물처럼 본능적인 행위만 합니다.
☞ 혹시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 귀한 마음을 품어야 〉
게으름, 나태, 무사안일, 복지부동…
이런 것들이 바로 ‘아무 마음도 품지 않아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마음을 품는 존재다!’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반드시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 마음도 품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님들,
매일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늘 고민합니다. 딸과 대하게 될 때는, ‘아버지로서 어떤 마음을 품고 대해야 할까?’
어린 손주들이 집에 옵니다. ‘할아버지로 어떤 마음을 품고 대할까?’
미리 준비합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그저 짜증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힘들고, 귀찮거든요! 신경이 쓰이거든요! 특별히 어떤 마음을 품지않으면?
‘소 닭보듯’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 의외로 많습니다.
부부간에 소 닭 보듯 합니다. 부모님을, 소 닭 보듯 하면서 삽니다.
‘소 닭보듯 한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소는 닭을 향해 아무 마음도 안 품어요. 그저 제 먹을 것만 우물우물 씹어댑니다.
사람이 이렇게 소나 닭처럼 살아야서야 되겠습니까?
반드시 우리는 어떤 마음이든지, 품어야 합니다. “마음을 품으라!” 5회 반복해봅니다.
마음을 품지 않으면 소가 됩니다. 닭이 됩니다. 개가 됩니다!☻
‘멍따 대회’가 있습니다.
이 대회는 사람이 ‘아무 마음도 품지 않는 상태로 오래 있기’ 대회입니다.
멍따 대회에 나가면 아무 마음도 품지 않고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잠이 오겠지요?
잠이 들면 탈락입니다. 잠 들지 않으면서, 아무 마음도 품지 않고 오래 버티기가 멍따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 사람이 사람인 이유, 멍따가 아니라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가족간에도, 교회에서 성도간에도, 반드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품을 때 사랑이 나옵니다.
‘이 사람을 마음 편하게 해 주어야겠다.’ 이 마음 품지 않으면 상대는 늘 불편합니다.
‘마음을 품으라!’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명심해야 합니다.
☞ 하루를 살아도 귀한 마음을 품어야 그 하루가 귀한 하루가 됩니다.
〈 첫째, 자기를 비우는 마음 〉
‘마음 품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셨지요?
이제부터라도 ‘마음 품기’를 알고, 하루하루 귀하고 좋은 마음을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 품기’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큰 것으로 진전을 시켜야 합니다.
‘나는 목사가 되겠다.’ 이 마음을 품었기에 지금 이렇게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은 ‘나는 문학가가 되겠다.’ 이 마음을 품었기에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는 한국의 대통령이 되겠다.’ 이 마음을 품었기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문학가가 되고, 정치가가 되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노벨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마음 품기’가 있습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 2:5)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 품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가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요?
첫째 ‘자기를 비우는 마음’/ 둘째 ‘종으로 낮아지는 마음’/ 셋째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첫째 ‘자기를 비우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합니다. 한쪽이 더 높거나 더 낮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은 동등됨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말이 쉬워서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지 무척 어렵습니다.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아래 사람없다! 들어보셨지요?
본디 사람 사이 상하가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상대를 자기보다 아래로 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절)
‘낫게’ ‘ㅅ’받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혹을 하나 붙입니다. ‘ㅈ’받침을 써요!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기지 말고, 낫게 여겨라” 발음은 똑같아요, 획 하나 차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 둘째, 종으로 낮아지는 마음 〉
자기를 비웠으면 반드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 거리에 나가보면 음식점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흥하고, 어떤 집은 한산합니다.
제 눈에만 보이는지 모르겠는데요, 흥하는 식당에 가 보면, 주인의 태도가 다릅니다.
주인이 마치 하인처럼 고객을 대한다는 느낌을 주는 식당이 있어요!
손님 앞에서 주인이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 식당치고 망하는 집 못 봤어요! 반드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주인이 고객 앞에서 자기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7~8절a)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a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성부성자성령이 동등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피조물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첫째 ‘자기를 비우는 마음’/ 둘째 ‘종으로 낮아지는 마음’의 실현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볼까요? 《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셨습니다!”
최고 높은 곳에서 최고 낮은 곳으로 하강(下降)했습니다. 비하(卑下, 飛下)했습니다.
비천하게 낮아지고(卑下) 천상에서 지상으로 날아서 내려왔습니다.(飛下)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2천 년 전에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납니까?
① 자기를 비우는 마음 ② 종으로 낮아지는 마음을 보여주시려고 이렇게 하십니다.
왜요? ~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비우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을 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우는 마음을 품자!” “낮아지는 마음을 품자!”
이 마음 품지 않으면, 결코 평강이 없습니다. 복락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 낮아짐으로 기쁨, 복락, 평강을 얻는 줄 믿습니다!
〈 셋째,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
예수님의 낮아짐,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높은 데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낮아짐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있는 자리는 하늘이 아니잖습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의 자리에서, 창조주로서 자기가 만든 사람의 자리까지 낮아집니다.
부모가 자식의 자리로 낮아집니다. 스승이 제자의 자리로 낮아집니다.
저희 부부 손주들 앞에서 낮아지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예수님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래야 평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평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셨는데, 거기서 한 번 더 낮아지십니다.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① 자기를 비우는 마음 ② 종으로 낮아지는 마음 ③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예수님은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면서 이러한 마음을 품고, 품은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① 비우는 마음 ② 낮아지는 마음 ③ 복종하는 마음
이 마음을 품고, 이 땅에 피조물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어떤 마음인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① 비우고 ② 낮아져 ③ 복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여기서 출발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합니까?
① 이렇게 해야, 평강이 있으니까!
② 이렇게 해야, 죄인을 구원할 수 있으니까!
③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인이 구원받게 되니까!
이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이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셨습니다.
《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오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
할렐루야~